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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처음 느낌 그대로 Aug 19. 2023

인간이 싫다

"아무래도 우린 인혐 걸린 것 같아."


친구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불경한 표현은 쓰지 않아야 하지만 때론 저급한 표현이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 더없이 적확하다. 예를 들어 욕설. 비속어를 쓰면 안 되지만 비속어가 입 밖으로 절로 튀어나오는 상황이 있다. 비속어를 써야만 내 마음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순간도 있는 것이다. 오죽하면 소설 마션의 첫 문장이 '아무래도 좆됐다'이겠는가. 그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는 인혐에 걸렸다. 인혐이 뭐냐고......? 막상 설명하려니 망설여진다.


인혐은 인간 혐오의 준말이다. 우리는 왜 인간 혐오에 걸렸을까. 핑계를 대보자면 너무 오래 사람을 상대하는 일을 하다 보니 인간을 싫어하게 된 것이다. 아니, 인간을 싫어한다기보다는 인간의 이기심을 혐오한다. 친구는 중학생 때부터 부모님이 운영하고 계신 카페 일을 도왔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옷 가게까지 도맡아서 하게 됐다. 가끔 친구가 일하고 있는 카페에 놀러 가면 미처 몰랐던 친구의 다른 면을 보곤 했었다. 손님이 없어 한적할 땐 나와 웃고 떠들다가도 손님이 오면 바로 자본주의 말투로 바뀌어 신기했었다. 카페 구석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고 있는 내게 가끔 와서 미안하다고 말할 땐 내가 아는 친구의 모습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사회적 가면을 능숙히 쓰는 친구를 대단하다 여겼다. 이렇게 능숙해지기까지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까 싶기도 했다. 친구가 말은 안 했지만 별의별 일을 다 겪었을 것이다.


나도 서비스직에서 일한 지 8년 차가 됐다. 8년 전과 비교해 지금 얼마나 달라졌는지 생각해 본다. 나는 대학생 때부터 병원에서 일하기 시작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땐 정말 '순진'했다. 처음으로 내가 맡았던 업무는 환자 진료 예약 상담이었다. 상담 교육을 받았어도 별로 아는 게 없다 보니 무조건 친절하게만 하자고 마음먹었었다. 내가 친절하게 대한다면 상대방도 친절할 거라 생각했었다. 물론 착각이었다.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상대하는 건 절대 쉽지 않았다. 환자나 환자의 보호자를 응대하다 보면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감정에 휩쓸리게 된다. 욕을 먹는 것도 자주 있는 일이었다. 그땐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웠었다. 직장에서 있었던 부정적인 감정을 집까지 끌어안고 왔다. 애꿎은 가족들에게 짜증을 내는 일도 있었다. 가족들에겐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걸 알지만 감정의 배출구가 필요했던 나에게 그것 말고 딱히 방법이 없었다.


언젠가는 친절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있었다. 내가 친절하면 상대방도 친절할 거라는 가정은 잘못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비스직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이 친절하지 않다면 그것 또한 잘못됐다. 그렇다면 나를 어디에 위치시켜야 할 것인가. 약 8년간 병원 밥을 먹으면서 고민한 결과, 친절하지도 안 친절하지도 않은 직원이 되기로 했다. 좋든 싫든 직장에서 8시간을 보내려면 그날 쓸 에너지를 균등하게 분배해야 한다. 누구를 특별히 친절하게 대할 필요도, 불친절하게 대할 필요도 없다. 내일 또 일하려면 오늘 내가 쓸 감정을 적절히 분배해야 한다. 친절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나를 보고 있자면, 학생 때 상상한 직장인의 이미지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이었나를 깨닫게 된다. 물론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넓고 넓은 땅에, 내가 매일 출근할 자리 하나 마땅치 않다는 게 슬프기만 했었으니까. 그리하여 어디라도 나를 받아준다면 열과 성을 다할 거라는 다짐뿐이었다. 8년이 지난 지금 내 모습을 8년 전 내가 본다면 환멸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때의 초심과는 상당히 멀어졌지만, 어쨌든 지금의 내가 진짜 나다.


친구에게 옷 가게에서 일할 때 가장 싫은 순간이 언제냐고 물었다. 친구는 사지도 않을 거면서 옷을 다 뒤적거려 진열 상태를 엉망으로 만드는 손님이 제일 싫다고 말했다. 옷 가게에서 일해본 적이 없는 나는 옷 가게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사실 손님 입장에서 보면 옷을 얼마나 입어 보든 옷을 사든 말든 손님의 자유지만, 매장 주인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번거로울까 싶어서 그 입장 또한 이해가 된다.


친구가 나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하기에 그 당시에 있었던 가장 어이없었던 일에 대해서 말했다. 진료를 보고 진단서를 받아 갔는데, 며칠 뒤 진단서가 필요 없다며 진단서 비용을 환불해 달라고 온 환자가 있었다. 그 사람의 주장은 진단서가 필요한지 안 필요한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진단서를 발급해 갔기 때문에 환불해 주는 게 맞다는 거였다. 병원 밥을 8년 정도 먹다 보니 이제는 환자나 보호자가 무슨 말을 해도 그 말에 어떻게 응대해야 할지를 알고 있다. 그런데 이런 어이없고 참신한 개소리는 처음이었다. 우선 진단서 필요 여부를 의료진이 물어보지 않았냐고 말했다. 그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화를 냈다. 뭐, 예상했던 바다. 다음으로 한 번 직인이 찍혀서 나간 서류는 반납이 안 된다고 하자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다. 이 정도 안내로 물러설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진단서 비용 2만 원을 위해 굳이 시간 내서 병원까지 온 걸 보면 이 사람은 작정한 거였다. 나는 그에게 더 이상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더 이상 환자분께 안내할 부분이 없으니 고객상담실에 민원을 내시라 했다. 내 이름을 알려달라고 하는 그였다. 내 이름을 지어주신 할아버지께서 이딴 인간에게 내 이름을 알려준 걸 아시면 매우 슬퍼하실 거다. 물론 이런 어이없는 상황을 매일 겪는 건 아니다. 가끔씩 이런 상황에 처할 때마다 인간에 대한 환멸을 느끼곤 한다. 대체 인간이란 무엇일까. 인간은 왜 이기적일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이야기를 하자 친구가 나보다 더 흥분하며 화를 냈다. 아마 친구도 옷을 파는 일을 하기에 돈과 관련된 비슷한 일을 겪었을 거였다. 친구에겐 어떤 일을 있었던 걸까 궁금했지만 친구의 화에 더 이상 장작을 넣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우린 인혐 걸린 것 같아."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때 인간은 선한 존재라 믿었지만 그건 너무 순진한 생각이었다. 그 사람이 어떤 상황에 처하냐에 따라 불쌍한 인간으로 전락하기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직장에서 인간의 선함을 접하게 되리라는 기대를 접었다.


요즘도 가끔씩 인간에 대한 환멸로 마음고생을 할 때가 있다. 퇴근하고 나서도 그 일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이런 걸 보면 아직 프로 직장인이 되기엔 한참 멀었구나 싶다. 언제쯤 무슨 일을 겪어도 아무렇지도 않은 상태가 될 수 있을까. 그런 상태에 도달할 수나 있을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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