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필수불가결

by 뿌글뿌글


뜨겁게 달아올랐던 날씨가 차갑게 식어버렸다. 분명 날씨가 적절했던 얼마 전들이 있었을텐데, 그 순간을 잊어버리고 두툼한 맨투맨 사이로 들어오는 한기를 비비며 투덜댔다.

“가을이 없어 가을이. 어제 여름이었는데 오늘 겨울이라니까.”

옆에서 동생은 맞다며, 이게 다 지구온난화 때문이라며, 어제 우리가 내다 버린 플라스틱들의 행방을 추측했다. 그렇게 둘이 깔깔 대며 웃다가 헤어지자마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부슬 부슬 흩날리던 빗방울은 이내 굵어지기 시작했고 하늘색 맨투맨에 선명한 도트 무늬가 찍히기 시작했다. 옆에서 나뭇가지들은 오는 겨울을 축하하듯 신나게 흔들리고 있었다. 더 이상의 걷기는 용납하지 않는 다는 듯 굵어지는 빗방울에 뛰기 시작했다. 20분거리를 15분도 안돼서 도착해버린 지역 최고의 slow walker.(동생은 10분만에 간다.) 얻어 걸린 기록에 내 자신을 뿌듯 해하며 음료를 시키고 자리에 앉았다. 근데 이번에는 또 더워 죽겠다. 15분전에 느꼈던 그 추위. 그건 허상이였나. 아님 간만에 뛰어서 그런가, 죽어버린 내 체력 때문인가. 온갖 이유를 머릿속에서 떠올리며 빗방울인지 땀인지 모를 국물(?)들을 닦아냈다. 내적친밀감이 빵빵하게 형성된 내 단골 카페 점원은 오늘도 친근한 미소를 내보이며 음료를 건냈다. 음료를 받아들고, 머리를 질끈 묶고, 시원하게 쭉쭉 들이 킨 후 주위를 살펴보니 이거 웬걸. 비는 물러가고 햇빛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 흔들리던 나뭇가지는 멍하게 서서 나뭇잎만 겨우 흔들고 있었다. 15분만 늦게 나올걸. 그럼 내가 걷는 소리를 배경 음악 삼아 이맘때 쯤 들어야 하는 김동률 노래를 들으며 가을과 겨울사이의 언저리를 천천히 느끼며 올 수 있었을텐데 말이야.

카페에 앉아 비어버린 잔을 빨대로 장난을 치며 주위를 둘러봤다. 카페 인테리어가 작년 이맘때 쯤과 비스무리하게 변해있었다. 창가에는 사장님에게 선택 받은 대추알만한 알전구들이 매달려있고 빛을 발하는 아기자기한 오너먼트들이 진열대에서 한껏 뽐내고 있었다. 아, 또 한 해가 지나갔구나. 어영부영 맞은 30살을 어영부영 떠나보내는구나.

그렇다. 시간은 늘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숫자에 많은 의미를 두는 나는 지나간 시간들을 아쉬워했다. 푸릇푸릇함에 취해 이것저것 담았던 꿈들을 하나 씩 버리며 보낸 지난 20대가 정확하게 그리고 날카롭게 나를 찔러왔다. 아쉬움은 후회가 되고 후회는 곧 우울감으로 번졌다. 괜한 생각으로 오늘의 하루를 망치는건가 싶을 때 쯤, 휴대폰이 울렸다. 15시가 되기 15분전쯤. 이 시각에 전화 오는 이는 딱 두 명 뿐이다. 고라니와 기린. 마음을 가다듬고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휴대폰 너머로 들리는 낭창한 목소리. 어둠의 기운이 저 멀리 사라진다.

내 지난했던 20대는 카페로 걸어왔던 다이나믹한 15분 같았다. 때로는 추위를 잊을 만큼의 따뜻함을 느끼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비를 만나기도 하고, 의도치 않게 뛰어야 하는 순간들도 있었고, 타이밍이 아쉬운 햇빛을 만나기도 했다. 그런 시간 속에서 나는 참 많이 변해있었다. 가치관도, 사고 하는 방식도, 표현하는 방식도. 10대때 만났던 친구들이 20대의 나를 적응 못했던 것도 어쩌면 당연했겠다. 시간이라는 길에는 빨간불이 없다. 추우면 추운대로, 더우면 더운대로 걸어가야한다. 그럼에도 변덕스러운 날씨가 무섭지 않은 이유는 항상성에 있다. 추우면 따뜻하게 만들어주고 더우면 시원하게 만들어주는 그런 기능. 그런 필수 불가결의 존재가 나에게도 있다.

앞서 말했던 고라니와 기린이다. 물론 가명이다. 새내기 시절에 만나 11년째 우정을 이어오고 있는 우리. 20대 내내 함께하며 서로가 서로의 곳곳에 자잘한 자국들을 남겼고 새로운 시간도 함께하기를 소망하는 친구들이다. 내 20대의 모든 곳에는 이들이 있었다. 물리적으로 늘 옆에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의 크고 작은 결정들과 새로이 성립된 가치관에는 이들의 의견이 들어가있다. 그러니 고라니와 기린은 슬프도록 아름다웠던 20대의 정체성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우리는 달랐고 같아졌다. 같지만 여전히 다르다.

10주년 기념으로 약속한 우정타투가 기린의 어마어마한 겁으로 무산되면서 새로운 기념을 하고 싶었다. 비록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없지만 우리만의 역사를 적어보는 것. 그건 우리의 20대를 기억하는 것과도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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