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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한용 Feb 13. 2024

더 낫게 실패하라

유머, 실패를 허용하는 세계

인생은 대부분의 영역에서 실패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옷. 옷을 못 입는 사람은 ‘패션 테러리스트’라고 조롱 당한다. 그렇다고 잘 차려 입겠다고 너무 눈에 띄게 입어서도 안 된다. ‘관종’ 소릴 들을테니까. 그런 거 다 귀찮으니 대충 입으면 어떻게 될까. 성의 있게 좀 입으라고 한 소리 듣지 않을까. 음식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식당에 가차없다. 맛없는 식당엔 두 번 다시 가지 않는다. 실패가 허용되지 않는 가장 대표적인 영역은 연애다. 특히 젊은이들은 남들이 뭐라 하지 않아도, 스스로를 성적으로 매력적인 존재라 느끼지 못 하면 괴로워한다. ‘모태솔로’는 낙인이면서 조롱 거리이기도 하지만, 그 자신의 자존감을 깎아버린다는 점에서 치명적이다. 짝사랑이나 고백에 대한 거절, 연인에게 당하는 이별 통보도 마찬가지의 고통을 준다. 물론 상당수의 페미니스트 여성들은 이성애 규범이 억압적이며, 동시에 폭력의 위협까지 안겨준다고 여기기에 이로부터 벗어나고자 ‘탈코르셋’과 더불어 ‘탈연애’를 선택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선택으로 인해 ‘선택 받지 못 한 자’, 즉 매력 형성에 실패한 자로 자신이 오해 받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이런 경우, 자신은 자발적으로 연애를 ‘안’하는 것임을, ‘탈연애’를 했음을 분명히 밝히려고 한다(물론 이런 오해에 전혀 신경쓰지 않는 경우도 없진 않겠지만). 일의 영역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직업적인 실패만큼 자존감을 무너뜨리는 게 또 있을까? 슬프게도, 후기 자본주의 사회 /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무능은 죄다. 아니 죄 이상이다. 죄 지은 일이 없어도 무능한 자들은 멸시당한다. 하지만 범죄를 저지른 부유한 자들은 그 어떤 범죄에도 불구하고 칭송된다. 심지어 ‘경제적 범죄’의 경우 온 사회가 나서서 옹호를 해주기도 한다. 물론 여기엔 예외도 있다. 다만 내 얘기의 핵심은 우리가 ‘무능을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허나 우리는 언제나 어디에서나 실패할 수 있다. 옷이든, 식사든, 연애든, 일이든.


물론 세상의 모든 영역이 실패에 너그러워야 한다는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파일럿의 비행기 조종 실패는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다. 실패한 자동차 설계가 도로 위의 생명을 위협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영역에선 실수가 있어선 안 된다. 완벽함과 기계적인 정교함이 필수다. 다만 삶의 모든 영역이 그런 완벽주의에 짓눌려 가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많은 노동자들이 번아웃과 정신 질환을 호소한다. 강박에 가까운 완벽주의가 숨통을 조여오기 때문이다. “조금의 실수도 해서는 안 돼. 실패하면 끝장이야,” 이것이 후기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정신의 디폴트다.


예외도 있다. 실패가 허용되는 너그러움의 세계. 문학과 농담이다. 문학은 대부분의 걸작들이 실패한 자들의 실패한 이야기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에서 개츠비는 좋은 사람을 알아보는 데도 실패하고, 사랑을 이루는 데도 실패하며, 그 실패를 이겨내 꿋꿋이 살아남는 데도 실패한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속 어부 산티아고도 청새치를 낚아서 가져오는 데 실패한다. 허먼 멜빌의 <모비 딕> 속 에이허브 선장과 이스마엘도 배에 탄 목적을 이루지 못 한다. 고래 모비 딕을 잡는 데 실패하는 것이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속 뫼르소는 다층적으로 실패하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정직함을 이해받는 데 실패한다. 아니 그는 그냥 그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 자체를 실패한다. 그는 그 자신으로 존재하려면 세계에서 사라져야 한다. 그래서 사라진다. 카프카의 작품 속 주인공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거의 실패하려고 태어난 인물들처럼 보인다. 하지만 문학은 그 실패를 통해 세계를 사유하는 문을 연다. 실패함으로써 성공하는 것이다. 소설 <모든 것은 영원했다>에서 정지돈은 이렇게 썼다. “유능함이 자신을 증명하는 종류의 능력이라면 불능은 세계를 증명하는 능력이다” (거의 모든 뛰어난) 문학은 세계를 증명한다. 그리고 이것은 (거의 모든 뛰어난) 농담이 해내는 일이기도 하다. 농담은 거의 대부분 우리의 결함을 다룬다. 우리의 정의로운 면, 아름다운 면은 찬사의 대상이지. 농담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러니까 아름다움만으로 가득한 세상이었다면 농담은 작동하지 못 했을 것이다. 즉, 농담이 결함 투성이의 인간과 세계를 증명하는 것이다. 조지 오웰의 말이다. “농담의 목적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비하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원래부터 이미 우스꽝스러웠다는 사실을 환기하는 것이다”


