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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떫음 Apr 03. 2024

전환점, 나사 갈아끼우기

3월의 이야기/4월의 시작


3월의 이야기/4월의 시작_전환점, 나사 갈아끼우기

24. 4. 3 작성



24년 2월은 여전히 추웠다. 작년엔 금새 아우터가 얇아졌었는데,

2월말이었던 졸업식날에도 서울에는 눈이 한아름씩 내렸다.

졸업식 이틀전쯤이 퇴사날이었는데, 퇴사가 3일 남은 시점에 코로나가 걸렸다.

유독 감기기운이 심해서 40분은 일찍 퇴근하고 집으로 갔는데, 츄츄가 저녁을 해주겠다며 불렀다.

서둘러 챙겨서 연신내의 츄츄집에 갈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식욕이 왕성한 내가 츄츄가 차려준 김치볶음밥과 떡국을 욱여넣으며 먹을 때부터 상태가 안 좋다는 게 느껴졌다.

웃기지만 항상 이렇게 꾸역꾸역 먹어도 주변에서는 잘 먹는다며 말해준다.

츄츄도 그랬다. 너 배고팠나보다, 정말 잘 먹네!



점점 몸이 무거워져서 츄츄는 방에서 자고 나는 츄츄네 집 거실에서 따로 몸을 싸매고 잤다.

사실 한숨도 못 잤다. 밤새 끙끙 앓으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침7시쯤에 츄츄네 어머니께서 집에 귀가하시면서

둘이 싸웠어? 왜 따로 잤어. 하셨다.

당장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지만 어거지로 몸을 끌고 츄츄랑 같이 회사까지 향했다. 가는 내내 츄츄가 너 쓰러질 거 같아라며 걱정을 했다. 하는 수 없이 부장님께 말씀드리고 회사 앞 병원으로 먼저 갔다.

열이 39도라며 코로나 검사, 독감 검사가 각각 3만원인데...라고 하시는데 볼 것도 없이 그냥 다 해달라고 했다.

한번에 6만원이 나갔다. 이제 곧 백수인데...라는 생각은 나중에서야 들었다.

코로나 양성 판정을 받고 사무실에 가 부장님께 드리니, 그냥 본인이 알아서 처리할테니 집에 가보라고 해주셨다.

짐 가지러 곧 돌아오겠다며 그렇게 마무리도 서투르게 하고 3일은 빨리 퇴사를 했다.

다행히 몸은 3일만에 괜찮아졌다.


그 다음주에는 4년 동안 지낸 대학 졸업식이었다.

어느샌가 글을 쓰는 시점인 지금은 전남친이 되어버린 그사람은 못 가서 미안하다며 눈 내리는 졸업식이라, 낭만적이군 이라며 해줬던 말이 아직도 기억 난다.

아빠는 퇴직하셨지만 올해 1년은 감사로 출근하게 되셔서 오질 못하셨다.

곧 군에 갈 남동생과 엄마만 당일 기차를 타고 와 축하해줬었다. 큰이모는 용돈을 보내주셨다.

다음날 전남친을 만나 오랜만의 데이트를 즐기며 그 용돈으로 필요한 바람막이를 한벌 장만했다. 일주일 뒤쯤 그게 마지막 데이트가 되어버렸다.

2월의 마지막 날에 7개월 동안 만난 남자친구와 이별을 했다.


어떤 트러블도 크게 없었지만 만나는 동안 크게 부딪혔던 딱 세번의 상황들이 한번 더 일어나며 우리는 그때 성급하지만 서로를 위해 끝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요즘 세상에 이렇게 안전한 이별을 하게 되서 좋은 격 아니겠냐며 위로를 했다.

그래, 사실 나는 울고불고 많이 했어도 좋은 기억이 대부분이다.

우연찮게도, 또는 분명 그럴 전환점이었을지 이별과 동시에 친한친구 몇몇과도 많이 멀어졌다.

어쩌다보니 상처가 지나치게 컸다. 이럴때일수록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 할일을 꾸준히 하는 것뿐이었다.




