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에세이] 나와는 다른 삶을 살기를
어렸을 적 나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5살 때 차량비와 원복까지 아끼겠다고 15분 거리의 어린이집에 홀로 다른 옷을 입고 걸어 다녔다. 처음 다닌 그 어린이집은 몇 달 다니다가 원비가 밀려서 도망치듯 그만뒀다. 그 이후 집에서 기본적인 교육을 가르치려 하셨지만 지금처럼 육아나 교육에 대한 정보가 흔치 않았기에 그 또한 어려운 일이었다. 할머니 손에 자란 나는 더욱 또래들과 격차가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실 때면, 혼자 있는 5살 아이의 안전을 위해 우리 집 단칸방 문을 밖에서 자물쇠로 잠가 몇 시간 동안 화장실을 참으며 버텨야 했다. 그렇게 나는 집에서 방치되고 유일한 친구인 티비를 보면서 스스로 세상을 깨쳤다.
이후 친척과 함께 살게 되면서 나의 상태를 보고는 이 나이가 되도록 아는 게 없으면 어떡하냐며 혼을 내셨다. 내가 공부를 안 한 게 아니라 못한 것인데 방치됐던 내가 피해자가 됐다. 보다 못한 친척분이 직접 가르치시려 할 땐 어른 방식으로 공부를 주입하려다 보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에게 옥스퍼드 사전을 통으로 외우라 하는 건 말이 안 되는 일 아닌가. 소화하지 못하는 내가 또다시 죄인이 되어 매일 혼나기 바빴다.
그렇게 공부는 나에게 치가 떨리게 싫은 존재가 되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선 완전히 격차가 벌어져 도대체 선생님이 무슨 소리 하시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원래 언어 능력과 사회 관련 지식은 어렸을 때부터 조금 있었던지라 국어와 사회만이 나의 성적 평균을 높여주었다. 사회 시간엔 자고 일어나도 100점일 때가 있었는데, 나머지 시간의 학교는 나에게 지옥과도 같았다. 머리가 크고는 이런 나를 이해 못 하는 부모님께 두들겨 맞지 않기 위해서 성적표를 위조했다. 위기 상황을 순간순간 무마해가며 생존을 이어갔던 기억이 또렷하다.
중학교에 가서 수행평가 기본 점수 4점을 제외하곤 점수를 아예 받지 못한 전교 꼴찌가 되었다. 찍어도 0점 맞기는 힘든데 아무래도 백지를 냈던 것 같다. 수학 선생님은 나를 출석부에서 빼고 부르며 학생 취급을 안 하셨고, 영어 선생님은 문제 나오면 제발 ing만 붙여서 써달라고 부탁하셨다. 그런 관심이 싫지는 않았다. 가정에서 받지 못한 애정을 선생님을 통해 채워보려는 욕구가 있어서 나름 열심히 ing를 외웠다. 슬프게도 나는 make의 동명사를 적으라는데 making이 아닌 makeing을 적었다. 하라는 대로 했는데 틀려서 선생님이 무척이나 원망스러웠다.
더 이상 이렇게 살아선 안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나를 붙잡아준 동기는 성적표였다. 몇 년 동안 갈고닦은 실력으로 성적표 위조엔 전교 1등이었는데 사춘기가 다가오며 회의감이 든 것이다. 이젠 진짜 성적표를 집에 드리고 싶었다. 나의 성적표로 더 이상 폭력이 오가지 않게 하고 싶었다.
운이 좋게 학교 복지실을 통해 좋은 인연들을 만나 공부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 처음엔 공부라는 게 뭔질 몰랐으니까 딴짓하기 바쁘고 말썽도 많이 부렸지만 차차 적응이 되고선 중학교 2학년인데 수험생처럼 공부했다. 원래 공부 습관 자체가 안 잡혀있던 터라 엉덩이를 10분 이상 붙이고 앉아 있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격차를 위해선 하루 10시간 앉아서 공부해도 부족했다. 이 악물고 눈물을 훔치며 공부했다.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말씀하시는 내용들을 다 받아 적으며 머리가 깨질 때까지 외우자는 마음으로 나를 채찍질했다. 농담은 물론 모든 것을 달달 외워서 시험 봤고 결국 나는 공부하기 전 성적을 포함해서도 전교 5% 이내의 성적을 가지고 중학교를 졸업한다.
