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들 Jan 02. 2024

더 외면하지 않을 용기

뒷덜미 잡혀 다시 글 쓰다

운전하면서 좋아하는 유튜버의 영상을 라디오처럼 듣고 있었다.

중요한 일을 하루에 하나만 하세요, 가 영상의 제목이었다. 딱히 그 주제에 관심 있는 것도 아니었고, 공감대라 도움을 얻고 싶은 마음으로 선택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흘려듣던 중간중간 몇 문장들이 내게 턱 턱 걸렸다. 방심하다 정신이 번쩍 났다.


그녀가 조곤조곤 전하는 말은 이랬다.

집중력을 자원처럼 생각하라. 집중력이라는 자원은 기름, 연비와 비슷하다. 같은 자동차라도 도로 상황이나 기후 등 여건에 따라 연비가 다르다. 예컨대 고속도로를 달릴 때보다 막히는 시내에서 차를 자주 멈췄다 출발할 때 기름이 많이 든다.

일도 마찬가지다. 하기 시작하면 할 만한데 하기 시작하는 것이 힘들다. 연비가 떨어지고, 집중력이라는 자원이 낭비되는 것이다.  


'그러니' 하루에 중요한 일을 몰아서 '집중적으로' 하는 것이 효율적, 이라는 게 요지였다.

하지만 그 내용에 대한 나의 집중력을 거기까지였다. 갈림길에서 다른 길을 택한 것처럼 주제와 멀어졌다. 이어지는 그녀의 말들은 빠르게 흘러갔고 흩어졌다.


내가 그저 건진 말이 하나 있었을 뿐이다. (정확하고 솔직히는, 능독적으로 '건졌다'기보다 그 문장이 나를  겨냥한 듯 날아와  박힌 것이겠다.)

'하기 시작하면 할 만한데 하기 시작하는 것이 힘들다.'

'집중해라'라는 말도, 하루에 몰아서 뽝!이라는 화자의 의도와 별개로, '매일매일 오래오래'로 내 식대로 받아들였다. 매일, 오래, 의 집중이라니 이런 역설이.

하지만 적어도 글을 쓰고 있으며, 놓을 생각이 없는, 더구나 미출간 작가의 같은 처지라면 이해할 것만 같다. 그들을 믿는 구석으로 두고 주절주절 해본다.






시작이 어땠든 간에, 확실히 매력을 느끼고 애정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써왔다.

어쩌다 신나서, 주로는 꾸역꾸역, 을 반복하며 자그마치 일 년을 넘게 지속한 것은 내 성향으로 보자면 외부의 요인으로는 결코 가능하지 않다. 그저 내가 좋아서, 라고밖에 할 수 없다. 글쓰기의 바짓가랑이를 꽉 붙잡고 매달려, 앞으로 남은 인생 놓지 않으리라는, 그렇게 되리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라는 거다.

그런데 이러한 직감 혹은 다짐이 무색하게. 또 글쓰기에 손을 놓고 있다.


느닷없다. 

브런치를 열기도 싫다. 그러면서 몰래 그립기는 해 슬쩍 열었다가도 자신이 없어 금세 닫는다. 수시로 알람을 울리는 브런치의 새 글들을 읽을 마음도 어쩐지 동하지 않는다.

릿속으로는 여지없이 핑계를 만든다. 일상의 다른 일들을 지금 당장 하지 않으면 큰일 나는 것도 아니면서, 그 일들에 더욱 중요성을 부여하고 더 시급하다고 세뇌한다. 우선순위를 억지로 조정하며 하루를 바쁜 척 보내다, 잘 시간이 되어서는 '시간이 없었네. 뭐, 내일...' 한다. 시간과 하루하루와 '다른 일들' 입장에서는 어리둥절할 만한 상황이다.

이게 모두 글쓰기를 애써 외면하느라 내가 하는 짓들이다.




그렇다고 멀리 가지도 못한다.

사실 내겐 글을 쓰지 않을 때 특징이 있는데, 책을 그만큼 읽어대는 행동이다. 참으로 소심쟁이가 아닐 수 없다.

써야 하는데 써야 하는데(안 쓰고 있다는) 죄책감과, 그러면서도 노트북을 열지 못하는 자신이 괴로워서 이러는 거지. 써. 아냐 못해. 써. 못해. 바보 같은 생각으로 뒤죽박죽인 머릿속을 '병렬 독서'랍시고 닥치는 대로 읽어대는 책들이 밀어내어 주기를 바라는 거다. 



쓰지 않으면 안 된다고 누가 등을 떠미는 것도 아니고 벌을 주는 것도 아닌데 나는 대체 왜 혼자 괴로움이랄지 죄책감을 짊어지고 있는 것일까.

쓰기 싫으면 시원하게 때려지면 될 것을, 멀리 도망치거나 떨쳐버리지도 못한 채 나는 대체 왜 주변에서 맴돌며 질척거리는 것일까.

 

글로 풀고 있자니 나도 꽤 찌질하네.

아닌 게 아니라, 방향이 어긋난 나의 애씀이 얼마나 얕은 꾀였는지 곧 알게 되었다.

그것이 이 글을 쓰게 되게 된 연유다.






다시 유튜브 영상에서 꽂힌(=한 방 맞은) 문구로 돌아가본다.

