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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Vet May 22. 2021

공리주의 히어로 집단의 지구적 깽판

[분노의 질주 시리즈]에 관한 단상, 근데 이제 9편 감상을 곁들인.

<패스트 & 퓨리어스: 도쿄 드리프트> 중 한 장면. 시리즈의 3편.


근본 없는데 근본 있는 시리즈. 분노의 질주 시리즈(이하 ‘분질 시리즈’)의 장점이자 단점이 바로 이 지점에있다. 분질 시리즈는 시리즈 전체를 꿰뚫는 뚜렷한 서사도 없고, 제작사와 감독도 꾸준히 바뀌었다. 그나마 3편의 감독 저스틴 린이 4편부터 시리즈의 가닥을 잡기 시작했으니... 대신 분질 시리즈는 이 문제를 나름 영리하게 해결한다. 바로 서사와 자동차 액션의 미답지를 찾아 계속 개척해나가는 것이다. 돔의 과거사와 가족, 조연들의 전사(前事) 등과 같은 서사의 빈틈을 찾아 하나씩 메꿔나가며 세계관을 확장하고, 자동차로 기상천외한 시도들을 하며 액션의 미답지에 도전한다. 이젠 "와 이걸 해?ㅋㅋㅋ"란 반응과 "아... 뇌절 자제 좀..."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데, 내 안의 곡예사는 아직 균형을 잃진 않은 듯하다.


<분노의 질주> 중 한 장면. 시리즈의 1편.


그럼 이제 근본이 어딨냐?는 물음엔 "길거리 질주"라 답변하고 싶다. 분질 시리즈가 이미 길거리에서 멀어졌다는 지적이 많고, 어느 정도 사실이지만 분질 시리즈는 꾸준히 길거리 레이싱을 '샤라웃'하는 방식으로 시리즈의 뿌리를 계속 상기한다. 6편은 첫 장면과 런던 내에서, 7편은 오프닝과 클라이막스에서, 8편 역시 오프닝에서, 그리고 이번 9편도 과거 회상 씬들에서 길거리를 꾸준히 샤라웃하고 있다. 특히 이런 샤라웃이 단순 소환에 그치지 않고 영화의 서사 내에서, 혹은 인물들의 감정선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길거리 레이싱을 향해 꾸준히 리스펙을 보내고 있다 볼 수 있다. 이런 마초성 넘치는, 투박한 샤라웃이 분질 시리즈의 미덕이다.


<분노의 질주: 더 세븐> 중 한 장면. 시리즈의 7편.


또 이런 마초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 중 하나가, 폴 워커를 샤라웃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굉장히 노골적이고 1차원적인 방식으로 그를 추모하고 샤라웃하는데, 그 투박한 방식에 참 정감이 많이 묻어나서 찡해지는 면모가 강하다. 폴의 캐릭터 브라이언을 상징하는 스카이라인, 닛산 차들이 등장할 때마다 주는 그 전율은 마음 한 켠을 먹먹하게 만든다. 문제는 이런 투박함이 안 좋은쪽으로 발현되는 순간이 이번 9편에서 최고치를 찍지 않았나 싶은데, (안 좋은 쪽으로) 소름 끼치는 클로즈업이 꽤 많았다. 클로즈업이 종종 너무 구린 방식으로 활용된다. 당장 기억나는 건 물속에서 레티가 역광과 함께 손 뻗는 클로즈업과, 후반부에 제이콥이 미아의 손을 잡으면서 미아가 웃는 모습을 클로즈업한 장면 등등... 이들 외에도 더 있었다는 점... <분노의 질주: 더 얼티메이트>를 재밌게 본 것과 별개로 심각한 순간들도 꽤 있었기에 여러 비판들에 어느 정도 공감됐다.


<분노의 질주: 더 맥시멈> 중 한 장면. 시리즈의 6편.


