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의 은총을 이야기하며(기도하며) 시작한다. 얼굴 앞의 은총, 이걸 '순간의 은총'이라 다시 말할 수 있을까. 영화는 우리가 마주하는 순간들을 다루며, 과거와 미래를 모두 현재에서 바라본다.
영화를 보면서 흥미로웠던 점은 형식이었다. <당신얼굴 앞에서>는 화면을 통해, 또 대사를 통해 현재의 순간으로 침습하는 과거 혹은 미래들을 비춘다. 영화는 장소를 옮기거나 시퀀스를 전환할 때 고정된, 동시에 중심인물들이 존재하지 않는 장면들로 시작한다. 이후 그 순간을 응시하다, 인물들이 화면 내로 들어오기 시작하면 카메라를 움직이거나 줌인/아웃으로 구도를 바꾸기 시작한다. 다시 말해 장면 전환의 도입에서 카메라가 비추는 현재의 순간은, ‘인물의 진입’이란 미래의 사건을 함의한 상태다.
대사의 형식도 유사하다. 예를 들어 첫 장면에서 관객은 이혜영과 조윤희의 배역이 어떤 관계인지 알지 못한 채 그들의 대화를 듣게 된다. 상옥(이혜영)과 정옥(조윤희) 둘은 자매라는 사실, 상옥이 미국에서 살았다는 사실, 살면서 리커 스토어를 운영했단 사실, 둘의 대화에서 언급된 승원(신석호)은 정옥의 아들이란 사실 등, 대화가 진행될수록 현재의 순간만으로 알 수 없는 과거의 정보들은 대사에 의해 재생된다. 동네 주민(서영화)이 기억하는 잠깐의 TV 출연도, 이제는 어느 주인(김새벽)이 운영하는 가게로 바뀐 어릴 적 살던 이태원 집도, 배우를 그만둔 지 오래된 상옥의 과거 연기를 낱낱이 기억하는 감독 재원(권해효)의 회상도 모두 대사에 의해 현재에 재생되는 과거의 조각들이다. 여기에는 어떤 플래시백도, 서순이 뒤바뀐 시퀀스도 없다. 카메라는 오직 현재만을, 당신의 얼굴 앞에 놓인 순간만을 바라본다.
<당신얼굴 앞에서> 스틸컷
하지만 영화는 인물의 얼굴을 쉽게 보여주지 않는다. 영화를 통틀어 온전하면서도 충분히 큰 얼굴이 허용되는 인물은 단 3명이다. 상옥, 정옥, 그리고 재원. 다른 배역들은 전부 얼핏 보이는 옆모습, 정면이 보이더라도 멀찍이 작게 잡힌 얼굴, 혹은 뒷모습만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지난 <도망친 여자>에서 뒷모습의 인간들이 영화 내에서 배제되고 부정적으로 그려진 것과 다르게, <당신얼굴 앞에서> 속 이들은 주인공 상옥과 소통하고 교감한다. 둘의 차이는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얼굴 앞에 있는 것만 제대로 보”려는 상옥이었기에 가능한 상호작용이었을까. (이 지점에서 <도망친 여자>가 관찰하던 CCTV나 <당신얼굴 앞에서>가 자꾸 보여주는 핸드폰 등, 영화 내 (디지털) 스크린의 개입과 얼굴을 관찰한다는 인물의 아날로그적 행위가 갖는 대비가 연관이 있을까? 이 부분에 대해 조금 더 고민해봐야겠다. 김소희 평론가의 비평( http://m.cine21.com/news/view/?mag_id=98835 )을 뒤늦게 읽었는데, 전체적으로 건드린 포인트들이 상당히 비슷한 듯싶으면서도 접근 방향이 조금 다른 것 같다).
영화에서 가장 감정을 건드리는 장면도 보여주지 않은 얼굴을 통해 만났다. 상옥은 잡혀 있던 일정이 갑자기 인사동으로 바뀌자, 약속에 가기 전에 이태원으로 향한다. 도착한 곳은 어릴 적 상옥이 살았던 집이었고, 가게로 바뀐 주택을 돌아다니며 곳곳을 살펴본다. 상옥이 한 곳에 앉아 머물자, 상옥의 속내와 기도가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으로 들려온다. 예전에 살던 집에 온 것을 후회한다고 말하며, “얼굴 앞을 보게 하소서”라는 말로 기도를 끝마치는 순간 화면 안에 한 아이가 들어온다. 지은이라는 이름의 아이는 정확히 카메라를 등지고 서 있다. 그리고 상옥은 기도의 끝에 아이의 얼굴을 마주한다. 과거가 서린 장소에서 후회하고 있을 때, 미래(아이)의 얼굴을 마주한 상옥은, 연이어 “지은이 이쁘다”라고 말하며 끌어안는다. 카메라는 정적과 함께 이 순간을 응시한다.
<당신얼굴 앞에서> 스틸컷
마지막 시퀀스는, 영화 내내 “얼굴 앞을 보”기를 소망했던 상옥의 기도가 사라진 채 소파에서 깬 상옥의 모습과 정적으로 시작된다. 상옥은 방 안에서 잠든 정옥의 얼굴을 바라본다. 정옥이 뒤척이며 몸을 뒤집자 위치를 바꿔 끝까지 정옥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리고는 정옥에게 묻는다, 무슨 꿈을 꾸는지. 정옥을 바라보는 상옥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당신얼굴 앞에서>는 페이드아웃을 통해 마치 눈을 감듯 영화를 끝낸다. 상옥이 물어보던 꿈은 관객의 꿈이, 이 영화이지 않을까. 상옥이 바라보고 있던 얼굴은, 우리의 얼굴이 아니었을까. <도망친 여자>의 마지막에서 스크린을 통해 서로 마주 봤던 관객과 감희처럼, <당신얼굴 앞에서>는 정옥의 얼굴을 경유해 관객을 마주하는 상옥의 영화일지도 모른다.
p.s. 상옥이 기타치는 장면도, 근래 홍상수 영화들처럼 이번 영화에서도 언급된 죽음의 테마도, 재원과 상옥의 길고 긴 대화도, 깊은 감정이 오가던 상옥과 정옥의 회포도, 영화를 계속 채우는 정적의 순간들도, 영화 중간중간 화면을 가득채우는 녹빛의 향연도, 아니 그냥,,, 영화 내내 좋은 장면이 너무 많았다.
p.p.s. 사실 재원과 상옥의 대화가 조금 길다는, 그리고 이번 영화 해당 장면에서는 불륜 소재가 없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은 아쉬움이 살짝 있다. 그나마 감독을 위해 변명을 하자면 이혜영 배우와 홍상수 감독을 각각 상옥과 재원에 투영하는 과정에서 감독의 자의식-혹은 자조-를 묻히려 한 시도가 아니었을까 싶지만,,, 영화의 전체적인 기조를 떠올릴 때 해당 소재의 등장은 조금 당혹스러웠다.
p.p.p.s. 하지만 너무너무 좋았고, 올해 영화들 중에 한 손에 꼽게 좋았다. 진짜,,, 최고다. 아이 안는 장면에선 울었다. 이혜영 배우님 연기는 올해 본 모든 연기 중에 최고였다.
<당신얼굴 앞에서> 스틸컷
p.p.p.p.s. 아직 홍상수 ‘감독’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어느덧 그의 장편을 17편이나 봤고, 어떤 영화를 만드는 감독인지 어느 정도 감은 분명히 잡힌다. 하지만 그의 영화들에서 반복되는 영화적 문법-그리고 개별 영화마다 변주되는 요소들-을 짚어내는 능력은 아직 한참 부족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