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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재형 Aug 22. 2023

법과 문학의 거리

-근심을 위한 투자

 나는 일선의 수사관으로 십수 년을 보내다가 문학에 대한 갈증으로 중도 퇴직하여 재야의 법무사로 20년째 일하고 있다. 법전의 힘을 빌려 범인을 쫓던 수사관에서, 사전의 힘을 빌려 은유를 좇는 시인으로 어느 날 전향했다. 나는 해가 뜨면 농어민과 소상공인을 만나 법률조력자로 일하지만, 해가 지면 골방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문인으로 돌아간다. 법전과 사전의 틈바구니에서 내가 한 일은 법과 문학의 거리를 조율하는 거였다. 지난 20년 두 직역을 오가며 그 거리를 좁히는 문제에 천착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연 법과 문학의 거리는 가까운가? 법과 문학의 거리는 멀고도 멀다. 법조인과 문인은 서로 어울리는 직역인가? 법조인과 문인은 썩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의 보편적인 정서에 따르면 일견 맞는 논리 같다. 그런데 수사관을 거친 법무사로 시인을 겸하고 있는 내 경험에 비추어 보면 법과 문학은 가깝지도 않지만 그리 멀지도 않다. 아니 때로는 가깝기도 하고 멀기도 하다.  

    

문학의 쓸모     


 문학은 나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여러 가지 중 하나를 꼽으라면 사유를 불러오는 힘이다. 

 독일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독일의 나치스 친위대 장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이 전범으로 체포되자 재판을 참관했고 책을 냈다. 이때 제시한 개념이 ‘악의 평범성’이다. 자신의 저서《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그녀는 홀로코스트와 같은 역사 속 악행은 광신자나 반사회성 인격 장애자들이 행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오히려, 국가에 순응하며 자신들의 행동을 보통이라 여기는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서 행해진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 악은 악에서 나온다기보다 평범한 사람의 무사유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아이히만이 체포되었을 당시 사람들은 그가 포악한 성정을 가진 악인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반대로 지극히 평범하고 가정적인 사람이라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아이히만의 정신을 검진한 의료진 역시 그가 정상이어서 오히려 자신들이 이상해진 것 같다고 말할 정도였다. 재판에서 아이히만은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고, 오히려 월급을 받고 일을 제대로 못하면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것이라고 진술했다. 그는 내적인 갈등, 다시 말해 사유 없이 독일 공직자로서 관료주의의 효율을 위해 기술적으로 임무를 수행했을 뿐이라는 것이 한나 아렌트의 분석이었다.      


 내가 한때 소속되어 수사관으로 일했던 조직에서는, 검사동일체 원칙에 기반을 둔 상명하복이 엄존했다. 수사 과정에서 상관의 지시에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 따르기 시작하면 어떤 수사관이라도 어렵지 않게 ‘악의 평범성’에 빠질 수 있다. 나 역시 그 조직의 일원으로 일하는 내내 악의 평범성에 노출되어 있었다. 아니, 벌써 나한테 내사를 당하거나 조사를 받던 사건 당사자들에게는 아이히만처럼 군림했는지 모른다. 그들 중 누군가는 나를 아예 아이히만 중 하나로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맹목적으로 일과 사건에 오염되면 충성이라는 지병에 걸리고 실적과 성과를 앓게 된다. 그저 법과 명령에 따라 충실했을 뿐이라고 자기변명이나 늘어놓을 만큼 분별력이 결여된 나를 ‘아이히만의 함정’에서 구해준 것은 문학이 견인한 사유였다. 관료주의에 입각한 충정이나 관성적 일중독을 제어하며 돌아보게 하는 힘, 사유의 필요성을 환기하는 역할을 문학이 자임한 것이다. 나는 사건을 맡아 처리할 때면 간간이 스스로에게 자문하곤 하였는데, 그 정도는 문학과 좁혀진 거리만큼 비례했다.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 나는 왜, 이 사건을 하는가? 그러니까 문학은 내 지근거리에서 정서적 ‘후견인’ 역할을 한 거였다     


 법률 종사자에게 문학은 쓸모 있는 장르인가? 

