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모태신앙으로 살아온 결과
모태신앙은 기독교인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사람마다 생각은 제각각일 테지만, 일반적인 기독교인들의 시선으로 모태신앙은 관심과 기대를 받는 일종의 '감투'와 같다. 신앙의 금수저 은수저 다이아수저랄까. 본인에게는 모태신앙이 아무것도 아니지만 누군가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다.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부모의 신앙을 '그대로 이어받은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그러나 어쩌면, 동시에 부모의 신앙을 '그대로 이어받아야 할 신앙'일지도 모른다.
모태신앙으로서(모태신앙이 아니라 할지라도), 한 때 열심이었던 기독교인이라면 아래의 이야기에 어느 정도 공감하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이 말하는 그 기독교 모태신앙이다. 서로 교회에서 만나 결혼하신 부모님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교회 및 선교단체 활동을 통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오셨다. 나는 부모님의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자랐다. 매체에서 간혹 들리는, 종교에 빠져 비상식적으로 가정은 내팽개치고 교회에 돈 갖다 바치고 하는 분들은 아니었다. 나는 나를 사랑하시는 부모님이 좋았다. 그래서 자연스레 하나님에 대해서, 교회에 대해서 좋은 이미지를 형성하게 되었던 것 같다. 유년시절에는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을 수첩에 적어가며 말씀을 이해하려 했고, 매일 어린이성경을 읽어 부모님께 칭찬받고자 했다. 청소년기 때는 교회 학생회장을 맡았고, 친구들을 교회로 이끌기도 했다. 성경 말씀을 몇십 구절이나 외서 말씀 암송대회에서 상을 받기도 했다.
하루는 부모님과 함께 한강변을 산책하다가, 내가 대학 들어갈 때쯤 두 분이 해외 선교를 가고 싶으시다고 말씀하시며 나에게 의견을 물으셨다.
나 : "제가 가지 마시라고 하면 안 가실 건가요?"
부모님 : "네가 가지 말라면 안 가지"
나 : "왜요?"
부모님 : "아빠 엄만 네가 더 중요해"
이 말을 듣고 나는 두 분이 원하시는 대로 가시라고 했다. '우리 부모님은 나를 여전히 사랑하시는구나. 그리고 하나님도 여전히 사랑하시는구나.' 나는 그런 부모님이 좋고 존경스러웠다. 주변에서 들리는 선교사 자녀, 목사 자녀들의 '삐뚤어짐'은 나에게 해당하는 내용은 아니었다. 부모가 선교사라는 것이 너무도 멋졌다. '부모님이 선교사님이에요'라고 말하는 것은 교회 안에서 선망과 특별한 시선을 받는 치트키였다. 모태신앙인 데다가 선교사 자녀라니. 그냥 모태신앙보다 선교사 자녀 모태신앙이 멋지다. 그리고 목사 자녀보다는 선교사 자녀가 더 멋지다. 목사보다 선교사가 타국에서 더 힘들고 고생하는 이미지랄까? 헌신하는 부모님 덕에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모태신앙 부심, 선교사 자녀 부심이다.
나는 기독교 배경으로 유명한 대학으로 진학했다. 내가 대학에 들어간 해에 부모님께서는 타국으로 선교하러 떠나셨다. 나는 선교단체에 들어가 제자양육을 받았다. 같이 공동체생활을 하며 함께 QT, 성경공부, 성경암송, 전도, 양육 등 모든 신앙활동을 다년간 훈련했다. 해가 갈수록 나는 신앙적으로 '성장'하는 것 같았고, 주변에서도 신앙심 좋은 청년으로 인정받았다.
내가 들어간 선교단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전(全) 인격적인 성장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성경말씀을 읽고 공부하고 암송하는 것뿐 아니라 삶 가운데서 성경 말씀을 적용하는 것 또한 중요시 여겼다.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제자로서의 삶'으로 정의하여, 내 하루의 일부를 이 삶을 사는데 할애하는 것이 미덕이었다. 신앙적인 활동을 얼마나 포함시켜서 하루를 보내는지가 이들의 중요한 관심사였다.
