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박서연 Jenny
Jul 21. 2023
1.
글쓰기 모임에서 "노화"를 주제어로 받았습니다.
글을 쓰려고 보니, 멋진 주제어라는 생각이 듭니다. 노화, 즉 나이 들어감, 은 성장기를 지난 저도 쓸 수 있는 화두니까요.
대신 노년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누구나 겪게 될 노년을 직시하면서 쓴 글들 앞에서 노년에 대해 제가 짐작하여 쓴 글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요. 그래서 제가 읽은 노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노화에 관해 생각해 보려 합니다.
2.
노년을 다룬 소설 중에 제가 보았을 때 가장 자주 인용되는 작품은 필립 로스(Philip Roth)의 에브리맨이 있습니다. 1933년에 태어난 미국의 대표적인 이 작가가 2006년에 출간한 책이니 언제 쓰기 시작했는지 찾아보지 않았지만 최소한 노년에 출간한 책이라 확신할 수 있습니다.
에브리맨에서 주인공이 겪는 노년은 쇠락하는 몸과 외로움을 견디는 일입니다.
아, 주인공과 주인공의 아버지는 '그'와 '아버지'입니다. 소설 속의 장치들이 참 정교하달까요. 이름이 없다는 점에서 "에브리맨, 모두"가 겪는 노년의 보편성을 보여줍니다.
그의 육체에 가해지는 위기는 9살 때의 탈장, 30대의 충수염, 65세의 관상동맥 수술입니다. 9살 때 탈장으로 입원했을 때에는 같은 병실의 다른 소년이 죽음을 맞이하고, 충수염은 그의 막내 삼촌을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면서 그의 아버지와 그가 극복해 낸 병입니다. 관상동맥 질환은 두 번째 수술에서 그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병입니다.
그의 쇠락은 아버지, 그가 가르쳤던 미술 수업의 학생인 밀리선트 등 그의 주변인들의 쇠락과 중첩되어 아래의 말이 진실이라고 강조합니다.
"이제 죽음을 피하는 것이 그의 삶에서 중심적인 일이 되었고 육체의 쇠퇴가 그의 이야기의 전부가 되었다.(P76)"
그가 놓쳐버린 것은 육체의 활기만은 아닙니다. 세 번의 이혼과 결혼을 하면서, 특히 외도로 인해 두 번째 아내와 딸을 떠난 이후부터, 가족들과도 멀어집니다. 이 때문에 그는 손자들과 가족의 존재에서 자신의 근거를 찾는 다른 노인들과 어울릴 수 없습니다. 그의 일상은 "긴 저녁의 외로움 때문에 아들에게 전화하고 싶은 유혹에 굴복하고 나면, 그 뒤에는 늘 슬픔이 찾아(p98)"오는 지경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삶의 마지막을 살아내는 방식은 견디는 것입니다. 그가 이혼하면서 딸에게 작은 소리로 이야기해 준 말처럼 말입니다. "그냥 오는 대로 받아들여. 버티고 서서 오는 대로 받아들여라. 다른 방법이 없어.(p.83)"
동시에 그는 후회합니다. "한때는 나도 완전한 인간이었는데.(p.135)"라고요. 힘이 있었고, 가족이 있었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완전하게 살아낸 삶이라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데, 후회는 그의 잘못이었다기보다는 숙명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시간이 삶의 많은 것을 가져간다 것의 보편성은 그도 느끼고, 연민합니다. "그가 긴 직장 생활 동안 사귄 모든 사람의 괴로운 사투를 알았다면, 각각의 사람들의 후회와 상실과 인내가 담긴, 공포와 공황과 고립과 두려움이 담긴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알았다면, 이제 그들이 떠나야 할 것, 한때 그들에게 생명과도 같았던 그 모든 것을 알았다면, 그들이 체계적으로 파괴되어 가는 과정을 알았다면, 그는 하루 종일, 또 밤늦도록 계속 전화기를 붙들고, 전화를 적어도 수백 통은 해야 했을 것이다. 노년은 전투가 아니다. 노년은 대학살이다.(p.162)"
3.
노년을 짐작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노화는 '에브리맨' 중 하나인 저에게도 일어나고 있는 일이니까요.
제가 생각하는 노화, 나이 들어감은 가능성을 역사로 바꾸어 가는 일입니다. 매일 저는 사소한 선택들을 하고 시간은 그 선택들에 이어지는 결과들을 가져옵니다.
에브리맨의 주인공은 가족이라는 틀이 답답하다고 생각하며 외도를 합니다. 하지만 노년의 그에게는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존재했던 사람들 간의 연대가 절실합니다. 아마도 젊음에 도취되지 않고 삶의 가치를 정립했다면 덜 후회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살아 낸 시간이 길수록 제 삶의 이야기도 확정되어 갈 것입니다. 노년의 제가 납득할 수 있는 선택이란 무엇인지 한 번 더 생각하면서 살아가다 보면 저도 어쩔 수 없이 많은 것을 잃더라도, 그래도 더 행복한, 그리고 견뎌낼 만한 노년에 가깝게 나이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