 명판결도 조정만은 못하다, 는 격언이 있다. 판결은 재판을 통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일방 당사자에게 승소와 패소를 안겨주는 방식이다. 분쟁을 법적인 다툼으로 끝내 버리는 절차인 것이다. 반면 조정(調停)은 다툼이라는 재판에 의탁하지 않는다. 제3자의 중재를 통해 당사자 간 화해에 이르는 분쟁해결 방식이다. 나는 수사관으로 일하는 동안 형사 사건의 합의나 조정에 참여한 경험이 있고, 법무사로 일 할 때는 법원의 조정위원으로서 조정에 참여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합의나 조정에서 성공한 사례와 실패한 사례를 들어 법조인으로서 문학의 쓸모에 대해 고찰해보고자 한다.     


울분의 강을 건너     


 창이는 내 죽마고우다. 수도권에 살고 있다. 창이 아내의 요청으로 장시간 전화 상담을 했다. 폭력 사건의 피해자인 그녀는 힘들어 한다. 임대차계약 갱신과 해지 사이에서 일어난 분쟁이다. 임대차 3법이 갖고 있는 부작용으로 보인다. 임대인과 임차인이 서로 가해자요, 피해자라고 주장하면서 쌍방이 피해자 겸 가해자로 피소되었다. 경찰의 지지부진한 수사와 검찰의 뜨뜻미지근한 처분 지체에 그녀는 잔뜩 골이 나 있다. 현장의 목격자는 가해자 일행뿐이고, 그녀의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라고는 그녀 자신뿐이다. 자신을 대변할 건 진실 그 자체인 것이다. 

 사실, 수사와 재판은 우리가 기대하는 진실의 세계와는 거리가 멀다, 고 창이에게 미리 귀띔해 줬는데, 그의 아내에게는 전달이 제대로 안 된 것 같다. 거기다 수사권조정의 여파로 사법시스템이 일대 혼란을 겪고 있는 점도, 그녀에게는 불리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그녀의 고백에 따르자면, 이미 창이 부부의 심신의 건강은 붕괴된 상태이다. 다른 병증으로 투병하다가 겨우 회복한 창이는 불면증에 시달리고, 그녀는 공황장애를 겪고 있다고 토로한다. 다 그놈 때문이다. 그놈에 대한 울분이 화를 키웠고, 그 화가 몸과 마음에 나쁘게 작용하였다. 나는 그녀에게 사건의 진실은 차치하고, 우선은 분쟁의 와중에 무너진 가정의 평화를 재건하는 게 급선무이니 합의의 결단을 내리라고 조언했다. 그녀의 표현대로라면 상대방은 ‘개또라이’다. 그녀가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면 상대방은 비인격체로 추정된다. 길 가다가 발길에 툭 걸리는 돌멩이처럼 말이다. 돌과 싸우면 사람이 다친다. 돌을 깨우친다는 것도 사람으로선 못 할 일이다. 

 그녀는 순도 100%의 진실에 도달하기를 고대한다. 하지만 현장을 직접 체험하지 못한 검경과 법원이 당사자들의 일방적인 주장과 그들이 제시하는 제한된 증거만으로 절대적인 진실을 캐낼 가능성은 50%를 웃도는 정도에 그친다. 우리가 사법시스템에서 얻을 수 있는 기댓값이다. 사건의 이해관계인이 품고 있는 기대치 100%와 실제 도달이 가능한 50% 사이에 그녀가 서 있다. 그놈에 대한 기대와 그놈을 향한 울분을 버리라고 여러 사례를 들어 조언했다. 그놈을 위해서도, 그놈이 두려워서도 아니다. 오로지 그녀 자신을 위해서 말이다.    

 

 나는 20년 동안 사건과 조정 현장에서 잔뼈가 굵었다. 합의를 하는 것은 우선 자신에게 좋은 일이다. 법조계의 일원으로서 일관된 내 신념이다. 울분의 강을 건너, 합의의 바다에 도달해보라. 굽이치던 불면의 밤은 사라지고, 평화의 돛단배가 용서한 자신을 기다릴 것이다. 나는  수많은 조정 현장에서 얻은 경험칙을 그녀에게 소상히 전했다. 