머릿속에 그려둔 것처럼 퇴사와 졸업을 동시에 맞이하면 보낼 여유들을 만끽하고자 오랜만에 보는 사람들과도 만남을 갖고, 기막힌 타이밍으로 20살적 부산 영화현장에서 친해졌던 승민오빠로부터는 웹드라마 기획을 가끔씩 도와주게 되었다. 헤어지던 순간에도 오빠의 일을 도우고 있었을 터라 한동안 많은 위로를 받았었다.


츄츄네 집에는 일주일에 한번씩은 꼭 가면서 노견인 아꽁이도 봐주고, 저녁에는 운동 대신 연습실에서 2시간씩 춤을 추며 땀을 빼기도 했다. 킥복싱은 바빴던 작년보다 자주 얼굴을 비추며 체력이 향상된 모습을 보이니 관장님께서 뿌듯해하셨다. 때문에 점점 강도가 늘어가는 것도 흠이다만.

평소같았으면 회사에서의 일상이 대부분이었을 텐데,

3월 한달 동안 다양한 걸 많이 했다.



5일 정도는 고향에도 내려가 있었다. 외가쪽에서는 3월에 묶여있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생신을 축하하며 이맘때쯤 다같이 1박으로 여행을 갔었다. 이번에는 남해 아난티에 비싸고 넓은 방을 3개씩이나 잡고 놀았다.

창원에서 친구도 몇몇 만나고, 심심할 엄마랑 낮에 외식도 해보고 저녁도 해먹고 종일 떠들다가 자곤 했다.

친척들 사이에선 내 결별 사실이 연예인 결별 이슈를 전한 것 마냥 떠들썩했다.

어른들끼리 젊은 남녀가 만나고 헤어지는 것에 왈가왈부하시는 모습을 보니 내 상황도 가볍게 여겨져서 잠깐 웃음이 났다.


아빠가 얻은 골프 우승 상품권으로 청담동에 가서 vip리프팅테라피도 받아봤다.

초반에 식욕이 많이 줄었어서 혼자 라면2봉지에 삼겹살도 구워먹던 내가 2주만에 3kg가 빠졌었다.

그 이후로는 건강을 되찾으며 여유도 생겨 집에서 열심히 밥도 해먹었지만 먹는 양을 조절하고, 운동도 자주 열심히 해서 한달이 지난 지금도 빠진 3키로를 유지하고 있는 중이다.

승민오빠네 회사는 서울역 앞에 있어서 항상 집에서 만리동을 거쳐 30분씩 걸어갔다. 오르막길도 좀 있어서 다와가면 땀도 나는데 대낮에 할 수 있는 산책길이라 좋았다. 서울역을 자주 들르고, 한번은 그 회사 오빠들이랑 (대표님부터 모두 승민오빠와 동갑내기 분들이셔서 오빠라고 부른다) 회식도 3차까지 했었다. 이별하고도 먹지 않던 술을 그날 간만에 기분 좋게 먹었던 듯했다.


기억나는 건 새벽 2시 반쯤 그곳에서 나와 집을 가려는데, 밤중에 걸어가려니 어둡고 인적 드문 골목이 좀 있어 두려워져 가까워도 대로변으로 돌아서가는 택시를 탔다.

한밤중에 그 광활한 서울역 한복판에 사람도 없는 곳에 있다보니, 아 앞으로도 나는 이 넓은 세상에서 혼자 살아가야 하는구나 하는 체감이 다가왔다. 그날 밤에도 유독 그사람이 보고 싶었던 것 같다.



3월말에는 종댕이의 소개로 독서모임을 나갔다. 마포 채그로 스터디룸에서 4명이서 서로 읽은 책을 소개하며 사이사이 나오는 토크를 2시간 정도 이어갔다. 나는 스콧 피츠제럴드의 <어느 작가의 오후> 라는 작가 후기 단편과 에세이를 무라카미 하루키가 번역한 책을 가져갔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위대한 개츠비, 햄릿, 그리고 도쿄의 빌딩들에 관한 책들에 대해서 재밌는 시간을 보냈다.

이후 근처 동네에서 또 동시에 진행하고 계신 모임분들과 합세해 다같이 식사를 했다.

