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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in Jun 12. 2021

심장이 전하는 말

연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배우 윤나무

10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배우 윤나무에게 여전히 무대는 심장이 울리는 공간이다.



지난 2019년 우란문화재단 우란2경에서 진행된 모노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가 2년의 시간을 넘어 국립정동극장 무대에 다시 오른다. 작품은 ‘장기 기증’ 소재를 기증자와 수혜자의 이야기로만 그리지 않고, 장기 기증 과정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의 사소하고 평범한 일상에 집중한다. 1인극인 만큼 배우 개인의 몫에 무게가 실리는 작품이며, 지난 시즌에 함께한 윤나무와 손상규가 변함없이 참여한다. 삶과 죽음이라는 이분법적인 해석이 아닌,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 초점을 맞추어 초연 당시 전회차 전석 매진을 기록한 바. 호평 속에 막을 내린 작품이기에 재연을 향한 관심도 뜨겁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공연장뿐인 듯 하나, 윤나무는 관객들이 이전과 다른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 자신 있게 말한다. 시간과 함께 걸어온 개개인의 경험이 작품을 색다르게 만들 것이라고. 올해 데뷔 10주년을 맞이한 그 역시 시간이 변함에 따라 시각이 변함을 가장 가까이 느끼는 사람이었다.


올 하반기에 방영 예정인 SBS 드라마 <지금 헤어지는 중입니다> 촬영과 공연 연습을 병행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그 어느 때보다 바쁠 것 같아요.

이전에도 드라마 촬영과 공연을 병행한 적이 몇 번 있었어요. <낭만닥터 김사부2> 촬영도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초연과 겹쳤죠. 처음에는 두 가지를 병행하는 것이 부담이 되곤 했는데, 이제는 어느 정도 노하우가 생겼어요. 잘 분리해 각 영역에서 집중하고 있습니다.


초연은 티켓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잖아요. 재연 역시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더라고요.

작품 복이 있는 것 같아요. 좋은 작품을 하니까 이런 호사도 누려보는 게 아닌가.(웃음) 초연 당시 손상규 형님하고 작업하면서 고민도 많이 하고 촘촘하게 그려냈거든요. 그때는 이게 과연 뚜껑을 열었을 때 괜찮을까 라는 생각을 했는데, 생각보다 너무 좋았죠. 과정도 좋았고, 결과도 좋았고,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어요. 그런데 개인적으로 초연은 공연 회차가 적어서 아쉬움이 있었어요. 이번에는 조금 더 긴 시간 동안 관객과 만날 수 있으니 다양한 분들과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어요.


지난 인터뷰에서 ‘작품 재참여를 결정하는 것은 못다 한 이야기가 있을 때’라고 했는데, 이번 작품도 못다 한 이야기가 있나요?

못다 한 이야기라기보다 지난 시즌에서 관객분들이 눈치채지 못한 틈을 메꾸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원작 소설도 방대하고, 공연 대본도 방대한데 그걸 온전히 혼자서 해내는 미션은 배우로서 욕심나는 일이잖아요. 또 초연 이후 약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관객 분들도 그 사이에 달라졌을 것이고, 느끼는 바도 다를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팬데믹 사태 속에서 공연이 가지는 의미도 있을 거고요. 이번에는 그런 다양한 이야기를 무대에서 나눠보고 싶어요.


배우의 입장에서 2년 사이 변화한 것들이 있다면요?

작품 자체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지만, 팬데믹으로 상황이 급격하게 변화하면서 작품에 참여하는 마음가짐이 달라진 것 같아요. 관객분들이 공연을 보면서 각박한 현실을 해소할 수 있으면 좋겠거든요. 제가 하는 공연이나 연기를 통해 힘과 응원을 얻어간다면 너무 좋은 일이 아닐까요.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는 어떤 작품인가요?

작품은 뇌사 판정을 받은 ‘시몽 랭브르’라는 19세 소년이 24시간 동안 세상에 선물을 주고 가는 이야기를 담았어요. 각자의 심장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삶의 의미, 의지 등을 찾을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란문화재단에서 진행한 지난 시즌에 비해 무대가 굉장히 커졌어요. 이전만큼 구현될까 하는 우려도 있거든요.

