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를 읽는 저녁
제주의 밤은 길고, 지나치게 어둡다.
사계리에서의 한 달, 시간이 너무 빠르다.
루틴이 생겼지만 여전히 생경한 것 투성이인 시골 마을.
저녁 어스름 위로 달이 차오는 배경을 등지고 집으로 걷다 보면, 어김 없이 색색으로 물드는 서쪽 하늘.
매일, 차이 나는 반복으로서의 일몰의 형식은 때때로 저녁 식탁의 쓸쓸함을 잊게 해주는 구실이 되곤 한다.
달력과 시계의 숫자보다 구름의 유형와 그날의 날씨, 해의 길이와 달의 모양으로 시간을 가늠하는 게 더 익숙하고 손쉬운 일과, 사계의 가을에는 사계절이 다 머물러 있다.
아침에는 볕이 뜨거워 서둘러 화단에 물을 주곤, 오후에는 집에서 책방까지 고작 오 분 거리를 걷는 데에도 목덜미가 땀으로 흥건해진다. 해가 지면 콧잔등이 시려 후리스나 패딩조끼 꺼내 입고, 새벽에는 모기와의 혈투로 자주 잠을 설치지만, 계절을 구획하는 것 자체가 부질 없게 느껴지는 길고 적막한 사계리의 한밤.
나는 사실 11월의 서울 날씨를 잘 견디지 못한다. 종말로 치닫는 것 같은 음습한 늦가을의 찬 공기를 몸서리치게 싫어한다. 본가에서 독립해 나와, 먹고 사는 문제로 스무 해 가깝게 이 집, 저 집, 별의 별 알바의 세계를 다 떠돌며, 곤할 때마다 스스로에게 했던 약속 중의 하나는, 뒷걸음질만으로도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내 속도로 걷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겠다는 다짐. 항상 잘 지키지는 못하지만, 마음 한켠에 깊이 새겨두곤 했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너무 행복한 사람들의 글을 읽는 것이 꽤 어려워져, 그제야 내 마음이 병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유예. 나는 절실하게 시간이 필요해졌고, 나를 돌봐야 했다. 나 자신과 화해해야 했으므로.
잘 쓰고 싶다는 욕구가 때로 너무 강해서 아무 것도 쓰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썼다 지웠다, 망설이고 머뭇대는 순간이 잦아질수록 죄의식에 사로잡혔지만, 아무래도 친숙해지지 않는 이 필연적 실패의 과정. 그럴 때는 그저 무엇이라도 읽었다. 뭐라도 읽는 편이 나를 조금 나답게 만들어주는 것 같아 조바심이 조금 사그라들기도 했다. 글쓰기는 나를 진창에 넣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지만, 항시 즐거운 유락만은 아니어서, 그럴 때는 그저 닥치고 읽을 뿐이다. 비생산적인 인간, 무용의 존재이길 자처할 때에만 비로소 자유로워질지도.. 문제적 인간, 바틀비의 그 유명한 선언처럼.
어제와 오늘, 카프카가 여동생 오틀라에게 쓴 편지 묶음집을 읽는데, 어쩐지 그 내용이 너무 강하게 전달되어 손 마디의 힘이 다 빠져나가 저려올 정도가 되었더랬다. (카프카의 세 여동생은 모두 아우슈비츠에서 삶을 마감했고, 막내 오틀라와는 비밀이 없을 정도로 가장 가까운 사이였다고 한다.)
전문의 내용은 이렇다.
"프라하, 1914년 7월 10일
오틀라, 지난 밤에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그래서 잠을 청하기 전에 서둘러서 몇 자 적어본다. 네가 엽서를 보내주어 절망적인 아침이 잠시나마 견딜 만했다. 그건 참된 접촉이지. 해서 네가 괜찮다면 기회가 닿을 때마다 계속 그렇게 하자꾸나. 정말 원하지 않는 일이지만 저녁에는 보통 늘 혼자 지내. 베를린에 가면 물론 네게 편지할게. 지금은 그 일과 나에 대해서 어떤 것도 확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계제가 아니야. 나는 말하는 것과 달리 쓰고, 생각하는 것과 달리 말하고, 생각해야 할 것과 달리 생각하고, 그러다 보면 끝을 모르는 어둠으로 한없이 빠져들게 돼."
연보에 의하면 1914년 7월은 카프카와 펠리체와의 약혼이 깨진 달이다. 편지에 언급된 '절망적인' '일'은 아마도 약혼이 파기된 것을 의미할 것이다.
카프카의 연보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시기는 1912-1914년(29-31세) 사이인데 가장 대표적인 작품들을 이 무렵에 쓰거나 출간했다. 그 중에서 1912년은 가장 스펙타클했던 연도인데, 이를 테면 '아메리카'의 초고를 썼고 '선고'를 비롯한 20편의 단편 소품들을 발표한 해, 평생의 절친이었던 브로트의 소개로 펠리체를 만난 해, 가족이 경영하는 석면공장, 특히 여공들의 열악한 작업환경에 크나큰 충격을 받았던 시기로 기록돼 있는데 공장의 감독직을 맡으라는 가족들의 의견과 충돌해 자살을 생각했다고도 알려진 해다. 그리고 '변신'을 탈고한 해이기도.
이듬해인 1913년은 키에르케고르에 탐독했다고 알려져 있고 1914년엔 펠리체와 정식으로 약혼했다가 한 달 만에 파혼, 바로 저 편지를 쓴 시점이다. 그리고 '소송'과 '유형지에서'를 썼던 해. (참고로 이듬해인 1915년에는 '변신'을 출판, 1917년에는 펠리체와의 두 번재 약혼을 진행하다가 각혈과 폐결핵 진단 등의 이유로 두 번째로 파혼했다.
각설하고, 짧은 편지 한 장에 실린 구구절절한 사연들을 짚어갈수록 감정이입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게, 평생을 신경쇠약에 시달리며 낙하운동만 하다 페결핵으로 생을 마감한 카프카의 나이, 나도 이제 그 나이가 되어버린 까닭이다. 그리고 하나 더.. 평생을 달아나려고 애썼지만 결국 벗어나지 못한 프라하의 중심부. 카프카는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할 계획까지 세웠지만 '끝내 프라하는 자신을 놓아주지 않았다고, 그 자신의 일기에 썼던 고백. 어디에든 가면 좋았지만 어디에도 갈 수 없었던 카프카는 그 자신의 존재론을 아무래도 주변부와 경계 위에 세웠을 것이다. 들뢰즈식으로 말하면 소수적 글쓰기, 소수의 문학.. 뭐 그런 것들이 중첩되어 지나치게 감정이입을 해버린 것 같다.
글은 길고, 조금 어두웠습니다. :)
2018.10.JeJ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