경의선 숲길을 쭉 걸어 그곳에 있는 베트남 음식을 먹고, 또 쭉 걸어 연남동까지 가서 도넛을 포장해선 홍제천까지 걸어가 하천 앞에 옹기종기 앉아 도넛을 나눠먹으며 얘기를 하고 다시 홍대입구역까지 걸어가 헤어졌다.


그날 꽃들이 많이 개화했어서 길이 예뻤다. 주말이라 사람도 복작복작했다.

더 없이 낭만적인 거리들이었다. 이 길, 작년엔 여름이 되어서야 존재를 알았고 그 사람과 이 길을 걸으며 사랑을 얘기했었는데 말이다.


시간이 짧은 듯 했는데 오전부터 오후 4시쯤까지는 쭉 있었어서 그 사이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간만에 이런저런 얘기로 가득 찬 하루였다. 많이 웃고 떠들었는데, 그날은 3월의 마지막날이었다. 집에 돌아온 나는 적적함에 이것저것 또 하기도 했고,  뒹굴대 보기도 했다.

집에 있을 때는 끊임없이 보지 못했던 드라마, 영화, 애니를 보고 가끔 유튜브로 유퀴즈나 김창옥쇼와 같은 토크 콘텐츠를 보기도 했다. 독서, 그림그리기, 집밥 해먹고 바로바로 치우기, 청소, 빨래, 피부관리, 분리수거, 그러고 운동, 인터넷 쇼핑하기...이 모든 걸 해도 지나치게 뛰어다녔던 작년에 비해 내가 너무 단란했다. 좋은 거였다.

나를 살필 시간이 많아졌으니까. 건강도 더 좋아진 듯 했다.




그런 나는 그날따라 내 웃음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잘 지냈지만 어딘가 나사가 하나 빠져있는 듯했다.

그날 밤에 잠을 자려다 한달동안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 터지며 두시간 가까이를 혼자서 울어댔다. 휴지를 몇장이나 썼는지를 모르겠다. 진정하고 자려고 눈을 감으면 또 터져나왔다.

많은 생각들이 오갔다. 그 사람과의 순간을 놓지 못하고 있어 그리워하는구나. 가끔 힘겹고 외로움이 닥쳐올 때,

어쩔 수 없이 무의식은 본능적으로 그 사람과의 좋았던 사랑의 순간을 꺼내어 위로받는다. 지금 나에겐 내가 느꼈던 것들 중 어느 것보다도 따뜻했기 때문에.


결국 그러고 나면 그리움에 대해 또 아파하기를 반복한다. 이렇게 지나치게 고통스러우면, 통증에 대한 얘기를 소중한 친구에게 전하게 되면서 나는 내 상태에 대한 정리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 이별에서는 그 전 시간동안 의지했던 일을 전제로 친구들과 멀어지게 됬었다.

그 생각을 떠올리니 이 고통은 온전히 나 혼자만이 감내해야만 했다.



항상 그렇다. 이 고통에 사로잡히면 난 언젠가 또 잘 견뎌내고 잘 살아갈테지만,

밤중에 이렇게 더없이 둘러싸이면 그 고통을 느끼는 순간에는 이 아픔이 영원할 것만 같은 어둠만 보인다.

죽어라 가슴을 뜯으며 울부짖다 애써 진정하고 쓰러지듯 잠을 잤다. 결국 눈앞에 그 사람이 한참을 아른거렸다.

무엇보다도 따뜻했던 그 사람 품에 안겨있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편안하게 잠들 수 있을까.

불면증을 완치한지 얼마 되지 않아 매일을 습관처럼 얕은 잠만 자던 내가 유일하게 편안하게 잠들 수 있을 때가 그 사람 품이었단 걸 그 사람은 알았을까.



붕어눈이 된 눈두덩이를 애써 진정시키며 서울역으로 갔다.

승민오빠는 며칠 전 회식때 만취한 탓에 집을 못 가고 응급실을 갔다가, 전날 헤어졌던 여자친구에게로 연락이 가 재회하며 다시 대화를 하고 재결합하기로 했댄다.

