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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영업 기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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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비 Jul 13. 2020

기밀01

세상 일의 절반은 영업이라니

분명 영업부로 지원해서 입사했는데, 4개월이 지나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나는 한 마리 ‘미생’으로 마케팅 팀 회식에 와 있다. 이미 10명의 동기들 중 둘은 퇴사, 나머지 일곱은 동서남북 각 지점에서 커리어를 이제 막 시작한 참인데, 내 타이틀은 ‘대기발령’. 게다가 왜 때문에 나는 오늘 상무님 옆자리에 앉아 있게 되었나. 안그래도 출근부터 눈치가 보이는데 밤까지 긴장이 풀릴 틈이 없다.


상무님은 분명 어려운 분이지만 희한하게 뭔가 말을 하고 싶게 하는 분이다. 그래도 직접 면접 보고 뽑아주신 분인데 실수할까 조심스럽다. 마음에 철빗장을 걸어 잠그고 회식에 임했는데, 젠장, 어느새 내 입은 뭐라 뭐라 떠들고 있다. 회사의 계획에 대해서 이런 저런 말씀을 하시는데 하나도 와닿지 않고 마음 속으로 ‘도대체 그래서 나는 언제부터 일을 하면 되냐고’를 뇌까린다. 결국 뇌가 일을 저질렀다.


-  그런데, 저는 언제쯤 영업부로 발령이 날까요……?

-  (물끄러미) 곧 시작하게 될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우리 00씨를 위해서 아주 좋은 곳을 마련해두었…


저 다정한 말을 다 듣기도 전에 마음의 둑이 무너졌다. 터진 김에 그냥 펑펑 울었다. 멈출 수가 없었다. 고시원에서 두 달째 사는 것도 지겹고, 매일 사무실 자리에 앉아 하루종일 아무 것도 없는 모니터를 노려보는 것도 할 짓이 아니었고,누구도 내게 말을 걸지 않아 없는 눈치보느라 에너지를 써야 했다. 어떤 부서에도 내가 갈 곳은 없어 보이는데, 도대체 난 누구, 여긴 어디. 무엇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오로지 고도를 기다릴 뿐. 회사에서는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해서 스트레스를 받는 줄 알았는데,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나는 깔려죽을 것 같았다. 그리고 2주 뒤, 거짓말처럼 나는 영업부로 발령이 났다.


개뿔.


그 두 달이 꿀인 줄도 모르고 울긴 왜 울었을까. ‘서부지점 이땡땡 사원’은 지금 8월의 아스팔트 위에서 판촉물을 가방에 든 채 구두를 또각거리며 30분째 걷고 있다. 이놈의 길바닥 인생. 일은 반도 안 끝났는데 그냥 세상 살기가 싫어진다. 차는 언제쯤 살 수 있을까. 어제도 영어학원 수강은 실패. 목동 역에서 집인 마포역을 거쳐 종로까지 가야 하는데, 마포역에서 지하철 문이 열리면 답이 없다. 내리는 수밖에. 킬링 미 소프틀리 이즈 마이 하이힐. 발에는 불이 났고, 종아리는 터질 것 같다. 영어 따위 개나 줘버리자. 어차피 영업부에서 영어 쓸 일도 없는데 왜 등록한 거냐. 빨리 차를 사야겠다. 어제 택배아저씨가 뭐 하는 분인지 물어보며 배달해준 판촉물 박스 10개가 고스란히 현관에 쌓여 있다. 8평짜리 원룸은 곧 창고가 될 것이다.


화장하고 구두신고 정장입고 브로셔들고 병원대기실에서 간호사 언니가 나를 언제 불러주나 눈치보는 일. 이게 대학을 졸업하고 내가 가진 첫 직업이다. 제약회사 영업사원. 회사가 뭔지, 영업이 뭔지 몰랐지만 배우면 되겠거니, 생각했다. 7주간 제품과 관련 질병 교육, 영업스킬, 마케팅, 브랜드, 프리젠테이션, 디테일링 등등 지금은 어떤 제약회사도 하지 않는 꼼꼼하고 긴 교육을 받고 투입된 신입사원 10명 중 하나였다. 빨리 끝내고 영화나 보자던 선배와의 필드 트레이닝을 끝내고 혼자 일을 시작한 날, 이게 회사 생활인가 싶은 어리둥절함에 온종일 갸웃거렸다. 이른 바 선진형 관리시스템인 ‘현지 출퇴근제도’를 시행하고 있는 회사였기에 매일 아침 7시에 사무실에 집합할 필요가 없다는 건 정말 좋았다. 하지만 오라고 하는 사람이 없는데 어디론가로 아침 9시에 집을 나서면서 이게 출근인가, 병원에 가서 선생님과 몇 마디 말을 나누고 나서면서 이게 일인가, 콜을 끝내고 집에 가면서 이게 퇴근인가, 집에 와서 저녁 먹고 그날치 일어났던 시시콜콜한 대화들을 컴퓨터에 ‘콜 입력’하고 나면 대개 9시. 드디어 사이버 퇴근도 완료. 그리고 언제나 바로 뻗음. 쥐쥐.


일인 듯 일이 아닌 일을 하고 있으니, 뭐가 뭔지 몰라서 답답해 죽겠는데 내 명함에 박힌 그 회사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자영업은 아닌데 동료를 매일 만나는 것도 아닌, 그렇다고 사무실에 떡 하니 내 자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일도 모르겠고 매일 점심을 낯선 동네에서 혼자 먹는 것도 지치고, 동기들과는 정들 때쯤 헤어진 데다가 나처럼 각개전투 중일 거라 생각하니 선뜻 연락할 여유도 없었다. 무엇보다 같은 팀 선배들도 각자의 지역이 있는지라 인접지역 아니면 후배들을 굳이 챙겨주지 않았고, 하필 극강의 개인주의자 선배가 내 옆 지역 담당이라 1년이 다 가도록 연락 한 번 없었다. 아니 실은 그들끼리는 자주 만났겠지만, 그 시절 뚜벅이였던 나는, 국경같았던 담당지역을 나서려면 사방팔방 최소 차로 40분은 가야 하는 그들의 지역에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었다. 투명 유리상자에 갇힌 생쥐처럼, 5호선 지하철에 매달려서 오로지 출근과 퇴근만 반복했다. 가끔 혼자 교보문고 가는 정도의 사치는 있었지만.


