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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영업 기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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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비 Oct 20. 2020

기밀03

투 머치 토커는 어떻게 굿 리스너가 되었나

엄마는 내가 영업이 적성에 맞는다고 하셨다. 나는 말하는 걸 좋아하니까. 얼마나 좋아하냐면, 재미있는 얘기를 들었다면 최소 3인 이상에게 해줘야 직성이 풀리는데, 그 얘기를 위한 배경 이야기나 주인공의 딴 이야기를 하느라 본 이야기를 잊어버릴 정도? 어디에서든 정신 차려보면 끝없이 떠들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되니 나는 진짜 투머치 토커. 실은 엄마가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나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니 아무 것도 몰라도 취업 전선에 뛰어들 때, 영업부를 필터링 하지는 않았다. 뭐든 말로 하는 거면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입 다물고 듣는 것보단 쉬울 것 같은데.  


과연 영업은 말로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게 직업이 되고 나니 죽을 맛이다. 나는 입에서 떠든 다음 생각하는 인간인데 생각을 정리한 뒤 말을 하려니 머릿 속이 걸리적 거려서 말이 더 안된다. 혹시 이상한 말을 하게 될까봐 들키지 않게 바들바들 떨었고, 그러면서도 고객님과 함께 하는 1초의 침묵도 견디지 못해서 또 마구 말을 쏟아내곤 했다.  안녕히 계세요, 하고 돌아서서 밀려오는 씁쓸함과 허무함. 빈지노식으로 말하자면 이것은 말 많은 자의 세금같은 것일까.


사실 이제까지의 말하기는 어디까지나 나의 것이었다. 내 생각을 얘기하거나 경험담을 얘기하는 건 쉬웠는데, 내 것이 아닌 회사의 제품을 홍보하면서 자연스럽게 말에 녹여내야 하니 말하는 내가 어색해서 몸이 비비 꼬였다. 그래도 아는 제품 이야기라도 하면 다행이었는데 소위 해피콜이라고 하는 '인사성 정기방문'이거나 딱히 방문 목적을 생각하지 않고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의 그 어색함은 늘 난감했다. 20대의 내가 주로 40대인 그들과 나눌 사담도 한정적이고, 진료실 밖 대기실에는 환자가 줄줄이 기다리고 있는, 그 틈새의 5분 정도에 필요한 얘기를 해야 하니 따발총처럼 다다다다 쏟아내고 다음에 또 방문드리겠습니다, 까지 겨우 마치고 나오면 내가 뭘 하고 나온 걸까 아득했다. 


물론 짬으로 버티니 감이 왔다. 1년쯤 지나니 의사들과 나눌 사담의 종류는 '골프, 자식 유학 그리고 자산관리' 딱 세가지로 귀결되었다. 그것도 내가 뭘 알아서 그 분들과 대화를 나눈다기보다 아이스브레이커로써 '카더라' 통신의 참새처럼 여기 저기 방앗간에서 줏어들은 얘기를 전해주는 정도였지만. 그래도 미친 어색함은 안면을 좀 튼 뒤에는 조금씩 사라졌고 관리할 지역이 바뀐 뒤에도 의사들 얼굴과 이름만 달라질 뿐, 그들이 처한 환경이나 입장에는 큰 차이가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뭘 알게 되었다고 해서 일이 더 재미있어 지는 건 아니었다. 하루 8콜씩 돌다 보면 같은 얘기를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제품의 특징, 장점, 경쟁사보다 나은 점, 최신 논문에서 언급된 우리 회사 제품 브랜드명을 줄줄 읊다 보면 퇴근 시간이 다 됐다. 이럴 바에야 DM을 돌리는 게 낫지, 뉴스레터를 뿌리거나 나는 왜 직접 이 사람들을 만나야 하는 거지? 우리가 직접 주문을 받는 시스템도 아니고, 실적은 주변 도매상들 매출 잡아서 두 달 뒤에나 나오는데. 나는 왜 이 사람들을 만나고 있을까, 만나면서 점점 궁금해졌고 할 말은 점점 떨어져갔다. 


이제 진짜 할 얘기가 없다 싶을 때쯤, 회사에서 새로운 영업부 교육을 전사적으로 실시했다. 물론 그 전부터 강조되어 왔던 부분이지만 타성적으로 넘어갔던 파트, 고객의 니즈를 찾는 법. 신입 때는 대면 상담을 위해 DISC 분석도 하고 그에 맞는 대화법을 익히고, 또 제품 홍보와 특장점을 전달하는 방법을 배웠다. 이제는 대화 속에서 상대가 원하는 것을 캐치할 차례. 근데 곰곰 생각해보니 고객님들이 나에게 이런 걸 원해요, 저런 걸 원해요 대놓고 얘기 하는 사람들이 있었나? 없었던 것 같다. 늘 내가 가서 이것 좀 해주세요, 저것 좀 써주세요 부탁을 했었지 그들이 나에게 뭘 바란 적은 없었는데, 회사가 나한테 바라는 건 당최 뭘까. 


대화를 하다 보면 그런 사람들이 있다. 자기 할 말만 하는 사람들. 주거니 받거니 하는데 대화가 진도가 안나가는 사람들. 관찰을 하다 보면 알게 된다. 아, 내 말을 안듣고 있구나. 이기적이어서가 아니다. 자기 생각에 머리가 꽉 차서 남의 말이 들어갈 틈이 없다. 갑자기 고1 때 정석을 풀다가 '문제 속에 답이 있다'는 걸 알게 된 후 그나마 수학을 좋아하게 되었던 생각이 났다(찰나의 그것이었지만). 공식이 안떠올라서 못푼다기보다 뭔가 떠오르지 않을 때, 그 이후로는 문제를 여러 번 읽고 내가 놓친 모티브가 뭐였는지부터 확인했던 기억. 하, 이거네. 나는 고객의 니즈를 들어본 적이 없다 생각했는데, 내 머리는 내가 다음에 해야 할 말을 생각하느라 내 귀를 틀어막아 상대방이 원하는 걸 얘기하고 있는데 나는 캐치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 


알고 나니 방향이 바뀌었다. 나는 할 말이 없어서 디테일 콜을 뭘로 해야 하나 전전긍긍하고 있었는데, 영업이란 먼저 상대방이 하는 말을 '잘 들으러 가는 것.' 그 다음부터 문을 열고 들어선 나는 공식처럼 000을 전달하러 왔습니다, 에서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로 시작할 수 있었다. 서브부터 제대로 꽂아야 게임을 제대로 시작할 수 있는 법인데, 나는 아직도 한참 모자란 저연차 영업부 신입사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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