문학과 농담은 문학과 농담, 그 자체의 실패를 다루기도 한다. 로베르토 볼라뇨의 <야만스러운 탐정들>이 대표적이다. 작품 속의 전위적인 시 문학 운동 ‘내장 사실주의’는 실패로 끝난다. 문학적 재능의 실패일 수도 있고, 세계의 실패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때부터 기막힌 역설이 나타난다. ‘기깔나는 문학을 세상에 내놓지 못 하고, 황폐함만 남아버렸다’는 이야기가 그 자체로 뛰어난 문학이 되는 것이다. 농담에서도 이 역설은 작동한다. 이를테면 “나는 왜 제대로 된 농담을 던지지 못 했는가”, “나는 왜 이렇게 못 웃기는가”, “나는 왜 이리 유머 감각이 떨어지는가“ 같은 말은 그 말 자체로 농담이 될 수 있다. 대본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 했을 때나, 이른바 ‘시바이’를 제대로 치지 못 했을 때 오히려 더 큰 웃음이 터지는 상황, 이런 상황은 공개 코미디나 스탠드업 코미디 공연에서 꽤 많이 볼 수 있다. 만약 순간적으로 분위기가 냉랭해진다 해도 코미디언들은 “아~ 대사 까먹었네” 같은 말로 농을 쳐서 상황을 반전시킨다. 그렇다. 농담의 실패가 농담이 된다. 유머의 핵심적인 속성이 실패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 때 중요한 건 실패에 솔직해지는 것이다. 테리 이글턴은 말했다. “한 인간의 범속함을 초월하는 것은 그러한 범속함을 고백할 수 있게 해주는 솔직함이다.”


그렇다면, 유머를 갖춘 자들은 우리의 실패에 너그러울 것이라 기대해 볼 수 있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유머는 자기자신의 실패를 드러내는 형태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머는 종종 타인의 실패를 공격하는 방식으로도 나타난다. 그것이 압제자나 권력자를 향할 때는 풍자가 된다. 동등한 관계에서라면 친밀감을 향상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그 방향이 자기보다 지위가 낮은 자나 사회적인 약자를 향할 때, 유머는 폭력이 된다. 이것은 거의 상식이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비하’와 ‘조롱’, ‘폄하’와 ‘폭력’이 유머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는지도 이해할 수 있다. 빈자나 비건, 비만한 자, 페미니스트 여성, 동성애자, 장애인, 제 3세계 외국인 노동자들은, 이들을 혐오하는 자들이 보기엔, 규범 외 존재들이다. 그들은 정상성이라는 기준을 충족시키는 데에 실패했기에 규범 바깥에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즉 존재 자체를 실패로 규정짓는 것이다. 혐오생산자들은 규범 외 존재들이 얼마나 ‘실패적’인지를 증명하는 데 사활을 건다. 이를테면 이들에게 페미니스트 여성들은 ‘메퇘지’다(혹은 그래야 한다). 여성의 핵심 자원으로 여겨지는 예쁨, 아름다움이 결여된 존재다. 게이 남성들은 ‘항문 섹스를 사랑하는 자들’이다. 이런 놀림거리를 포착, 파악, 생산하고 언어로 재생산하는 것이 혐오생산자들의 유머다. 하지만 누군가를 ‘메퇘지’라고 낙인찍고 조롱할 때, 잊지 말아야 할 슬픈 사실은 우리 대부분은 ‘실제로 못 생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은 이런 말을 하지 않을 때, 우리는 실제로는 못 생겼어도, 아름다워질 수 있다. 나아가 스스로의 ‘못생김’을 유머로 활용하는 건 자신의 못생김을 넘어서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 범속함을 초월하는 방법은 그 범속함에 대해 솔직해지는 것이니까…. 그리고 항문 섹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항문 섹스는 이성애자들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다만 어느 쪽 성별의 항문을 사용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을 뿐이다…. 혐오생산자라면, “정신적, 신체적 장애가 있는 사람”의 말투나 행동을 따라하는 방식으로 웃음을 유발하기도 한다. 내가 10대 때 그래서 잘 안다…. 깊이 반성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 TV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박은빈 배우가 연기한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캐릭터 우영우를 성대모사해, 웃음을 유발시킨 건 잘못된 일일까? 아니면 사랑 받은 캐릭터를 따라한 것 뿐이니, 이 정도는 좀 넘어가줘도 괜찮은 걸까?


우영우 성대모사를 해도 되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해본 적도 없고…. 어려운 문제는 잠시 넘어가고 말을 잇자면, 나는 혐오생산자들의 농담은 모두 그야말로 ‘실패’하기 마련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런 유머가 특정한 커뮤니티 내에선 작동할 수 있다. 빅토르 위고는 <레 미제라블>에서 “어둠의 인간, 잔학한 인간은 어둠의 환희, 잔학한 행복을 시도할 수 있는 자”라고 했다. 잔학한 인간의 행복은 잔학한 법이다. 혐오생산자들의 잔학한 농담은 존재 자체에 대한 ‘경멸’을 담고 있다. 그 경멸은 아무리 뛰어난 재치로 표현된다 하더라도 공포와 고통, 폭력이라는 엄숙함을 강화시킨다. 엄숙함을 강화하는 유머는 유머가 아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더라도 농담은 언제나 실패할 수 있다. 최대한 정치적으로 올바르려고 해도, 경멸이 배제된 유머를 던지려고 해도. 왜냐하면 농담이 실패할 이유는 넘쳐나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그냥’ 안 웃겨서, 재치가 부족해서, 상황에 안 어울려서, 분위기 파악을 잘못해서, 농담을 들은 사람이 사실은 당신을 싫어해서, 의도와 달리 농담의 대상이 된 사람이 상처를 받아서 (이럴 때 “이 정도 농담도 못 하냐?”는 질문은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니, 재빨리 사과하시길) 등등 하지만 용기를 잃지 마시길. 그리고 사무엘 베케트가 <최악을 향하여>에 쓴 이 말을 기억하시길. “다시 시도하라, 또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 이것은 농담을 던지려는 모든 인간이 심장 속에 새겨야 할 격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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