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ppy new year, 천비향!
10대 때는 10km/h로, 20대 때는 20km/h로, 30대 때는 30km/h로, 나이 먹을수록 시간이 점점 더 빨리 간다는 어른들의 말은 과연 맞았다. 2021년이 쏜살같이 가고 어느새 새해다. 옛날엔 나름의 새해 다짐도 하고 송년회에, 신년회에, 또 한 살 나이 먹었다는 복잡 미묘한 기분으로 요란했던 신년이었다. 그치만 매번 찾아오는 새해가 이제는 그냥 덤덤하기만 하다. 이게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일까. 하긴 시간이 갈수록 설레는 것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어릴 땐 모든 것이 처음이었는데, 지금은 다 했고 봤던 것들이다. 이래서 사람들은 여행을 떠나는 것일까. 하지만 이 시국에 그것도 쉽지만은 않다.
그렇지만 마냥 한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지금 하루하루가 내가 살아갈 날 중에 가장 젊은 날이다. 오늘도 나에게 주어진 하루를 온전히 즐기는 것이 나의 꾸준한 각오이자, 신년 다짐이 되겠다. 과거의 영광에 머무르기만 해도 전설로 남을 가수들이 노년에도 자기 복제가 아닌, 꾸준히 새로운 시도를 하는 멋진 모습을 얼마나 많이 봐왔던가. 가왕 조용필도 60이 넘은 나이에 19집 <Hello>를 발표하였고, 얼마 전 ‘테스형’으로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나훈아는 분명 나보다 젊게 사시는 것 같더라. 지금은 세상을 떠난 데이빗 보위는 66살에 <The Next day>를 발표하더니 일흔을 목전에 둔 예순아홉, <Blackstar>를 발표하고 세상을 떠나 별이 되었다.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 아바(ABBA)도, 그 아바도 모든 이들의 기대 속에 얼마 전인 2021년 11월 5일 <Voyage>를 발표하여 전 세계의 팬들에게 훈훈한 연말 선물을 안겼으니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아바는 굳이 말하기에도 입 아플 정도로 유명한 스웨덴 출신의 혼성그룹이다. 60년대 말, 1970년대 초부터 활동을 시작한 아바는 ‘비에른 울바에우스’ ‘벤뉘 안데르손’과 이후 그들의 배우자가 된 ‘애니 프리드 린스테드’, ‘앙네타 펠트스코그’와의 만남으로 결성됐다.(이들 이름의 앞글자를 하나씩 따서 ABBA라는 이름이 정해졌다.) 이 실력 있던 무명밴드는 1974년 유로비전에서 싱글 ‘워털루(waterloo)’로 우승을 거머쥐면서 인기의 서막을 알렸다. 지금 10대부터 중장년층까지 아우를 수 있는-그것도 전 세계적으로!-그룹이 과연 얼마나 될까. 아바는 그것이 가능한 ‘현재 진행형’의 팝 그룹이다. 20세기말에는 아바의 노래로만 구성된 뮤지컬 ‘맘마미아’가 등장해 히트를 치더니-역사상 가장 흥행한 뮤지컬 3위- 메릴 스트립 주연의 동명의 영화 두 편으로 이어져 역시 큰 인기를 끌었다. 가뜩이나 뮤지컬 영화의 인기가 타국에 비해 월등히 높은 대한민국에선 모녀가, 모자가 함께 영화관을 찾아 맘마미아를 보고 같이 노래를 흥얼거리는 훈훈한 풍경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아바의 히트곡은 차고 넘치는 데다 92년에 발표된 베스트 앨범 <ABBA Gold>만 들어도 충분하고 영화 ‘맘마미아’ 1편과 2편에 나온 노래들만 들어도 좋으니 오늘은 의미 있는 두 곡만 소개하려 한다. 첫 번째는 이맘때 빠질 수 없는 ‘Happy new year’. 고전이 좋은 법이다. 음악사에 신년을 주제로 한 노래가 생각보다 적기도 하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이만한 곡을 못 들어봤다. ‘파티가 끝났으니 이제 말할 시간이에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대충 의역할 수 있는 단순하지만 희망으로 가득 찬 가사와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중독성 있는 멜로디, 그리고 두 보컬의 아름다운 하모니는 일종의 성가(聖歌)까지도 연상케 한다. 두 번째는 상대적으로 덜 유명할 수 있는 노래로 ‘Slipping through my fingers’. 이 노래는 영화 ‘맘마미아1’ 중후반부에 나오는데 도나(메릴 스트립)가 딸 소피(아만다 사이프리드)의 결혼식 전 딸을 정성스럽게 치장해주면서 부르는 노래였다. 딸을 보내는 어머니의 심경을 담은 뭉클한 가사와 두 배우의 열연이 너무 뭉클해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노래다. 신년과 무슨 상관이 있나 싶겠지만 세월이 흘렀다는 건 나이를 먹었다는 것이고, 내 자식이 커간다는 의미니까 충분히 연관 지을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정말 올해 딸을 떠나보내는 어머님이 계실 수도 있는 일이고 말이다.