그 얘기를 듣는데 문득 내가 그렇게 되면 과연 그사람은 와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라도 보고싶기도 했다.

그런 멍청한 상상에 실웃음이 나기도 했다. 여전히 내 웃음에는 며칠동안 기시감이 들었다.


나사 빠진 나.

그 나사는 알고보니 그 사람으로 끼우게 된 나사였다.

그 사람으로 만들어진 나사는 녹슬어서 이제 버려야만 하고, 새로운 어떤 나사를 만들어 끼워야 했다.

나는 한쪽이 빠진 채로 녹슨 나사를 들고 버리질 못하고 있었다. 한때 나를 이루어줬었던 그 나사가 썩어가는 걸 눈으로 지켜보며.



그래도 나는 내가 점점 괜찮아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여전히 좋은 사람들이 가득했다. 내가 이룬 것, 내가 원래 좋아하던 것들, 물론 그 사람도 좋아했지만 그 전에도 좋아하던 또 다른 많은 것들은 여전했다. 그 중 하나인 그 사람이 떠났을 뿐이었다.

마지막 미련을 버리기 위함이었다.

이별한지 35일 정도 됐을 거다. 내가 휴지통에 버렸던 그 사람의 사진들은 30일이 지나면 복구할 수가 없다.

한번도 꺼내보지 않았지만 이젠 돌아갈래야 돌아갈 수도 없어졌다는 거다. 나는 이제 앞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다.




그 사람에게 작은 편지처럼 마지막으로 카톡을 보냈다.

당연했다. 처음으로 붙잡다, 라는 의견이었다. 그렇지만 그건 단순히 내가 힘들고 잊지 못해서라는 이유면 안됐다. 때문에 온전히 생각을 정리해 '우리'가 같은 마음이라면, 하는 서로에 대한 기회를 다시 꺼내보자는 얘기였다.

하지만 그 사람이 지금 어떤 상황일지는 아무것도 모른다. 일을 하고 있을지, 쉬고있을지, 하다못해 새로운 사람을 만나려고 하고 있을지, 나를 정리하고 있을지, 또는 괴로워하고 있을지, 아무것도.

그래서 나는 답장을 크게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마지막에 괜찮다고도 적었다. 단지 내가 지금이 아니면 말하지 못할 것 같았다고.

그러니 읽었다는 것만으로도 고맙다고. 좋은 하루 보내라며.

어쩌면 그런 무던한 말이 억지로 괜찮은 척 하는 것처럼 보여서 부담스러웠을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제 우린 '우리'라는 말이 아니었기에

나는 나를 먼저 우선시해야했다.


그 사람이 읽었다. 답은 하루가 다 되어가지만 오질 않는다.

그래도 괜찮다. 나는 이제 더는 후회가 없어 앞으로 나아갈 일만 남았다.


지금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 때가 살면서 처음이다.

사실 그래서 자주 불안할 때가 있다. 이렇게만 일상을 보내도 될까? 생산적이지 않아도 될까?

하지만 어찌보면 자그마치 몇달 전의 내가 원했던 모습이었다.

한동안은 하고 싶은 것들을 자유롭게 해보며 단란하게 지내는 일상을 한번이라도 가져보는 것.

지나치게 화려하게 뛰어다니려 하지 않는 것.


3월은 아주 큰 전환점이었다.

나는 준비를 못하고 있었지만, 이미 다가오고 있었을 지도.

그 전환점을 통해 내가 앞으로 얼마나 변할지는 모르겠다.


새로운 나사를 끼울까? 어쩌면 일부러 그 구멍만 내버려둘 수도 있다. 비록 공허할지라도 나는 자유로운 그 빈공간을 보존하고 싶을 지도 모른다. 그 공간에 들어왔다 나갔던 많은 나사들의 흔적이 남아있을 거다.

훗날 '한때 사랑했던' 이 되어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그 수많은 흔적.




그래

내 안에는 흔적이 너무나도 많지만

나는 버리지 않고 전부 안고 또 다시 나아가겠다.




잘 가,

잘 지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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