 하루 지나, 다시 그녀한테서 전화가 왔다. 조정 절차에 참여해서 가까스로 합의를 봤다고 한다. 전날 나와의 통화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100번 잘하셨어요’ 나는 그녀에게 축하와 지지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합의로 인한 아쉬운 부분은, 나중에 하느님이 뜻하는 방식으로 꼭 돌려주실 것이라고, 위로 문자를 추가로 보냈다. 곧바로 그녀한테 답신이 왔다. “부족하고 아쉬운 것은 없어요” 다만, 전쟁 같은 사건에서 자기와 가족을 살려내려고 스스로 결단한 것이라고, 합의를 도출한 자신의 행보에 만족한 듯하다. 용서는 그놈을 위해 쓰는 자비가 아니다. 자신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최후에 꺼내 쓰는 보검이다. 그녀는 오랜만에 발 뻗고 단잠을 이룰 것이다. 

 그녀와의 상담에서 내가 동원한 문학의 비유가 힘을 발휘했다. 다시 말해 직유와 은유를 활용한 수사법이 작동한 것이다.      


근심을 위한 투자     


 사과나 용서는 다른 날로 미루면 손해다. 시간이 지체되는 만큼 후회라는 연체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의형제처럼 지내는 후배의 계수씨가 찾아왔다. 한동안 소원하더니 얼굴이 수척해 보인다. 근심을 털어놓는데 그녀의 얼굴을 상하게 한 주범은 역시나 돈이다. 

 고객과 계산상의 다툼으로 금전적 합의를 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먼저 적정한 금액이라고 제시했는데 상대방이 더 많은 금액을 역으로 요구했다. 더 이상 양보하는 것이 상대방에게 당하는 것 같아 그녀는 합의를 미루고 버텼다. 둘 사이에 팽팽하게 진행되던 조정은 결렬되고, 다시 지루한 공세로 전환되었다. 상대방은 발끈하며 그녀의 직장 앞에 현수막까지 걸면서 깽판을 부렸다. 그녀는 심한 스트레스로 마음의 병을 얻었고 뇌경색까지 앓는 지경에 이르렀다. 참다못해 해답을 찾고자 내 사무소를 방문한 것이다. 자초지종을 늘어놓는 그녀에게 단도직입적으로 한마디 툭 던진다. 왜, 합의금을 뺏기는 돈이라고 생각하세요? 투자금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나요? 그녀가 반문하는 표정을 보인다. ‘뭔 소리지?’  ‘왜, 합의금을 투자금이라고 그러지?’ 


 분쟁의 당사자에게 사건은 전쟁이다. 사건에 연루되면 당사자는 물론 가족과 동료, 지인까지 연쇄적으로 평온한 일상이 깨진다. 합의는 사건이라는 전쟁을 종식시키고 무너진 평화를 재건하는 공사 같다고 할까. 조정은 다툼을 끝내고 원만히 화해하여 서로의 일상으로 돌아가려는 일종의 무형적 사업이다. 즉, 합의금은 서로의 평화를 일구기 위해 소요되는 투자금이다. 오늘의 앙금을 접고 내일을 향해 투자하는 것이다. 내 평화를 얻자는데 내 돈을 더 들이면 어떤가. 어차피 나를 위해 투자하는 것인데 말이다. 

 내 부연 설명을 듣고는 그녀의 눈이 반짝 빛난다. 뭔가 해답을 찾았다는 표정이다. 그녀는 돌아간 지 일주일여 만에 후일담을 보내왔다. 나를 만나고 돌아가 결단을 내렸고 합의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날 이후 깨진 일상이 회복되고 불면증도 사라졌다고 고백한다. 근심을 위한 투자의 제언에 감사하다고. 

 이때에도 나는 그녀와의 상담에서 문학의 비유법을 동원했다. 역시나 직유나 은유를 활용한 수사법이 작동한 것이다.      


법리적인 접근의 한계     


 한 집안의 다섯 형제가 모두 연루된 사건이다. 그들 선친의 상속재산 관련 보상금을 둘러싼 분쟁이다. 맏이가 피고소인이고 나머지 형제는 고소인과 참고인이다. 고소인들 중 주동자는 중소기업 간부 출신 아우다. 혈족간 분쟁이라 합의만 된다면 수사가 종결되는 ‘친족상도례’사안이다. 친족상도례란, 8촌 이내 혈족이나 4촌 이내 인척·배우자 간에 발생한 절도죄·사기죄․횡령죄 등 재산범죄에 대해 형을 면제하거나 피해자의 고소가 있어야 공소를 제기할 수 있다는 형법상의 특례 조항이다. 형제끼리 분쟁은 수사관들이 기피하는 사건 중 하나이다. 잘 해봐야 본전이고 어느 한쪽을 처벌한다고 해도 골육상쟁이라서 공적인 보람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객기와 오기를 부리는 형제를 각개격파 식으로 설득해서 어렵게 합의를 도출해낸다. 주임검사는 고소인들의 취하에 따라 ‘공소권 없음’으로 불기소처분을 한다. 서로 딴 마음을 품고 변심하기 전에 일사천리로 진행한 것이다. 

