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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립체 Mar 20. 2020

치킨무 없이 치킨을 어떻게 먹어?

들어는 보셨나, "치동"!

일요일 점심은 교촌 반반 순살과 동치미

종이 박스가 눅눅해지기 전 서둘러 포장을 풀어헤치면, 기다렸다는 듯 공기 중에 화악 퍼지는 뜨끈하고 고소한 냄새. 손가락이 빨개질 정도로 아직 뜨거운 치킨을 들어올려 바로 입안으로 집어 넣는다. 한 입 베어 물자마자 바삭, 소리와 함께 닭고기의 촉촉하고 뜨거운 기름기가 혓바닥에 번진다. 하얗고 포근한 치킨살은 내 이빨 사이에서 결결이 찢어져 부드럽게 풀어진다.

치킨은 어떤 유형이든 다 매력적이다. 짭쪼롬하고 바삭한 튀김옷은 두꺼워도 얇아도 그 자체로 다 다른 매력이 있다. 뼈 있는 치킨은 알뜰하니 뼈를 발라 먹는 재미가 있고 순살 치킨은 포크로 콕콕 쉽게 찍어먹을 수 있는 재미가 있다. 보송한 후라이드는 극강의 바삭함과 순수한 소금맛을 즐기는 재미가, 화끈한 양념은 달콤하면서도 매콤하게 윤기를 뽐내는 한국식 양념을 입에 묻혀가며 쫀득하게 씹어 먹는 재미가 있다.

치킨의 친구 치킨무도 뺄 수 없는 명품 조연이다. 치킨의 기름기가 질릴 즈음, 아삭하고 달콤하면서 시원한 치킨무 한 조각이면 내 위장은 하얀 치킨무처럼 깨끗하게 리셋된다. (기분이 그렇다는 거다, 기분이.)

이러니 아무리 대단한 치킨이라도 치킨무가 없다면 답답하고 피곤한 속을 시원하게 풀어주는 특효약이 될 수가 없다.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사실, 우리 집은 치킨을 먹을 때 치킨무는 슬쩍 밀어두고 동치미를 곁들인다. 치맥에 치밥도 있다지만 우리는 치동이다. 치킨을 뜯다가 들이키는 시원한 동치미 국물과, 함께 흘러 들어 온 무 조각을 와작 와작 씹어먹는 상쾌함은 어떻게 묘사해도 부족하다. 치킨무가 조연이라면 동치미는 더블 캐스팅이다.

이번 일요일 점심, 엄마와 아빠 그리고 나는 오랜만에 주문한 순살 치킨에 동치미를 두고 둘러 앉았다. 그런데 이 아삭하고 수수한 동치미는 늘 옛날 반찬 이야기를 불러오게 마련이다. 치킨과 동치미, 거기에 넣어 곁들인 이 날의 이야기 속 옛날 반찬은 무생채와 오이무침, 오랜 시간 끓여 낸 된장찌개였다.


가만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리 엄마는 유독 귀여운 며느리였다. ‘서울에서 온다는데 깍쟁이 아니야?’ 했던 시누이들이 나와서 처음 본 우리 엄마는 겨울 바람이 매섭다고 스카프를 머리에 꽁꽁 싸매고 온 작고 새하얀 아가씨였다.

그렇게 집에 온 새하얀 아가씨는 고기 반찬을 한 점이라도 더 먹으려 하는 식구들 사이에서, 시어머니가 무쳐 놓은 빠알간 무생채에 밥 한 그릇을 쓱싹 비벼 먹었다. 가만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할머니는 비싼 반찬도 아닌데 밥을 잘 먹어준다며 좋아하셨다고 한다.

“그 무생채가 그렇게 맛있었어? 지금 엄마가 한 무생채랑 맛이 달라?”

달콤하고, 아삭하고, 짭쪼롬하고, 아주 빨갰지. 밥 비벼 먹기 딱 좋았어. 엄마와 아빠는 입을 모아 그렇게 할머니의 무생채를 추억했다. 우리 엄마가 아삭한 채소반찬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신 할머니가 해 주시던 또 하나의 반찬이 있었다. 바로 오이 무침이었다.

할머니께서는 엄마와 아빠가 할머니댁으로 내려온다고 하면, 매콤짭짤하게 오이를 무치셨다고 한다. 그것도 미리 무쳐놓으면 물이 나와서 맛이 없다며, 엄마와 아빠가 도착하기 바로 직전에. 가끔은 오이와 도라지를 함께 빨갛게 무쳐 내기도 하셨다고 한다. 엄마는 그건 아주 가끔, 도라지가 있을 때만 그랬지, 라고 이야기했지만 아빠는 꼭 그 반찬을 매일 먹은 것처럼 떠올리며 반가워했다.

무생채와 오이무침은 밥상의 조연이었지만, 시간까지 맞추며 공들여 올려낸 이 조연 덕분에 할머니의 된장찌개는 더욱 빛을 발했다. 물론 할머니의 된장찌개 비결은 쿨하게 추가한 미원 한 스푼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또 하나의 비결은 이 아삭하고 짭짤한 무생채와 오이무침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몇 십 년이 지난 옛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시원하게 익은 동치미 국물을 들이켰다. 시원한 동치미 덕분에 치킨은 금방 동이 났다. 다 먹은 치킨 박스를 납작하게 착착 접어 놓고 보이차 한 잔을 따라 홀짝이고 나니, 짧은 글에 마침표를 찍은 것처럼 깔끔한 점심이 끝났다.  아빠는 소파에 앉아있는 엄마를 향해 손수 개사한 장난스러운 노래를 불렀다. 기운~센~ 쌀쌀맞이~! 똥배~가 나~온 마노라!

아무 일도 없었고 그저 치킨에 동치미를 곁들여 느즈막한 점심을 먹었을 뿐이다. 햇살이 좋고 기분좋게 배가 불렀을 뿐이다. 아빠가 또 엄마를 향해 실없는 장난을 걸었을 뿐이다. 오이무침과 무 생채, 된장찌개가 있던 평범한 시골 밥상을 몇 십년이 지나서도 특별하게 추억하는 엄마와 아빠처럼, 내가 이 평범한 일요일 오후를 특별하게 추억할 수 있다면 그건 엄마가 담근 동치미 덕분일 것이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나의 삶에 짭쪼롬한 감칠맛을 더하는 건 대단한 요리도, 대단한 이벤트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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