성적이 올라가니 주변 친구들이 바뀌고 나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 미래가 생기고 고등학교, 대학교 진학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외고와 자사고 중 고민하다 자기주도학습을 하고 싶었던 나는 자율형 사립고 진학을 한다. 커리큘럼 자체가 우리나라에서 찾아보기 힘들고 정말 자율성이 중시되는 분위기라 끌렸다. 하지만 중3 담임선생님은 나를 뜯어말리셨다. "거기는 돈이 정말 많은 애들이 가는 데라 네가 가면 힘들 거야."
'왜? 왜지? 여태까지 돈 없는데 나 이렇게 열심히 공부해서 올라왔는데 가서도 그렇게 하면 되는 거 아니야?' 막연히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 학교는 서울 전체에서 전교권에 놀던 범생이들이 모인 곳이다. 나는 밑바닥을 길 수밖에 없었다. 달에 200만 원씩 줘가며 과외 받는 아이들과 어떻게 비교가 될까. 내신은 포기하고 수능에만 전념했다. 날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공부에 나름의 타협점을 찾아갔다. 생활비를 벌겠다고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공부하면서 수면시간 4시간으로 버텼다. 그래야 삶이 달라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야속하게도 또다시 돈 때문에 길이 막혀버린다. 등록금 납입 기간 안에 등록금을 못 내서 대학 입학이 취소됐다. 모든 걸 포기하고 취직을 하겠다는 나에게 할머니와 아빠는 기초생활수급자 지원이 끊기니 회사 말고 편의점에서 12시간씩 일하라는 망언을 던졌다. 그렇게 나는 친정과 등을 지고 나와 나의 삶을 살게 된다.
살아왔던 삶을 보니 유아기부터 공부습관이 잡혀있었다면 이 모든 인생이 달라졌을까 싶었다. 그랬다면 어찌할 바를 몰라 방황하고 헤매던 시간이 단축됐을까? 나름 노력한다고 노력했는데 정점을 찍으면 나락으로 떨어지고, 다른 사람은 안전대라도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콘크리트 시멘트 바닥에 그냥 놔뒹굴어졌다. 충격을 그대로 다 흡수하는 삶이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적어도 나의 아이만큼은 나같이 살게 하지 않을 거라고. 남들만큼은 못해줘도 영상으로 아이들이 스스로 깨달을 거라며 방치하는 부모나, 공부는 자기가 하는 거라고 손을 놓는다거나, 과정은 못 보고 결과에만 집중하는 부모가 되지 않겠다고 단언했다.
아무것도 없던 내가 환경을 이겨내며 이뤄냈던 성취감을 잊지 못한다. 아이들에게 그 맛을 보여주고 싶다. 그런 성취감과 자신감은 오로지 자기주도학습에서만 나온다. 비싼 사교육을 보내면 성적은 잘 나오겠지만, 맨땅을 직접 일궈 농사짓고 수확한 열매와는 차원이 다르다. 또한 누군가의 도움 없이 스스로 단단히 쌓아간 제방만이 재해가 닥쳤을 때도 살아남을 수 있다. 과연 돈 주고 자기주도 학습 시켜달라고 학원에 보내는 게 자기주도 학습이 맞을까?
아직 나도 나의 경험을 제외하곤 홈스쿨링과 자기주도학습에 대해 아는 게 많지 않다.
그렇지만 적어도 아이들에게 공부는 일상이고, 재미임을 알게 해주고 싶어서 최대한 엄마표 수업을 하고자 노력 중이다.
나의 손길로 부족한 순간이 분명 오겠지만, 그전까지라도 아이의 마음을 가장 잘 아는 건 엄마이기에 마음의 양식을 채워주며 스스로 발돋움할 수 있게 도와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