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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떫음 Sep 07. 2022

아무것도 없는 날

떫소리_2021. 11. 12

내가 이래도 되는 건가 싶은 날.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가 싶은 순간.

그러니까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모든 일이나 행동들이 참으로 부질없게 느껴진다.

내가 이렇게까지 해서 얻는 게 뭘까.

나는 왜 이런 식인걸까.

나는 왜 변했을까.

아니면 사실 원래 이랬었던 걸까. 그렇다면 과거의 나는 무엇인가.

새벽부터 열심히 뛰어나가서 촬영을 도와주고,

또 쉼없이 달려와서 다른 촬영을 무사히 마쳤다. 모두와 생글생글 웃으며 헤어졌고, 집으로 아주 빠르게 걸어갔다.

아침에는 새벽이라 손이 얼음장에 몸을 덜덜 떨었는데,

그렇게 빨리 걸으니 오히려 패딩이 짜증나고 더워졌다.

귀갓길은 한창 막히는 퇴근 시간이라 길에도 사람들이 붐볐다.

그 군중 속에서 나는 열심히 걷다가도 가로등 빛을 올려다보았다가 눈물이 쏟아질 뻔했다.

집에 도착해서는 평소와 다르게 가방이니 옷을 다 내팽겨치고는 주저 앉아 한동안 멍하니 있기만 했다.

아침 6시부터 저녁 7시가 되기까지 먹은 거라곤 6시30분에 편의점에서 먹은 콘푸러스트 바,

그리고 스니커즈 하나, 낮에 얻어먹은  피자 한조각이 전부였다.

배가 고팠지만 밥을 할 힘도 먹을 힘도 없었다.

와중에 얼른 마감해야하는 시나리오 초고 쓰기가 있었는데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 때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아침 촬영장에서 체력이 부쳐서 혼자 무표정을 짓고 있을 때, 힘내라며 복돋워주던 동료.

나보다 힘들게 일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겨우 체력이 부친다는 이유로 힘든 티를 그렇게나 내고 있었나 보다.

그 생각이 떠오르고 벌써부터 한숨이 나왔다.

오후에 촬영이 있으면서도 무턱대고 아침 촬영을 도와주기로 약속해버렸다.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시간에 맞춰 오후 촬영장에 도착했다.

또 힘이 없을 나를 생각하니 괜히 스탭들에게 미안했다. 누가 두탕 뛰래?

대놓고 힘든 티를 냈던 나는 더 걱정이 많을 친구에게 또 미안해졌다.

촬영 내내 힘이 들어서 그런지 가만히 서 있으면 다리가 덜덜덜 떨렸다.

최대한 티를 안내느라 고생했다. 

내일은 볼 일이 있어 고향 본가에 내려가야한다.

일주일 동안 바빴으니 오늘 바로 짐을 싸야했다.

내려갈 채비를 마쳐야 하는데 마감도 해야지, 끼니도 챙겨야지, 짐을 싸는 게 도무지 불가능하다 느껴졌다.

그냥 아무 생각이 없어져서 한참을 끅끅대며 울다가 불을 끄고 누워버렸다.

누워서 울다가 숨이 안쉬어지더니 공황이 왔다.

너무 오랜만에 이렇게 구는 내 모습에 당황해서 친구들에게 연락도 못했다.

나에겐 돈도, 체력도, 함께할 연인도, 집에 가면 가족도, 그리고 어떤 능력도 없다.

나에겐 아무것도 없었다.

이런 하찮은 나에게 있는 건 없다 싶었고, 그런 내가 한심하다 못해 꼴보기도 싫었다.

내 곁에는 친구...

친구들이 있었다. 친구들은 항상 고맙다. 그냥 내가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들에게 고맙다.

하지만 난 또 겁을 먹고 친구들에게 의지 하지도 못했다.

그 잠깐 사이 동안 곤두세워진 신경에 못된 생각들만 했다.

끝에 드는 정신은 죽을까,

뿐이었다.

울다가 지쳐 잠에 들었다.

그 마저도 설쳐서 한 시간 만에 어둠 속에서 깼다.

한참을 누워서 고민을 하다가 벌떡 일어났다.

물 몇 모금만 마시고 닥치는대로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불가능하다 생각했던 마감을 50분 전에 끝냈다.

제출하려고 게시판에 들어갔더니 아직까지 아무도 제출하지 않았었다.

한참 뒤떨어지고 있겠지라고 생각했지만 마감만은 빨리 해냈다.

아무것도 모르겠다. 내가 왜 이러는 지 모르겠다. 생각해보니 취침약 먹을 시간도 한참 지났다.

친구들이 보고 싶다.

나에겐 친구들이 있다.

내일 집에 가면 보고싶던 가족들이 있을 거다.

지금은 아무 생각 없이 마감을 끝내고 여기다 글을 쓰고 있다.

퉁퉁 부은 눈이 따갑다.

잠깐이지만 얼른 집에 내려갈 준비를 해야겠다.

남는 힘을 쥐어짜내서 짐을 싸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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