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에 썼던 글입니다
준비중독
들어가며
준비라는 것은 그 자체로 결과가 될 수 없다. 준비는 과정이다. 과정은 괴롭다. 무언가를 실질적으로 하고 있지 않은 상태라 그렇다. 집에서 나가기 위해 씻고 준비하는 과정만 해도 늘 생략하고 싶은데, 더 커다란 것을 준비하는 과정이 마냥 즐거울 리는 없다. ‘아직 살아있지 못하다’는 뜻의 ‘미생’처럼, 모든 준비는 그렇게 무언가 ‘덜 된 것’이다. 준비생의 삶은 설익은 밥 마냥 푸석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미생의 경우는 조금 낫다. 인턴이라도 하고 있으니까.
꿈도 희망도
나는 무언가를 열심히 하지만 무엇도 안 되는 수많은 사람을 보았다. 노력의 유무가 성공을 결정짓는다는 순수한 믿음은 이제 순진한 것이 되었다. 무엇이든 열심히 하면 그만이던 시절은 지났다. 우리 할머니 말을 빌리자면 “좋은 시절 다 갔다.” 이 문장은 남들이 삶의 호시절이라고 여기는 시절을 살고 있는 나 역시 반복하고 싶은 말이다.
뚜렷한 직업이라는 삶의 화두는 삶의 필수요소가 아닌 미덕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원하든 안 원하든 백 살까지 살지도 모르는데, 막막하고 막막하다. 금요일마다 거리에 욕망에 찬 불을 지르고 다니는 젊은이들의 속이 어떨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나, 혹은 나를 닮은 자들의 일상은 우울로 가득한 시트콤이다. 가장 가까이서 봐서 희극인 이 극은 줄곧 비극이 되려 한다. 자기 연민, 준비과정의 지난함, 모두 어떻게든 씻어내고 싶은 삶의 얼룩인데 도무지 지워지지 않는다. 기획의도와 내용의 괴리감 안에서 극은 뾰족한 하이라이트 없이 나아가기만 한다. 누가 이 재미없는 극에 관심을 가질 것인가.
할 수 있는 게 준비뿐
며칠 전 연기를 하는 언니를 오랜만에 만났다. 언니는 흔히 말하는 무명의 배우다. 내게는 유명하지만 내게만 유명하다. 항상 오디션 준비를 하는 언니는 이제는 뭐라도 되고 싶다고,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닌 자신의 위치가 견디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렇게 한 두 문장으로 요약해버리기 미안한, 깊은 진심이 느껴졌다.
또 얼마 전, 성우를 준비하며 학원에 다니는 내 친구도 이제는 뭐라도 되고 싶다고 말했다. 내 주변에 있는 두 사람이 바라는 것은 똑같다. 누군가 ‘걔 요즘 뭐해?’라고 했을 때 ‘아 걔? 걔는 뭐가 됐다’ 고 뚜렷하게 말할 수 있는 상태다. 나 역시 이하동문이다. 90년대 초반에 태어난 내 또래의 젊은이들이 바라는 것은 그렇게 소박해 보인다. 하지만 그 소박함은 사실 자신이 원한다고 해서 다다를 수 없기 때문에 어떠한 꿈보다 이루기 어려운 희망이 된다.
승자와 패자
이대로 가다간 평생 준비만 하다 죽어버리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모든 사람들이 준비를 하고 있다. 취업 준비, 창업 준비, 이직 준비, 공시 준비, 입시 준비, 편입 준비, 노후 준비, 오디션 준비, 공모전 준비, 연습생 기타 등등.
대학이 배움의 장이 아닌 준비의 장이 된지는 이미 오래다. 이런 상황에서 성공은 무얼 의미하는가. 준비과정을 끝내는 것이 성공일까. 그러나 대부분은 하나의 준비 과정을 지나고 또 다른 준비과정으로 돌입하며 허탈감을 느낀다. 무언가가 되기 위해서는 또다시 누군가와 싸워 이겨야 하기 때문이다.
준비 중독증은 경쟁 중독에 걸린 사회의 합병증이다. ‘결국 ㅇㅇ싸움이다’가 말버릇이 되어버린 내 친언니는 경쟁 중독에 걸려버린 듯하다. 모든 것은 이기고 지는 것의 문제로 생각해서 절대 사람에게 져주지 않는다. 정말 모든 것이 이기고 지고의 문제일까. 승자만 있는 세상은 모두에게 A+를 주는 학교만큼이나 기이하다. 아니, 절대로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패배가 평범하고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 가르쳐야 하는지도 모른다.
최근 개봉한 영화 <조커>에는 코미디언 지망생 아서 플렉(조커)이 극단적 방식으로 자신의 패배를 극복해내는 모습이 나온다. ‘조커’는 원하던 바를 이룰 수 없게 되자 망상으로 도피했고, 끝내는 망상을 실현하여 패자들의 영웅이 된다. 아주 극단적인 정신 승리가 구체적인 폭력의 형태로 세상을 뒤흔들어 놓는 장면은, 극적이기도 하지만 어느 정도는 현실의 것이라 무섭다. 모든 패자들이 조커처럼 아프지 않으려면 적어도 ‘정신적으로 안정된 패자’가 되어야 할 텐데. 패자부활의 가능성이 희박한 이 사회에서, 그것이 가능할까.
나가며
아기의 탄생은 좋은 것이지만, 임신은 산모의 몸에 임신중독증을 끌고 오기도 한다. 유비무환이라 생각했지만, 준비는 준비생의 몸과 마음에 생채기를 낸다. 이런 지난한 준비 과정 끝에 있을 바늘구멍 뒤, 우리가 어떤 옷으로 꿰매 들어가는 실이 될지 궁금해진다. 준비 중독증은 우리가 걸린 줄도 모른 채로 앓고 있는 시대적 지병인지도 모른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아프다는 것을 인정해야 덜 아프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