 그 사건을 마치고 나는 다른 청으로 근무지를 옮긴다. 그로부터 몇 달 후, 그 사건의 고소인 중 하나가 수소문해서 나에게 전화를 한다. 중소기업 간부 출신의 그는 다짜고짜 씩씩거리면서 고소취하를 철회하겠다는 거다. 그는 형제들 중 상대적으로 살림이 더 나은 편이었는데 끝까지 유별나게 군다. 나는 이미 처분된 사건이라 철회나 번복은 안 된다고 설명을 해준다. 그러자 그는 합의를 주선했던 나를 방송국에 제보한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집안의 무너진 화목을 개건해주려던 내 합의 시도 자체가 부당한 행위라는 궤변을 늘어놓는다. 나는 그에게 고소를 하던 진정을 하든, 어디 마음대로 해볼 테면 해보라고 한다. 그의 식언에 화가 난 내가 정면으로 응수한 것이다. 

 고소 사건의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도시로 진출해 비교적 출세한 형제들이 보상금 에 매달려 지질하게 구는 것과 달리, 선친의 대를 이어 고향에 남아 농사를 짓던 한 형제만은 불효막심한 자신들의 처지를 한탄했다. 그는 다른 형제들을 만류하다가 여의치 않자 극약이라도 먹고 죽어버릴란다고 울먹였다. 심지어 형제간에 이게 뭔 짓이냐고 울부짖기까지 했다. 다른 형제들이 서로 삿대질하며 욕설을 퍼붓고 으르렁거리는데, 그 사람 혼자 어미 잃은 양처럼 울었다. 내 눈에는 그 형제만 사람으로 보였다. 완고하게 돈을 물고 늘어지는 나머지 혈족은 밥그릇을 차지하려고 싸우는 맹수처럼 보였다.      


 수사관의 전형적인 방식으로, 다시 말해 실무적으로 접근하고 법리적으로 설득한 그 사건의 합의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법리적으로 접근한 방법이 한동안 실무적으로는 통했다. 하지만 사건 당사자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는 실패한 것이다. 이 합의 절차에서 문학은 동원되지 않았다. 당연히 비유는 눈을 씻고 봐도 없다. 


건강한 이별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 총부리를 겨누는 전쟁 같은 법적 분쟁에서 합의는 지난한 일이다. 검사도, 판사도, 수사관도 섣불리 시도할 수 없다. 수사관이나 법무사의 전형적인 방식으로 분쟁에 뛰어들어 어쭙잖게 개입하려고 들면, 끼어든 제3자도 다치고, 사건 당사자들도 더 다치게 할 수 있다. 명색이 시인으로서 시와 산문을 써온 나는 다른 방식으로 타자들의 전쟁에 뛰어들어 합의를 도출해낸다. 시인의 병참기지에는 상상력과 비유라는 비밀병기가 저장되어 있다. 시인으로서 상상력과 비유를 수사법으로 휴대하고 조정에 참전하여 합의라는 종전을 이끌어낸 것이다. 

 자신의 언어가 빈약하면, 표현도 빈약하고 사고와 감정도 충분히 드러낼 수 없다. 언어의 질과 양이 사고와 마음 자세까지 결정한다. 어휘와 비유가 부족한 사람은 사고와 마음가짐도 어휘와 비유를 갖춘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거칠 수밖에 없다. 어떤 진실이 100%일 때 어휘와 표현력이 50%에 그친다면, 결국에는 진실의 절반만 드러낼 수 있다. 

