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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Apr 12. 2023

외로운 결혼기념일과 느끼한 감바스

매콤하며 느끼한 맛

“따님아 내일 아빠, 엄마 결혼기념일이야 ”


백수지만 뭘 해야 할지 모르는 나에게 요즘 일과는 카페로의 출근이다. 그래봐야 동네에 다니던 카페를 돌고 도는 것이지만 그래야 내가 좀 살아있는 사람같이 느껴졌다. ’ 점심은 스타벅스에서 트러플 양송이 수프를 먹어야지 ‘ 오늘의 사치를 결심하고 스타벅스로 가서 한없이 환한 밖을 보며 멍을 때리고 있었는데, 걸려온 아빠의 전화에 내가 부린 만 원짜리 사치는 1시간도 채 되지 못해 끝나고 말았다. 백수가 된 딸에게 전화기에 뜨는 ”아빠“라는 화면은 점점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는데 전화의 목적은 나를 더 부담스럽게 만들었다! 아빠의 말을 듣고 서둘러 핸드폰 화면을 터치해 보니 벌써 그날이 성큼 다가와있었다.



4월 11일 엄마, 아빠의 결혼기념일이다.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을 챙겼다. 워낙 어릴 때부터 챙기다 보니 자식이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을 챙기는 것이 당연한 건 줄 알았는데, 10대 중반쯤 모두가 그런 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럼에도 내가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을 마땅히 챙기는 이유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아빠의 ‘내가 챙길 기념일이 몇 개 없으니 결혼기념일을 챙기라는 논리‘에 동의해서이고 두 번째는 매년 결혼기념일을 혼자 보내는 엄마를 위해서다.


1965.12.02 부모님의 생신이다. 참 신기하게도 나의 부모님은 한날에 태어나셨다. 부모님이 대학생이시던 시절부터 생일이 같아 천생연분이라며 주변에서 참 많이 엮었다고 한다. 여기서 발동하는 아빠의 논리는 “남들은 아빠생신과 엄마생신을 따로따로 두 번을 챙기는데, 너는 한 번만 챙기면 되니 결혼기념일도 챙기거라”

생일을 한 번에 챙긴다고 돈이 덜 드는 것도 정성이 덜 소요되는 것도 아니지만, 어릴 적 내가 멋모르고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듯 여전히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고개를 끄덕이는 데는 사실 두 번째 이유가 크다. 내가 20년 넘게 본 엄마는 거의 매년 결혼기념일을  혼자 보내셨기 때문이다. 나의 부모님은 아빠의 직장 때문에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주말부부셨고, 현재까지 주말부부로 30년 가까이 유지하고 계시다. 그렇다고 아빠가 가정에 무심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내가 본 아빠는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매일 엄마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랑꾼에 가깝다. 매해 결혼기념일마다 지방에서 꼭 케이크와 꽃다발을 잊지 않고 보내고, 30년의 시간 동안 매 주말마다 가족들과 보내는 몇 시간을 위해 왕복 몇백 km씩을 달려오셨다. 덕분에 나는 한 달에 3-4번밖에 보지 못하지만 세상에서 아빠를 가장 사랑하는 딸이 되었다. 


어린 시절에는 여장군스타일의 엄마라 기념일이 별거냐고 말씀하시며 그날을 혼자 보내는 것에 개의치 않아 하신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스무 살이 넘어서야 엄마는 혼자서도 씩씩하니 괜찮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듣고 여태껏 그 말이 거짓말이었음을 깨달아버렸다. 아빠가 엄마를 얼마나 생각하고 사랑하는지 알지만 이런 날이면 혼자라도 괜찮다며 웃던 엄마의 씁쓸한 미소가 잊히지 않고 떠올랐다.



아빠는 예쁜 꽃과 직장동료들과 나눠먹을 수 있는 쿠키들을 엄마의 직장에 보내고 싶다고 도움을 요청하셨고, 몇 번의 통화 끝에 아빠의 계획이 이뤄질 수 있게 준비했다. 이제 문제는 나였다. 퇴사한 지 아직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날짜 개념이라곤 없어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고, 결혼기념일은 12시간도 채 남지 않은 상태였다. 직장을 그만둔 20대 후반의 딸에게는 부모님에게 드릴 수 있는 넉넉한 용돈도, 값비싼 선물도 당장은 어려웠다. 고민 끝에 나는 몸으로 때우기로 결정했다.


부지런히 일어나 집을 청소하고, 장을 보러 나갔다. 할 줄 아는 요리가 손에 꼽지만 그중에서도 나름 그럴싸한 메뉴는 하나밖에 없었다. 급하게 집 근처에 장을 보러 가고, 자취할 때 그나마 손님 대접용으로 요리했던 감바스와 와인을 준비한다. 부모님의 집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부엌에서 요리를 한 적이 거의 없었다는 게 실감이 났다. 정말 간단한 요리인데, 재료도 제대로 찾지 못하며 엄마의 퇴근시간에 맞추느라 허둥지둥 요리를 마무리했다. 양손에 가득한 짐과 아빠의 꽃바구니를 들고 피곤한 표정으로 집으로 돌아온 엄마에게 조심스럽게 결혼기념일을 축하한다고 말했다.



“맛있는데, 느끼하네… 그래도 고마워”


요리 전문가에 가까운 엄마에게 내 요리가 마음에 쏙 들긴 힘들 테니 이 정도 말에도 나는 만족했다. 둘이 함께 와인을 한잔 마시며 엄마는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냈다. 뻘뻘 대며 요리하느라 붉게 닳아 오른 내 뺨과 와인 한잔에 닳아 오른 엄마의 뺨. 웃고 떠들며 감바스를 싹싹 비웠다. 별거 없는데 기뻐하는 엄마의 미소가 나에게 미안함과 뿌듯함을 동시에 선사하며 특별한 날이 아니더라도 종종 이런 시간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따스한 봄의 오늘과 엄마의 미소가 나에게 꽤나 오래 기억될 거 같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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