제가 <김주원의 사군자_생의 계절>로 국립정동극장에 서본 바 있기 때문에 무대가 얼마나 광활한지 알아요. 연출님과 스태프분들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고 있거든요. 무대가 커짐으로써 우리에게 유리한 것은 무엇인가, 초연보다 더 큰 감동을 전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나 등.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고 있어요. 최대한 소외받는 객석이 없게 만들어 공연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전하려고 하죠. 그래도 다행인 점은 저희가 초연 때보다는 어느 정도 텍스트에 젖어 있다는 거예요. 무대 동선이나 연출은 테크니컬한 문제이니 그 부분을 어떻게 하면 더 발전시킬 수 있을지 면밀하게 고민하고 있어요.


무대가 커지면서 유리해진 부분은 찾았나요?

제가 관객 입장에 선다면 스펙터클한 부분이 더 크게 느껴지지 않을까 싶어요. 파도나 서핑하는 장면들이 웅장하게 다가오겠죠. 그리고 관객 간의 연대가 더 커질 것 같아요. 한 사람이 연기하고 있는 공연에 집중하다 보면 관객분들 사이에서도 연결 고리가 생기거든요. 관객 수가 많아졌으니 더 많은 연결들이 생겨날 것이라 생각해요. 무엇보다 이 공연은 관객 각자가 가진 심장이 너무 중요해요. ‘시몽 랭브르’의 심장이 뛸 때 관객의 심장이 함께 뛰면서 무대와 객석이 소통하죠. 그러니 배우의 입장에서는 관객분들과 소통하고 공유할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많아질 거예요. 또 극장 근처가 정말 예쁘거든요. 이건 확실하게 성수동보다 유리하겠네요.(웃음)


이야기 전개는 시간에 따라 진행되어요. 무대 뒤편에 자리한 시계도 인상 깊은 장치 중 하나고요. 작품에 등장하는 시간 중 가장 인상 깊은 시간은 언제인가요?

서핑하는 시간이요. 도입부에 있는 장면인데, ‘시몽 랭브르’의 심장이 환희에 다다른 시간이거든요. 참 설레고 뭉클하죠. 바다를 사랑하던 친구가 바다에 맞닿아 있는 그 순간은 너무 기뻐서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아요. 그리고 그의 심장이 세상 밖으로 나와서 다른 이의 몸에 들어가는 시간. 문장으로 정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겠지만, 눈에 보이지 않던 인간의 잠재력이 보이는 순간이어서 정말 좋아해요.


1인극이기 때문에 방대한 대사를 혼자서 감당해야 하잖아요. 서술 구조도 많은 작품이고요. 한 사람이 표현할 수 있는 인물의 수가 한정적이기 때문에 자칫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텐데, 이런 부분을 피하기 위해 노력한 부분이 있다면요?

일단 서술자는 다른 누군가가 아닌 ‘윤나무’ 저 자신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인물 한 명 한 명을 만난다는 생각으로 연기하거든요. 초연 때는 연습하면서 헤매기도 했는데, 감을 잡기 시작한 게 저를 중심으로 잡으면서부터예요. 또 앞서 제가 연극 <오만과 편견>을 했는데, 배역으로서 서술하는 부분들이 많았어요. 배역의 감정이 들어가다 보니 관객들에게 더 잘 전달됐죠. 이걸 가져오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저라는 사람이 배역을 만날 수도 있고, 배역 스스로 내레이션을 할 수도 있는 거죠. 이제는 노하우가 생겨서 최대한 지루하지 않게끔 본능적으로 스위치를 조절하고 있어요.


지난 시즌도 그렇지만 현재 두 작품을 동시에 하고 있는 셈인데, 원래도 암기력이 좋은 편인가요?