 시인의 창고에서 보급된 상상력과 비유법의 무기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무장하고 있던 고정관념을 일거에 해제시킨다. 수사의 전선에 놓인 이해관계인들은 시인의 수사(修辭)에 환기되면서 신선한 충격을 받는다. 자신들의 적이 자신들 내부에 있음을 깨닫는 계기에 도달하는 것이다. 비로소 그들은 스스로에게 백기를 들게 된다. 참신한 비유는 완고하게 닫힌 방어벽도 무너뜨리는 힘을 갖고 있다. 사랑이 회복할 수 없을 만큼 고장나 이혼 절차에 돌입한 부부에게 법률용어인 ‘혼인파탄’ 대신, 시인의 말인 ‘건강한 이별’을 권할 때 당사자들은 서로 상처를 입히고 마는 전쟁 같은 재판보다는, 원만하게 수습하기 위한 조정에 합류한다. 나는 문학에 눈을 뜨면서 사건 현장에서도 비유를 수사법(搜査法)의 일환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로써 내 문학은 현장에서 성장하며 효험을 보고 있다. 내가 맡은 사건의 일선에서 도구와 무기로 빛을 보며 법과 문학이 상승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창과 방패     


 수사관을 거쳐 시인이 된 내 눈에 시인과 수사관은 적지 않은 공통분모가 보인다. 시인과 수사관은 돋보기와 망원경의 눈을 장착하고 있다. 사건과 사물을 보는 눈이 예리한 것이다. 두 직역은 공히 사회의 이면과 세상의 그늘을 뒤져 의미를 찾아내는 작업을 수행한다. 사회의 이면과 세상의 그늘이라는 무대 위에는 약자와 강자 간의 분쟁이라는 서사가 있다. 여기에서 사건 기록은 대본이다. 그 희비극을 문학적으로 해석하는 직역이 시인이고 작가이다. 그 희비극을 법적으로 해석하는 직역이 수사관과 법무사이다. 두 직역은 사물, 사건, 사람을 관찰하여 그것들을 재조명하고 재해석한 것들을 세상을 향해 공포한다. 수사관은 그 결과를 조서와 공소장으로 내놓고, 시인은 그 성과를 시와 산문으로 내놓는다. 내게 있어서 수사관과 시인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가 종래 품고 있는 고정관념이 사주하여 수사관의 법과 시인의 문학이 길항해 왔을 뿐이다. 


 진정한 법은-좁혀 말하면 수사와 재판은-인간에 대한 심오한 이해에 관점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문학과 깊이 닿아 있다. 법과 문학은 밑바닥 현실을 담아내고 진실을 캐내는 점에서 서로를 닮아 있고 풍부하게 기여할 수 있다. 수사와 재판은 약자의 방패가 아니라 강자의 창으로 전락하였다. 법과 정의의 여신 아스트라이어(Astraea)가 실종된 것이다. 유전무죄와 무전유죄가 판치는 현실 앞에서 법조인은 고뇌하고 갈등한다. 수사(혹은 재판)와 사건 당사자들 사이에 깊게 패인 불신의 벽을 메울 방법은 없을까? 나는, 법과 문학의 만남이 여러 대안 중 하나라고 믿는다.    

 

오래된 고백     


 내가 수사관 출신, 현직 법무사로서 처음 시인이 되었을 때 우려스러웠다. 수사관의 길과 시인의 길은 완전히 상반된 세계라는 고정관념 때문이었다. 수사관은 감정을 배제한 냉정한 법률이 지배하는 세계이고, 반면에 문학은 무모하고 비이성적인 것도 용납하는 감정의 세계로만 본 것이다. 

 그런데 수사관과 법무사로 오래 일을 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수사와 재판의 일을 제대로 하려면 그 범죄와 사건의 당사자인 인간 자체를 깊이 이해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문학의 진수인 휴머니즘 문제와 법의 일이 상통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조정의 사례와 함께 꺼낸 비유법과 수사의 이야기는, 법과 문학의 거리를 느끼는 고정관념 앞에서 도발적인 질문일 수 있다. 법과 문학의 거리가 멀지 않다는 나의 강변은 수사관 출신의 편견일 수 있다. 만일 이 글이 마무리되어 가는 지금까지 법과 문학의 거리가 멀다고 느낀다면, 아직도 법과 문학의 거리가 한 치도 좁혀지지 않았다면, 법과 문학 사이의 거리를 조정해 보려는 내 시도는 실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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