'하기 시작하면 할 만한데, 하기 시작하는 것이 힘들다.' 그러면서 자동차 연비를 근거로 들었다.

그런데 어라. 무슨 책에선가 본 이야기인데.


집에 오자마자 책상 위 쌓여있는 책들을 뒤적였다. 오래 걸리지 않아 찾을 수 있었다. 요즘 겹치기로 읽고 있는 서너 권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김선영 작가의 <따라 쓰기만 해도 글이 좋아진다>에 비슷한 비유를 든 글이 있다.


현 상태를 계속해서 유지하려는 관성의 법칙은 글쓰기에도 적용된다. 글을 끄고 있으면 계속 써진다. 하지만 한 번 멈추면 다시 시동을 걸고 예열하고 출발하는 데 꽤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글을 쓰는 힘은 글을 쓰는 행위에서 나온다.

'글태기'는 정지 상태의 바퀴다. 바퀴를 굴리는 방법은 기름이 굳기 전에 재빨리 시동을 거는 수밖에 없다.


밑줄까지 그어놓은 부분이라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다. 

특히 '글을 쓰는 힘은 글을 쓰는 행위에서 나온다'는 문장의 '행위'라는 글자에는 동그라미까지 쳐 두었더라. 며칠 만에 다른 데서 비슷한 이야기를 듣는 바람에 상기하여 다시 펼친 지금, 밑줄과 동그라미로 나의 숨기지 못한 공감과 의지를 마주했다. 눈알이 뜨거워졌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라는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왔다.


달리기를 지난 10월에 시작한 이래 3개월 차에 접어들었다. 작심삼일을 이겨내고 점점 달리기에 맛 들이고 있는 터라 달리기에 대한 책과 영상을 다 섭렵할 기세로 검색을 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달리는 작가'로 이미 유명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달리기와 무라카미 하루키라니, 못 참지.

그렇게 초보 러너로서의 열의로 무장한 채 그의 달리기 이야기를 읽어 려가던 중이었다. 그런데. 달리기를 말할 때 하루키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이런 이야기가 있을 줄은 몰랐다. 마음의 준비 없이 마주친 그 페이지에서 나는 흔들렸다. 

하루키가 초보 러너가 아닌 어쭙잖게 글태기에 빠져있는 아마추어 작가에게 전하는 메시지로 다가왔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든 '견뎌 나가'는 사이에 자신 속에 감춰져 있던 진짜 재능과 만나기도 한다. 삽을 써서 비지땀을 흘리며 열심히 발밑의 구멍을 파 나가다가 아주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는 비밀의 수액과 우연히 마주치는 그런 경우다. 이런 경우 정말 '행운'이라고 부를 만하다.
그러나 그 같은 행운이 가능하게 된 것도, 그 근원을 따지면
깊은 구멍을 파 나갈 수 있을 만큼 확실한 근력을 훈련에 의해서 몸에 익혀왔기 때문인 것이다. 


책 곳곳에서 하루키는 자신을 타고난 재능은 없는, 평범한 작가라고 일컫는다. (본인의 '개인적인 입장'이라 쳐도 지독히 공감 안 가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소견이야 어떻든 독자들이 천재 작가라 부르는 하루키인 것을. 그조차 하루도 거르지 않고 글을 쓰며 '근력'을 기르는 훈련을 '견뎌'내고 있다는데, 하물며 내가 뭐라고 내키면 하고 아니면 어떻게든 안 쓸 핑계를 대고 있는 건지. 

나도 모르는 사이 두 손을 모으게 되는 글이다. 







올해 들어 여러 권의 책을 동시에 읽게 되었다. 

이게 좋더라, 하는 독서방법 추천이나 카더라 통신에 의해 의지를 가지고 한 건 아니다. 읽고 싶은 책이 많아져서, 한 마디로 책 욕심이 폭발한 바람에 이것저것 다 읽지 않으면 못 견디겠어서 이리된 것뿐이다. 한편으로는 앞서 적었듯, 글쓰기를 어떻게든 외면해 보려는 '짓'으로 이용한 점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희한하다. 서로 다른 책들인데 어느 부분에 다다르면 비슷한 내용을 만난다. (오프라인으로도 알고리즘이 작용하나?... 역시 너무 갔다.)

그 닮았다는 내용의 요지는 이러하다. 

'그러니까 

고민 그만하고

그만 미루고 

써. 

써야 써진다니까.

써라, 써.'


우주 만물이 손에 손을 잡고 나를 향해 둘러 서서는 잔소리를 퍼붓는다. 이상하게 그 잔소리에는 온기가 있다. 걱정 가득하고 부드러우며 담담하다. 그 어렵다는 꼰대 같지 않은 잔소리다.(프로 작가들은 역시 대단하네. 그냥 책 내고 돈 버는 게 아니네.)

이쯤 되니 심상치 않다. 무슨무슨 책을 더 읽으며 아무리 피하고 숨어도, 같은 잔소리만 반복해서 마주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러니 여기서 그만. 귀에 딱지 않기 전에 고분고분 말 들어볼 참이다. 


뒷덜미 잡혀 출발선에 다시 세워진 기분이 싫지 않다. 

마침 새해다.


작가의 이전글 ㄱ나니, 그 겨울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