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마다 감금당했던 집
인천공항에서 10시간 30분의 비행 끝에 도착한 샌프란시스코 공항은 따뜻했다. 미 서부 지역의 날씨는 365일 따뜻하다던데, 한국의 겨울 날씨로 꽁꽁 싸맨 옷이 민망했다. 포근한 봄 날씨를 한 달 일찍 느끼며 찌뿌둥해진 몸을 위해 기지개를 켰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이동이 필요했다. 내가 머물 도시는 샌프란시스코에서 3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소도시 치코. 태평양을 건너느라 지친 탓인지, 시차 적응이 되지 않은 까닭인지. 창 밖 미국의 풍경을 구경하는 것도 잠시, 버스에 타자마자 곯아떨어졌다. 비몽사몽인 채로 학교에 도착한 후 홈스테이로 묵게 될 공간을 배정받고, 함께 할 가족들과 어색한 인사로 하루가 시작됐다. 호스트 맘과 호스트 파파는 미국 애니메이션에 나올법한 할머니 할아버지였고, 2명의 딸과 슈나우저 2마리를 키우고 있는 집이었다. 개를 무서워하지만, 내가 살아야 할 집이니 슈나우저와 친해져야 했다. 다행히 짖지 않는 순한 개였는데 언제 씻었는지 모를 만큼 지독한 냄새가 났다.
'제발 내 침대에만 올라오지 말아 주렴.'
다행히 개 두 마리의 행동반경은 거실뿐이었기 때문에 나는 요리조리 잘 피해 다닐 수 있었다.
두 명의 딸은 고등학생과 대학생이다. 대학생 딸의 이름은 Eney, 공교롭게도 고등학생 딸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고등학생의 딸은 미용에 관심이 많고 파티를 좋아했다. 매일 밤 짙은 화장과 향수를 뿌리고, 파티복을 입고 집을 나선다. 새벽에 만취해서 들어오기 일쑤인 이 지지배의 옷은 늘 블랙이었지만, 머리색은 화려했다. 빨간색과 분홍색 그 언저리, 까만 옷과 까만 화장에 단연 튀는 머리 색이다.
Eney는 맥도널드에서 알바를 한다. 동생과 다르게 매우 순수한 친구였다. 나에게 동안이라며 피부 관리법을 물어보기도 하고, 매일 밤마다 내 손톱 색을 바꾸어놓았다. 그녀만의 바비인형이 된 기분. 동생보다 순수했던 Eney와 더 빨리 친해졌다. Eney는 영어와 스페인어에 능통했고, 가장 가까운 내 영어선생님이었다. 내가 특정 단어에 대해 뜻을 물어보면 가끔씩 스페인어가 먼저 기억난 Eney는 영어로 바꾸기까지 시간이 걸리기도 했는데, 스무고개 하는 것처럼 재밌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나는 스페인어의 매력에 빠져 독학 중인데, 당시 Eney에게 배웠으면 재밌게 공부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늘 지나고 후회하는 나다.
Eney는 내 하교 시간만 기다렸다. 학교에서 집에 오는 길, '오늘은 Eney가 날 위해 어떤 재미난 걸 준비했을까.' 매일이 기대됐다. 하루는 팬케이크 재료를 잔뜩 사다 두고 내가 오자마자 팬케이크를 만들자고 하기도 했고, 하루는 자기 친구의 생일파티에 가자며 날 위한 파티 옷을 준비해두기도 했다.
가로등 불빛이 우리나라처럼 많지 않은 치코는 해가 지면 암흑이 돼버린다. 하루는 집에만 있는 것이 너무 답답해 오후 8시쯤 나가고 싶어서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현관문 손잡이를 잡은 순간 Eney가 뛰어나왔다.
"이 시간에 어딜 나가려고!"
"저녁을 많이 먹었나 봐, 한 바퀴 돌려고 하는데 같이 갈래?"
"안돼! 지금은 너무 어두워서 위험해."
"에이 동네인데 뭐, 10분만 돌고 올게."
"안돼, 나가지 마. 나는 널 잃고 싶지 않아."
해가 진 밤거리를 혼자 나간다는 말에 놀랐는지 눈물을 그렁거리며 나가지 말라고 싹싹 비는 Eney. 현관문 손잡이를 놔주지 않은 Eney 덕분에(?) 나는 밤마다 감금상태였다. 총기 소지가 자유인 나라, 해가 지면 나가는 것조차 쉽지 않은 나라. 새삼 대한민국이 그리워지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