암기력이 좋은 편이긴 한데, 한동안은 글자 보기가 싫었어요.(웃음) 초연을 하고 나서 번아웃 비슷한 게 왔거든요. 너무 많은 글을 읽은 거죠. <오만과 편견> 무대에 설 때도 소설을 달고 살고 대본도 방대했는데, 여기 와서 또 소설을 들여다보고 있는 거예요. 심지어 프랑스 원어 버전과 영문 버전 등 다양한 버전을 다 읽었죠. <오만과 편견>도 출판사 별로 번역이 달라서 다 읽었거든요. 그러다 보니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순간들이 많았어요. 딱 공연이 끝났을 때 멍해지더라고요. 한 달 동안 촬영용 대본 말고는 따로 독서를 안 한 것 같아요.


지금 가장 떠오르는 대사는 무엇인가요?

“무엇보다 그 사람, 혹은 그 사람의 가족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할 수 없을 테니까요. 그런 생각들이 그녀 주위를 떠나지 않습니다.” ‘시몽 랭브르’의 심장을 받는 인물의 대사예요. 재연 준비를 하면서 이 대사가 가슴에 꽂히더라고요. 제가 만약 그 상황이었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최근에 지인의 아버지께서 심장 이식 수술을 받으셨는데, 아버지가 생일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날이 심장을 받은 날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유를 물으니까 누구의 심장인지 알 수 없어 감사와 고마움을 전할 수 없으니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이 이야기가 작품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앞서 말한 대사가 머릿속을 떠나질 않네요.


장기 기증에 대한 평소 생각은 어땠나요?

작품을 처음 만났을 때 운명이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어요. 이미 저희 어머니께서 장기 기증 신청을 한 상태셨거든요. 장기 기증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죠. 저도 만약 ‘시몽 랭브르’의 상황에 놓인다면 기꺼이 내어주지 않을까.


미디어에서 주로 장기 기증을 숭고하고 헌신적인 희생으로 그려내는데,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는 기증 절차에 얽힌 인물들의 평범한 삶에 더 집중하고 있어서 신선하게 다가오더군요.

프랑스 소설이 원작이다 보니 프랑스 감성이 많이 담겨 있어 되게 쿨해요. 장기 기증을 신파 요소로 그려낼 수도 있는데, 어떠한 감정에 젖어 있는 사람이 많이 없는 거예요. 그저 24시간에 속하는 시간을 살고 있죠. 각자의 삶이 보이는 작품이기 때문에 무언가를 더할 필요도 없고, 덜 필요도 없어요. 상황에 따라 정확하게 표현하기만 하면 되죠. 그래서 더 신선하게 다가가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배우 입장에서도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하기보다 상황 자체를 전달하는 게 더 중요하겠네요.

모두가 각자 다른 심장을 갖고 있으니, 저희가 나서서 어떠한 메시지를 주려고 할 필요가 없어요. 그저 심장이 느끼는 메시지가 중요하죠. 마지막 장면을 보면 여러 인물의 시간에 대해 계속 이야기해요. 수술방을 치우는 사람도 있고, 밥을 먹으러 가는 사람, 지하철을 타러 가는 사람도 있어요. 관객분들도 공연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순간 ‘나는 어떤 시간을 살고 있지?’라는 생각을 한 번 해보셨으면 합니다.


윤나무 배우에게 1인극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지금 피부에 닿는 대답은 시작부터 끝까지 한 작품, 한 공연, 한 프로젝트를 잘 마무리할 수 있다는 성취감이 크다는 거예요. 사실 1인극은 이순재 선생님, 신구 선생님처럼 인생을 어느 정도 통달하신 분들만 하는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아직까지는 1인극 자체에 큰 의미를 담고 있지는 않아요. 아마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면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1인극이 되게 의미 있던 거였네.’하고요.


1인극은 배우들의 로망이지 않나요?

그러게요. 지금 김주헌 형하고 드라마 촬영을 같이 하고 있는데, 어제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야, 모노극(1인극)은 배우의 로망이고 끝 아니냐.”(웃음) 그런데 저는 아닌 것 같아요. 지금은 어떻게 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분들 한 명도 놓치지 않고 공연에 참여시킬 수 있을까, 같이 만들 수 있을까 그런 생각만 해요. 그러려면 제가 잘해야 하고, 연습도 열심히 해야 하죠.