예컨대, 새벽에 일찍 일어나 기도를 한다든지, 본인 일 하는 가운데 짬을 내어 기도를 한다든지, 성경 말씀을 읽거나 암송한다든지, 전도를 한다든지 등의 모습들이다. 이러한 모습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인정받는 일종의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이러한 삶을 계속해서 살아가며 '주님의 제자'의 수를 늘리고, 주님을 모르는 자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이곳의 큰 사명이었다. 이러한 삶을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주 1회 이상 인도자와 개인적으로 교제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를 통해 전반적인 삶을 나누고 부족한 부분은 보다 잘할 수 있도록 챙김 받고 권면받는다. 매주 일요일에는 함께하는 이들 모두 모여서 모임을 가진다. 찬양을 하고 간증을 들으며 말씀을 듣고 공부한다. 가끔 수련회를 하며 집중적으로 배우는 시간을 가진다. 그리고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할 이유에 대해서 자주 동기부여를 받는다. 그 동기는 바로 '주님의 은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제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죄인인 나를 위해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니, 우리는 그 은혜에 감사함으로 제자로서의 삶을 마땅히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면 내가 아무리 큰 희생을 치른다 할지라도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 피터 마샬
이 말은 모인 이들의 마음에 뜨거운 불을 지핀다. 이러한 도전을 받고, 이후 개선된 삶을 위한 새로운 적용을 한다. 주님을 위한 시간의 양을 늘린다거나 질을 더 좋게 하기 위한 다양한 신앙활동들(성경 읽기, 성경 공부, 성경 암송, 기도, 새벽 QT(Quiet Time), 개인 교제, 전도, 양육, 말씀에 대한 순종 등) 가운데 내가(Personal) 할 수 있는(Possible) 실제적인(Practical) 적용들 말이다. '제자로서의 삶'을 위해 이러한 활동들을 서로 점검하고 점검받는다. 이 또한 그 은혜를 더 누리기 위해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둘이 서로를 이끄는 원동력이 되어 다음과 같은 '선순환'을 이루도록 훈련한다.
주님의 은혜에 의해서 신앙적인 활동들을 하고, 신앙적 활동들을 통해서 주님의 은혜를 더욱 누린다.
이러한 선순환이 계속해서 활발히 일어나, 이 선순환의 '반경'이 크면 클수록 인생의 크고 작은 문제를 뛰어넘을 수 있는, '영적으로 성장한 사람'이 된다. 이를 위해 나의 청년시기를 바쳤다. '영적으로 성장'하여 주님께 인정받는 '예수님의 제자'로 살기 위해서.
신앙생활에서 열심을 내면 낼수록 커지는 것은 왠지 모를 자신감, 근거 없는 성취감 및 성장감?이다. 내가 성경 말씀에 순종했다고 느끼면 느낄수록, 하나님께서 나를 더 예뻐하시는 것 같았고, 좀 더 특별하게 생각해 주시는 것 같았다. 죄를 덜 지으려고 노력하는 과정 속에서 내가 신앙적으로 더 성장하고 성숙해 가는 것 같이 느껴졌다. 이러한 느낌은 신앙생활 초반부터 해가 갈수록 더해져 갔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열심과 열정은 커져갔고, 주변 교인들의 인정은 두터워져 갔다. 성경의 모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고자, 일상 속에서 신앙적인 훈련을 거듭했다. 말씀을 듣고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행하고자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렇게 열심을 내면 낼수록 같이 커지는 것들이 있었으니, 바로 성경말씀과 내 삶의 괴리감, 회의감, 그리고 공허함이었다. 이러한 느낌은 초반에는 크지 않았으나, 신앙적인 활동에 나의 시간과 노력을 들일수록 더 빠르고 크게 커져갔다.
어떻게 사는 것이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인가?
어떻게 살아야 성경말씀에 완전히 순종하는 인생을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죄를 안 짓고 살아갈 수 있을까?
이렇게 성경말씀을 지키고자 열심히 사는 것이 정말 성경적인 삶인가?
이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유튜브에는 저 질문에 대답을 주는 듯한 콘텐츠들이 넘쳐난다. 하나같이 신앙생활 '잘' 하기 위한 방법을 다룬다. 방법이란 방법은 이미 모두 시도했다. 신앙생활에 회의감이나 공허함을 느낀다고 하면, '주님의 은혜를 묵상하고 힘을 얻으세요', '회개하고 말씀을 읽으세요'와 같은 답은 진부하다. 이 또한 이미 오랜 기간 시도해 왔다. 일시적인 효과는 있을지 몰라도, 이내 신앙생활, 영적 활동에 대한 회의감과 공허함이 더 크게 찾아온다.
그런데, 오랜 기간 찾던 위 질문들에 대한 답이, 내가 느낀 회의감과 공허함 속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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