내가 일이라 생각했던 것은 사무실에서 회의하고 문서를 쓰고 프린트를 하는, 그런 일들이었는데,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만나라니까 만나긴 만나는데, 그리고 거래처 선생님들은 내게 생각보다 호의적이었지만, 내가 이 양반들과 나누는 대화가 도대체 ‘일’인지, 일이라면 ‘어떤 일’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회사에서 디테일링이라고 가르쳐준 영업부 매뉴얼대로 오프닝-고객니즈파악-솔루션제시-클로징은 너무 교과서적이어서 말이 안돼 보였다. 누가 이렇게 대화해. 게다가 우리 회사 제품들을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들이 저 사람들인데, 내가 뭘 알려줄 수 있담. 오히려 뭘 물어볼까봐 항상 마음이 조마조마했는데,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걸 금방 알게 되었다. 문을 열어주면 다행인 거지, 물어보긴 뭘 물어봐. 우린 불청객, 그야말로 초대받지 못한 게스트일 뿐. 게다가 조금 잘 나가시는 거래처라면 하루에도 이런 인간들이 수십명씩 좀비처럼 환자들 틈에 숨어있다.


너무너무너무 만나기 힘든 동네 탑 의원 원장님을 만나러 가는 날. 낮에 가면 대기 시간이 평균 2시간이어서 작정하고 진료시간 끝나기 1시간 전에 맞춰서 병원 문을 열었다. 그래, 그런 생각 나만 할 수 있는 생각은 아니지. 벌써 각잡힌 양복쟁이놈들이 10명은 돼 보인다. 환자나 노인들 속에서 그들은 너무 눈에 띈다. 다 똑같이 생겼지만. 그냥 포기하고 간호사에게 ‘000’ 담당자라 말하고 자리에 앉는다. 지금은 불가능하지만 그 때의 국내 메이커들은 영업적으로 무소불위했고, 파이브 툴이 아니라 피프티 툴쯤 가지고 있는 그들에 비해 나는 총알 하나도 없어서 쩔쩔매는, 동종업계 남자들에게 영업은 쥐뿔 모르면서 영어점수 좋아서 복지좋은 글로벌 회사 다닌다고 욕을 먹고, 000? 너네 뭐 해줄 수 있는데? 라는 거래처 원장님의 말 한 마디에 고개를 떨구는, 허울 좋은 글로벌파마수티컬 컴퍼니 MR이었다. 이제 짬은 좀 차서 웬만한 소리에 흠칫 놀라거나 얼굴이 붕괴되지는 않지만, 이 일이 즐거운 것은 아니었다. 한 명 한 명 떠올릴 때마다 실수한 건 없는지 불안에 떨었고, 매일 아침 오늘은 어딜 가야 할까,를 생각하는 일이 지긋지긋했다. 아 그냥 제발, 사무실에 10시간씩 짱박혀도 좋으니, 제발 아침마다 어디론가 갈 데가 정해져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가끔, 나 같은 여자 사원들을 마주칠 때가 있었다. 일 이년 만에 다들 얼굴에 철판 하나씩은 깔게 되었고, 먼저 말을 거는 게 일인 데다가 다들 혼자 일을 하니 외로워서 그랬는지, 병원 대기실에서 눈 마주치면 어디세요, 물어보고 각자의 회사에 대해서 엄청 조잘조잘 얘기하곤 했다. 다들 차려입고 나와서 나 같은 마음일까, 궁금했다. 서글프고 외롭고 힘들고 지겹고 회사 욕하기도 지치는데, 각자의 대안은 있는지 궁금했다. 영업이라는 걸 도대체 누가 좋아서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한창 인상쓰며 로스쿨을 가야 되나, 대학원을 가볼까 딴생각하던 3년차에 대기실에서 만난 동그란 얼굴의 그녀는 5년차라고 했다. 깜짝 놀라 어떻게 5년이나 하셨어요, 라는 말이 초면에 바로 튀어 나왔다.


-         세상 일의 절반은 영업이라 생각해요.


이름도, 만난 장소도 생각이 안나는데 저 문장과 또박또박 발음하던 얼굴만은 생생하다. 매일매일 사람들이 문질러대서 닳아가던 내 마음의 냉소와 자기 연민의 거품이 걷히는 느낌이었다. 같은 업계 사람들이랑 아무리 친구가 되어도 위로받지 못했는데, 처음으로 발견했다. 그녀의 얼굴에 담긴 평온함을. 갑자기 많은 것들이 이해되었다. 내 친구 수의사들도 동물병원에서 ‘영업’을 하고 있었고, 학원도, 식당도 심지어 성당도, 대통령도 영업을 하는 거였구나. 새삼 세상의 질서가 새로 생긴 기분이었다. 나만 몰랐을 뿐인데. 심지어 내가 연애랍시고 하고 있는 것도 영업인가 싶었다. 너의 마음을 내게 달라는. 내가 뭔가를 줄 수 있는 기회를 달라는. 세속과 속물의 막장 같은 이 일의 우물에서, 고작 스물여덟에 세상 다 산 것 같은 느낌에 질식해가던 내게, 한 방울의 성수가 떨어졌다.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번엔 제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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