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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코크림 May 02. 2023

두려운 마음으로 <생활의 달인>을 바라보다

이글루스의 지난 글들

사라지지 않을 '생활의 달인' 



누군가 <생활의 달인>에 대한 자기 생각 을 표한 후로  그에 대한 이런 저런 의견들이 있기에 나 또한 몇 마디 보태려 한다. 다만 내 이야기에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며칠 전, 몇몇 사람들과 일본의 장인들에 대해 짧은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하나의 기술을 거의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그들, 그리고 그들이 이룬 경지를 인정하고 그에 걸맞는 예우를 하는 분위기가 그렇지 못한 우리 사회와 대비되어 늘 부러운 마음을 갖고 있었다. 

 이런 생각에는 몇 년전 일본 가나자와 변두리 신사 앞에서 우연히 보게된 다다미를 만드는 한 노인의 엄숙한 모습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의 모습에는 평생을 그 일에 몸담은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장인으로서의 아우라와 열정이 있었고 자신의 일을 엄숙하게 대하는 진지함이 배어 있었다. (그 때 사진을 찍지 못한 것이 내내 아쉬웠지만 사진을 찍었더라도 내가 느낀 그 분위기가 그대로 담겼을지는 미지수다. 오히려 그렇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면 그대로 내 머릿 속에 남아 있는 이미지 그대로 간직하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일본의 장인 정신은 한 사람에게서 끝나지 않고 대를 잇는 것이 보통이다. 백 년이 넘게 우동을 만드는 집안, 언젠가 TV에서 사백 년이 넘게 구운 인절미를 파는 가문도 본 적이 있다. 집안의 자식들은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가업을 잇기 위해 기꺼이 우동 그릇을 들고 인절미를 굽거나 술을 빚는다. (심지어 일본 최고의 대학이라는 도쿄대를 졸업한 후에도 우동을 만드는 가업을 잇는 것도 본 적이 있다.) 그렇게 수십 년간 다져진 그들의 솜씨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달인'의 경지라 할 만하다. 
  
 정말 대단한 장인 정신이다. 과연 박수를 받을 만하다. 그런데 난 왜 박수를 치면서도 한 편으로는 솟아오르는 의문들을 지울 수 없는가. 




 일본 사회는 한국 사회보다 계층의 이동 가능성이 훨씬 낮다. 이런 특성은 소위 선진국이라고 하는 서구의 나라들에서도 거의 동일하게 보이는 현상이다. 자신이 속한 계층에서 다른 계층으로, 특히 상위계층으로 이동할 수 있는 기회는 극히 제한되어 있다. 사업에 성공해서 백만장자나 억만장자의 반열에 오를 수는 있겠지만, 이는 극히 드문 일이며 이것이 출신 계층을 극복하는 만능 열쇠가 될지는 미지수다. 


 계층의 이동이 제한된 사회. 즉 노동계급은 계속 노동계급으로 살 가능성이 농후한 사회에서 체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회의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일에 대해 만족하도록 사회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일 것이다. 굳이 신분 상승을 꿈꾸지 않더라도 내가 속한 계층에서 만족하며 살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방법적 기제들이 필요하다. 먼저 사회 구성원들은 사회에서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구성원들은 인정을 받을 수 있는 다른 일을 찾을 것이고 이는 거시적으로 사회의 불안정성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일이 단순히 인정을 받는 수준이 아니라 이것이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처럼 존중받을 수 있다면 사람들은 굳이 자신의 일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굳이 확실한 것을 버리고 모험을 택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사회는 이러한 노동계급의 기술을 예술과 동일하게 취급하며 더 나아가 이를 미학적인 수준으로 끌어 올릴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만약 일본의 장인 그리고 사회적으로 존중받는 그들의 기술이 이러한 사회 안정화 시스템에 의해 체계적으로 구축된 산물로 규정한다면 어떨까. 일본 사회는 역사적으로 와(和)를 중시했고, 이는 위계적 계층 구조에서 각 계층에게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하는 것으로 외화되었다. 단순화의 무리가 따르긴 하지만 장인과 가업이라는 기호는 사회적인 존경과 기술자에 대한 예우라는 기표를 갖지만 그 기의는 사회 계층 구조의 안정화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난 <생활의 달인>이 빚어낼지도 모르는 기만성이 두렵다. 물론 장인은 자신이 도달한 기술적 경지로 평가받고 그에 따른 합당한 예우 역시 받아야 한다. <생활의 달인>이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내는데 일조하고 있다는 주장에도 동의한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양가성이 존재하는 법이고 이 법칙은 <생활의 달인>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이 일본보다 역동적인 것은 사회 구성원들이 현재 자신의 처지(그것이 경제적인 측면이든 사회 지위의 측면이든)에 만족하지 않은 한국 사회만의 특이성 또한 한 몫을 할 것이다. 그 역동성이 한국 사회에서 계층 이동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난 '달인에 대한 찬양'이 이런 역동성을 해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나 '달인'이 사회적인 차원에서 강조된다면, 그리고 그것이 하나의 미학적 체계를 형성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이 갖는 사회적 효과는 단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불길한 예감 때문에 난 가끔 <생활의 달인> 보기가 두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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