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bjection handling: 동어반복의 매직
신입사원 교육 막바지다. 6주차를 넘어서부터는 프리젠테이션과 실제 현장에서 사용할 디테일링을 위한 세일즈 스킬 혹은 엑셀런스라는 이름으로 교육을 받고, 반복적으로 이 툴들을 익히도록 짜여져 있었다. 이제는 실전 감각을 익힐 시점. 십 수년을 '자율적으로' 앉아서 수업만 듣던 학생 신분을 벗어나 곧 진짜 회사원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에, 현장에 나가서 일을 하는 상상을 할 때마다 긴장으로 손바닥은 오그라들고 발바닥에는 땀이 났다.
한 주간 교육 후 마지막 금요일에는 프리젠테이션을 촬영하고 점수를 매긴다고 했다. 사실 대학을 다니는 내내 과 특성상 고등학교처럼 한 강의실에 앉아 종일 교수님만 바뀌는 식으로 수업을 받았고, 프리젠테이션은 커녕 조별 과제 발표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입사 영어면접까지는 어떻게든 넘어왔는데 발표라니, 일대일 디테일이라니.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도 떨리는데, 심지어 내 생각이 아니라 제품에 대해서 순서대로 알리고 또 들어올 질문도 어떻게 방어할지 생각해야 한다 생각하니 이미 시작도 전에 머리 속이 복잡해졌다. 딜리버링, 설득력 있게 제품의 특장점을 객관적으로 설명하는 일은, 내겐 북한을 가는 것만큼 낯설고 두려웠다.
결국 사단이 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결과랄까. 한 다리를 덜덜 떨다 내 순서가 되어 담당 PM이 카메라를 켜고 내가 발표를 시작하자마자 2분도 채 못되어 결국 나는 초딩처럼 으앙 울어버렸다. 이게 뭐라고 눈물이 다 나냐. 뭔가 모를 서러움과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 무지 속에서 헤매다, 나를 향해 조용히 고개 끄덕이며 응원하던 이 대리님과 눈이 마주친 순간, 감정의 화산이 터져버렸다. 결국 "야 카메라 꺼" 라는 말과 함께 내 프리젠테이션 등수는 확정되었다. 여기 병신 한 마리 추가요.
어차피 10명 밖에 없는 신입사원들 사이에서 유일한 지방대 출신으로 여기 입사한 것만 해도 감지덕지라, 등수는 나에게 의미가 없었다. 어디든 문 닫고 입성하는 게 중요하지 일등은 언감생심. 이런 저런 맘고생과 동기들보다 늦은 지점 발령으로 우여곡절 끝에 아무튼 일을 시작했다. 디테일? 프리젠테이션? 다행히 매일 하는 건 아니더라. 물론 눈물은 그 밖에 기타 등등 다른 이유들로 많이 터졌지만.
디테일은 '상세한'이라는 부사인 줄만 알았는데 제약회사에 와보니 거기에 설명 이라는 명사까지 포함된 영업 스킬 용어였다. 제품의 효능과 안전성, 그리고 특장점을 물흐르듯 설명하는 일. 필요하면 논문과 기타 아티클을 활용하고, 옆옆 병원들 사례로 들어본다. 신제품 런칭이 아니고서는 딱히 데일리로 할 일도 없는 것. 소위 '라뽀' 형성이 우선이지 디테일은 회사 밖으로 나와 보니 그냥 교과서에 있는 화석 같은 단어였다. 그래, 차라리 이런 현실감이 더 나랑 맞는 것 같은데. 6개월쯤 지나니 그래도 루틴도 잡히고 '디테일'에 대해서도 '아~~~' 싶은 감이 왔다. 딱 하나, 오브젝션 핸들링만 빼고.
남극에서 에어컨도 팔 수 있으려면 신입 영업사원이 반드시 익혀야 하는 것은, 우리 제품의 장점을 줄줄 외우는 것 외에 고객들이 제기하는 오브젝션, 즉 딴지를 해소하는 기술이었다. 너네 제품이 다른 회사 제품이랑 더 나은 게 뭔데요? 너네 회사에서 내놓은 자료는 불충분하잖아요, 제품 사용하다가 발생할 부작용이 있지 않을까요 등등 제품 담당 PM이 미리 만들어놓은 FAQ 문서에는 서른 개 남짓의 고객이 던질 수 있는 예상 질문들과 그에 맞게 외워야 하는 답변이 있었다. 오오 이런 것도 있네, 감탄하며 읽어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쇄가 잘못 된 건가 싶게 질문은 여러 가지인데 답변이 비슷했다. 아니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이거라고? 부작용이 뭐냐고 물어보는데 왜 얘기하다 말고 우리 제품 장점을 늘어놓지? 안물 안궁인데?
회사가 뭘 하는 곳인지 모르고, 내가 뭘 해야 하는지 몰랐기 때문에 나는 교육 막바지에 주어진 이런 실전용 자료들을 이해하는 데 백만년, 까지는 아니고 6개월이 걸렸다. 고객들이 이미 다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우리 회사 제품들의 장점은 나만 알고 있는 거였고, 좀 친해졌다 싶은 선생님들께 두세번은 얘기했다 싶어도 다음에 만나면 다들 까마귀 고기를 드신 듯 또 처음 듣는 얼굴로 나를 맞아주셨다. 아 반복학습이구나. 브레인워시라고 해야 하나. 대면으로 접촉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로봇처럼 제품 장점이 자동발사가 되어야 하는 거였다. 고객들이 내 얼굴을 보고 장점이 떠오를 때까지.
오브젝션 핸들링도 마찬가지. 그래서 오브젝션 솔루션이 아니라 핸들링인 듯 했다. 질문은 질문일 뿐, 나는 대답은 예 아니오, 또는 단답형으로 재빨리 대답한 후, 반드시 '그런데' 화법으로 제품의 장점으로 마무리를 한 후 '제가 드린 말씀이 질문에 대한 답이 되셨을까요?'라고 확인하는 것이 정석. 그래서 모든 FAQ에는 잘못 인쇄된 문구처럼 질문마다 '제품의 장점 1'이 태그 되어 있었고 이 장점 반복 어필로 고객의 부정적인 질문에도 나는 긍정적으로 잔상을 남기는 것이 일종의 스킬이라는 것.
이 득도 이후 처음 열렸던 분기미팅에서 나는 프리젠테이션 테스트 직후 처음으로 담당 PM에게 공개적인 칭찬을 받을 수 있었다.
"이 친구가 제가 지금까지 본 올해 신입사원 중에서 가장 성장을 많이 한 친굽니다."
베이스라인이 대체 지하 몇 층에서 시작되었던 것인가 싶지만, 아무렴 어떤가. 월급은 제 때 나오고 나는 이제 울지 않고 프리젠테이션을 할 수 있으니. 이렇게 또 하나의 산을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