노래 가사처럼 따님이 실제로 올해 결혼을 하시진 않겠지만 영화 속 도나와 소피처럼 훈훈하고 아름다운 모녀 양조인이 전통주 업계에도 있다. ‘천비향’과 ‘택이’, ‘술그리다·술예쁘다’ 등을 생산하고 있는 평택 ‘좋은술’의 이예령 대표님과 따님들이다. 이예령 대표님과는 운 좋게도 방배동의 가양주 연구소에서 동문수학했었는데 그때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요즘에야 전통주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많아져서 수많은 우리 술들이 세상에 나오고 있지만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만해도 상황은 녹록치 않았다. 좋은 술을 만드는 법은 알았지만 마케팅은 몰랐던 당시의 대표님, 쌓여가는 술과 누적되는 적자 속에서 이대로 끝인가라는 생각을 할 때 대표님을 다시 일으켜 세운 사람들이 바로 두 따님을 비롯한 가족들이었다고 한다. 특히 따님은 당시 다니던 대학까지 잠시 휴학하고 본격적으로 도우셨다고 하니 도나와 소피보다 훈훈한 모녀 사이가 아닐까. 그 이후는? 여러 주류 품평회에서 굵직굵직한 상들을 거머쥐더니 2016년 청와대 만찬주에 이어 한·아세안 정상회의 공식 건배주로 선정되어 대중들에게 그 이름을 크게 알렸다. 이후에도 여·야 대표 만찬회동은 물론 각종 행사에 만찬주로 선정되어 이제는 명실공히 우리나라 최고의 청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따님과 이예령 대표님의 술 빚는 이야기는 이제 각종 매스컴은 물론 예능에도 소개되고 있으니 전통주 업계에 한 편의 아름다운 드라마다. 사심이 좀 들어갔나, 술 이야기는 전혀 안 하고 칭찬만 한가득 한 것 같지만 사실 ‘천비향’의 맛이야 이미 일찌감치 여러 곳에서 인정받은지라 끝난지라 과찬이 아니다. ‘천비향’ 청주는 오양주(밑술에 덧술을 네 번 더하여 총 다섯 번 빚는 술)로 지금 시중에 유통되는 전통주 중에서도 오양주는 손에 꼽는다. 술 한번 빚는데 꼬박 일주일을 써야 되니 그 정성은 충분히 짐작 가능하지 않나, 더군다나 저온에서 3개월 이상을 천천히 숙성하니 맛이 없을래야 없을 수가 없다. ‘천년의 비밀을 간직한 향기’라는 이름은 허언이 아니라 곡주 특유의 곡향에 벌꿀이나 요구르트 같은 포근한 향기가 매력적이고 쌀과 물, 누룩으로만 만들었음에도 눅진한 달콤함과 적당한 산미가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과연 명주라 일컬을만하다.
다시 신년이다. 새롭게 시작된 한 해를 기념하는 술과 음악으로 무엇이 좋을까란 고민은 생각보다 쉽게 풀렸다. 이미 내 마음속에 아바와 천비향이 들어와 있던 탓일지 모르겠다. 천비향의 황금물결과 달콤함이 아른거리고 있다. 말 그대로 ‘좋은술’로 올해를 시작해 보자. 다들 Happy new year!
2021년 11월 발매된 아바의 신보 <voyage>다. 수록곡 ‘don’t shut me down‘이 사전 공개되고 이후 정규 앨범이 발매되었다. 사실 전설이 전설로만, 추억 속에 남아주길 바라는 이들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러기에 이들의 도전이 아름답다. 개인적으론 수록곡 중에 ’Little things‘를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