배우로 활동한지도 벌써 10년이 되었잖아요.

저도 얼마 전에 알았어요. 그동안 너무 정신없이 살아왔던 것 같아요. 특히 데뷔하고 한 5년은 20 작품 정도를 쉬지 않고 했어요. 이후 5년은 조금 숨 고르기를 하자는 생각을 가졌죠. 하지만 정신없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그래도 허투루 살지는 않았구나 싶어요. 앞으로의 시간들이 훨씬 기대되기도 하고요. 제 나 이대에 맞는 역할들을 다양하게 하고 싶고, 새로운 것에 계속 도전하고 싶어요.


데뷔 후 1년은 본명으로 활동하고 9년은 ‘윤나무’라는 예명으로 살아왔죠. 이제는 예명이 더 친숙할 것 같아요.

지금은 스며들었죠. 한 2, 3년 동안은 적응을 못했어요. “나무야.” 하고 부르면 한참 있다가 그제야 대답하고 그랬거든요. 28년을 김태훈으로 살다가 윤나무로 살아가려고 마음먹었을 때, ‘어떻게든 뿌리를 잘 내려서 괜찮은 나무가 되자. 그리고 연기라는 그늘 아래 관객들이 조금이나마 힘을 느낄 수 있게 하자.’ 이런 의미가 생기더라고요. 처음부터 어떤 의미를 가지고 예명을 지은 건 아니지만, 10년을 보내면서 그런 생각이 들어요. 지금은 주변에서 다들 본명인 줄 알아요. 파평 윤 씨냐고 물어보고. 처음에는 예명이라고 해명했는데, 이제는 그냥 웃어넘겨요.


10년 동안 뿌리내린 윤나무라는 그늘 아래서 관객들이 많이 쉬어 가는 것 같나요?

보러 오시는 분들의 생각이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저는 꾸준히 다양한 이야기를 가지고 관객들과 만나려고 노력했죠. 하지만 노력에 대한 대가를 바란 건 아니에요. 그냥 관객분들 하고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동안 너무 과분하게도 다양한 작품들을 선택하면서 살아왔는데, 헛되게 느껴지는 시간들은 아니었거든요. 또 감사하게도 매번 보러 와주시는 분들이 있어서 공연이 완성됐고요. 앞으로도 우리 잘해봐요!


나무가 잘 자라려면 물과 양분이 필요하잖아요. 연기를 계속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관객분들이죠. 저는 굉장히 복 받은 시대를 살고 있는 것 같아요. 다양한 공연들이 활발하게 올라오는 시대니까요. 그만큼 관객들에게 더 많이 나눠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그래서 대본 선택하는 것도 점점 까다로워지고, 양질의 공연을 보여드리고 싶다는 욕망도 생겨요. 어떤 분들은 드라마 활동을 하면서 무대 활동이 뜸해진다고 할 수 있는데, 이전에 했던 역할보다 새로운 걸 더 보여드리고 싶어서 신중해지는 것 같아요. 또 무대 위에서 관객과 소통하면서 제 자신이 성장하는 부분이 분명히 있거든요. 꽤 괜찮은 사람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구나 라는 생각도 들고요. 그것도 원동력이라면 원동력이겠네요. 여담으로 <오만과 편견>을 같이 했던 김지현 누나가 “우리 잘 늙어가자.”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저는 그저 누나를 쫓아가는 입장이지만.(웃음) 멋있게 늙어 갈 수 있다면 참 좋겠죠.


끝으로 ‘시몽 랭브르’에게 마지막을 선고하는 시각이 있었던 것처럼, 스스로에게 마지막이 될 시각을 정할 수 있다면 몇 시, 몇 분, 몇 초였으면 하나요?

공연이 시작되는 5시 49분 59초요. 작품 내에서 마지막이기도 하고, 시작이기도 한 시각이에요. 지금의 저는 그때가 좋을 것 같습니다.



*해당 인터뷰는 공연문화월간지 시어터플러스 2021년 6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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