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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린 Dec 21. 2018

무소부재한 엄마의 임재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 어머니를 만들었다'고 한다.

오늘, 밤길이 지나치게 추웠다. 귀가 아리게 시려서 쫓기는 사람처럼 걸음이 빨라졌지만, 어째선지 집에 오는 길이 더 멀고 낯설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모자를 챙겨 나가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종종걸음으로 돌아왔다.

이 놈의 독감. 쉽게 잊히지 않는 나쁜 기억처럼 징그럽게 달라붙어 밤마다 괴롭힌다. 조금 과장을 보태면, 어제는 자다가 숨이 막혀 졸도할 뻔했다. 폐병 앓는 식민지 룸펜의 일과처럼 마른 기침을 토해내며 밤새 잠을 뒤척였다. 산소량이 부족했던지 오후까지 두통을 조금 앓았다. 다행히 저녁에는 친구들의 얼굴을 잠시 보았고, 보약 한 사발을 들이키듯 내 몫의 만두전골을 뚝딱 비워냈다. 오늘 같은 한파에도 내수동 만두집은 여전히 사람들로 넘쳐났다.


한밤 중에 돌아와, 지난번 엄마께서 택배로 보내주신 마지막 남은 배 하나를 꺼내 배숙을 만들었다. 역시나 함께 보내주신 꿀에 절인 생강차에 엄마의 죽마지우께서 손수 키운 토종꿀을 한 스푼을 더했다. 기관지에 이만큼 좋은 걸 아직 알지 못한 까닭이다. 뜨끈하고 몰캉한 배찜을 한 입 떠먹으며 여기에는 없지만 공기처럼 무소부재한 엄마의 임재(臨在)를 느낀다.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 어머니를 만들었다는 저 유명한 유대 속담을 떠올렸다. 수저로 한 번 뜰 때마다 자궁 속처럼 움푹 패인 배 속을 들여다보며, 나는 신의 침묵을 묵상하는 것이다.


어렸을 때 나는 불가지론자에 가까웠는데, 이제는 어디에서도 한때 불가지론자였다는 말조차 꺼내기 어렵게 되었다. 본회퍼는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체험이 아니라 믿음이라 했지만, 오늘 내게 너무 선명한 신의 현현. 루아흐 ruah, 숨결, 생명, 영.. 다채로운 성신의 이름을 하나씩 읊어본다. 성령 충만한 밤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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