분질에서 그렇게 부르짓는 가족. 농담 삼아 개인 sns에 ‘현대적(?) 대가족’이라 표현한 바 있는데, 사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물론 미국 특유의 “따뜻함, 가족 최고야” 식 가족주의에서 크게 탈피하진 못했지만, 라틴계부터 흑인과 아시안까지 다양한 인종을 넘나들며 ‘가족’이라는 집락을 이루는 모습을 보면 마초 감성과 PC의 양립 가능성을 보여주는 분질 시리즈만의 개성(?)이 있다 생각하곤 한다(인종 뿐 아니라 젠더 측면으로 봐도 솔직히 엔드게임에서 구리게 시혜적으로 넣은 A-포스 오마주나 여성 캐릭터의 취급을 생각하면 분질 시리즈가 MCU보다 낫지 않나 싶기도 하다... 딴 얘기긴 하지만 MCU를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해당 지점에서 비판점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또 8~9편에 이르러서는 엘레나의 아이가 돔-레티 가족 구성에 편입되면서도, 레티가 아이에게 친모의 존재를 알려주는 장면은 상당히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 시리즈, 생각보다 엄청 열려있다.


<분노의 질주: 더 익스트림> 중 한 장면. 시리즈의 8편.


또 분질 시리즈에서 그렇게 외치는 ‘가족’은 영화 내 인물들 간 관계에 국한되지 않는다. 흔히들 분질 시리즈가 “전작들을 굳이 보지 않아도 재밌게 보는 데에 별 문제 없는 시리즈”라 이야기한다. 충분히 공감한다. 필자도 시리즈 입문을 6편 극장 관람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시리즈 세계관을 파헤치다 보면, 분질 시리즈는 생각보다 얽히고 섥힌 복잡한 설정들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이번 9편이 특히 그랬다. 로켓 엔지니어 3명은 전부 3편의 주요 인물들이며, 이번 편에서 복귀하는 한의 서사는 3편과 6편에 걸쳐 있다. 돔의 과거사는 1편과 관련이 있으며, 돔의 아이에 관해 전부 알려면 5-6편과 8편을 알아야 하며, 이번 주요 악역들 중 8편에 등장했던 캐릭터가 다시 등장한다.


<분노의 질주: 더 얼티메이트> 중 한 장면. 시리즈의 9편.


이런식으로 하나씩 파헤치다 보면 시리즈 전편이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돼 있는 ‘가족’과도 같다. 이는 앞서 이야기한 분질 시리즈의 특징과도 맞물리는데, 설정의 공백을 속편과 함께 채워나가는 구조가 초래한 긴밀함이다. 동시에 추가된 캐릭터들에게 서사를 부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현상이다. 즉 영화 내 ‘도미닉 토레토’의 가족 구성원이 추가되는 진행의 연장선으로, 영화 밖에서 ‘분노의 질주 시리즈’라는 또다른 가족에 속편을 편입하는 방식의 흥미로운 양상을 보인다. 이번 9편의 문제점은 여기에서 기인하는데, 쉽게 말해 9편은 분질 시리즈에서 “가족 구성원의 결속력을 다지는” 데에 열심히 집중하느라 본연의 재미인 ‘액션’에 소홀해졌다. 새로운 캐릭터를 편입하면서, 떠났던 캐릭터를 다시 불러오고, 기존 캐릭터들 사이에 생긴 변화도 다뤄야 하니 이 셋을 모두 아우르려다 시리즈 사상 가장 난잡해진 영화가 됐다.


<분노의 질주: 더 얼티메이트> 중 한 장면. 시리즈의 9편


그래서 영화는 액션의 양을 챙기지 못하니 액션의 자극성을 키우고, 그래서 말도 안되는 격투와 우주로 가버리는(?) 액션이 등장한다... 이 과정에서 로만(과 도미닉 패밀리들)은 아예 불사신 기믹을 획득하고(와중에 영화가 뻔뻔한 태도를 특정 장면으로 보여주는데 그 뻔뻔함은 맘에 들었다), 도미닉은 합도 안 맞는 맨몸 격투로 초인적인 전투력을 보여준다. 그리고 역대급 무리수인 우주...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지만 재밌게 즐기긴 했다(아니 근데 숀 나름 도쿄에서 많이 굴렀는데 드리프트 장면 한 장면이라도 넣어주지 왜 엔지니어로만 등장했는지... 정말 아쉽다). 그래도 자석 액션은 꽤나 참신해서 만족스럽게 관람했는데, 솔직히 액션 영화들에서 등장한 민폐들 중 손에 꼽을 수준이 아닌가 싶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 도시 하나 쯤은 자기장으로 깽판치는 공리주의 쿨가이들... 이번에 과할 정도로 결속력 다지기를 했으니, 다음 속편을 맞이할 때는 새로운 서사들보다는 박진감 넘치는 액션을 더 보여주길 바랄 뿐이다. 시리즈에 애정이 있는 사람의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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