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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싸이콜로지스트 Mar 07. 2024

  제 1장 어떤, 일하는 엄마의 아이

4. 엄마가 처음인데 뭣인들 해봤을까 # feat by G Family 

1. 회장엄마에게는 과업지시서가 따로 없었다.  


2학년이 되어서도 일하는 엄마의 상황은 마찬가지다. 일은 점점 늘어나니까. 아빠와의 원거리 통학도 그대로. 유치원 3년 친구 G와 같은 반이 되어 좀 더 안심되었었다. G 엄마가 준비물도 같이 사서 챙겨주었었고, 방과 후 애매하게 비는 시간에 자기 집에 데려다 땀으로 범벅된 아들들을 씻기고 간식을 먹이고 과제도 하게 돌봐주며 살뜰히 챙겨주었다. 2학년은 임원이 선출되는 학년이다. 아이는 인기가 많고 다정하고 똘똘한 친구 G에게 1학기 회장을 ‘양보’하고, 기분 좋게 2학기 회장에 선출되었다. 애가 기대 이상으로 전략적이었단 생각이. 

      

정년퇴임을 앞둔 남자 선생님이 담임이셨는데 기타를 악기로 잘 활용하셨던, 말 그대로 사람 좋은 할아버지셨다. 본인을 모 교회 안수집사로 소개하신 선생님은 G와 ++이가 목회자의 아이들이라 더 마음이 가고 예뻤다며 선교지에 나가 있다는 아들 내외이야기를 종종 하셨었다. 심지어 그 반에는 이란인 선교사의 자녀도 있었어서 선생님은 그 아이들을 위해 특별히 기도하신다고도 했었다. 1학년 때의 불안과 부당함에 대해 보상받는 기분이었고, 두 아이의 단단한 학교생활이 은근히 자랑스럽기도 했었다.   

   

G에게는 5살 차이 나는 여동생이 있었다. 1학기 회장인 G엄마는 어린 자녀 육아, 2학기 회장인 나는 직장일이라는 각각의 직접적 이유가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학교에서 엄마들과 차 한잔 못 마실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학교에 못 오는 엄마들 배려하자며, 아이가 회장이지 엄마가 회장이냐며 아주 그냥 결벽을 떨었었다. 뭔가 멋지다는 생각도 했었고. 이렇게 마음이 찰떡같이 맞는 엄마와 같이 지내 감사하단 생각도 했었다. 

     

당시 2학년은 학교 인근 체육문화센터에서 수영수업이 편성되어 있었는데 아무래도 아이들이 어리다 보니 수영장에는 엄마들이 가득했었다. 당시 그 학년 엄마들은 아이들이 체육센터로 가는 길은 수영가방을 들어주어 손을 가볍게 해 주고, 수영장에서는 속옷이며 이것저것 놓고 오기 일쑤인 아이들의 소지품을 챙겨주고, 두 손 놀고 있는 담임선생님들의 다과를 챙기기도 하고, 긴 머리 여아들을 위해 머리를 말려주는 서비스도 제공해 주고, 오는 길 물젖은 옷가지들을 받아 바로 집에 가져다 놓는, 그런 중에 아이들 수영하는 모습, 수영강사가 친절한지 아닌지, 누가 다른 아이들을 괴롭혀서 안전을 위협하지는 않은지 살피며 끼리 두터운 친분을 쌓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 반 1학기 회장엄마와 2학기 회장엄마는 둘 다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았는데... 사실 그게 담임선생님의 지시사항이기도 했다. 둘 다 순진했고 좀 지독하기도 했었던 것 같다. 선생님께서는 우리가 여쭐 때마다 그 정도 가방도 못 들고 가면 2학년인가, 가서 좀 못 챙겨 오면 어떤까 그게 다 산 공부인데, 선생들 커피는 뭐 하러 사 오나, 애들 간식 그 단 걸 뭐 하러 운동 후에 먹이나. 엄마 올 필요 없다. G엄마는 동생 돌보고, ++엄마는 가서 일해라. 교실 청소 그까짓 거 내가 슬슬 하면 된다. 오지 마라. 요즘 애들 집에서 다 잘 먹는다.  간식도 필요 없다...      


확신컨대, 뒤에서 말들은 있었을 것이다. 반모임 한번 열지 않고, 학부모회에도 주어진 역할만 겨우, 꿋꿋하게 버티던 2학기 마지막. 망치로 한 대씩 얻어맞고 회장엄마의 '도리'에 대해 깨달음이 찾아왔다.       

담임 선생님의 정년퇴임식. 아무런 준비가 필요 없다던 선생님의 말씀만 굳게 믿고 겨우 선물하나 감사의 마음 욱여넣은 카드 한 장 준비해 달려간 조회시간에 G도, ++이도 아닌 다른 두 아이가 꽃다발 증정과 편지 낭독을 하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이 감정은 당황스러움, 부끄러움, 미안함에 가까웠다.  


우리만 몰랐지 매주 교실 청소를 도우러 오던 엄마들이 있었고, 수영장 간식도, 학교의 소소한 행사들도 다 그 엄마들이 챙겨주었다고 들었다. 현재 그 두 아이는 지금껏 ++이의 친한 친구들이고, 그 엄마들 역시 나의 소중한 친구들이다. 그들의 전언에 의하면, 이제야 말할 수 있어하는 얘기라, 오랜 기억을 더듬어야 하지만 그땐 회장엄마 둘이 특이하고 무심하다 생각했다고.  그래서 나도 미안하다고 몰랐다고 상식적이었으면 되었을 일을 융통성 없는 원칙 때문에 사람 노릇을 못한 것 같다고 역시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한다고 뻘쭘한 마무리.                


2. 빈부차이는 영어에서 난다고 


나는 아이를 영어유치원에 보낼 꿈도 못 꾸었다. 12년 전이지만 지금이라 해도 절대 적은 액수의 수업료가 아니었다. 내가 일하던 센터 2층에는 대형 영어유치원과 어학원이 있었고, 영국의 귀족학교 폼나는 원복을 입은 아이들이 원어민 선생님과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다가오는 외국인만 보아도 뒤로 숨던 ++이의 모습과 뒤섞여 아련하고 씁쓸한 박탈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너무 속된 말 같지만 돈이 썩어나는데 안 보내는 그런 멋짐과는 거리가 있는 선택이 바로 영유였다. 당시 남편의 월급은 80만 원(영유 원비는 대략 130만 원). 우리 가정의 경제력을 고려할 때, 그 꼬장 한 원칙주의자인 남편의 교육관을 고려할 때, 영유를 보내는 것은 불가능했었다. 하지만 또 다른 마음 한켠에선 영어 조기 교육 열풍에 놀아나는 호구가 되는 것같아 내키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우리나라 최고의 초등영어 전문가인 지인은 모국어 체계의 안정성이 우선이며, 외국어습득에 적기가 있음을 누누이 강조해 주었었다. 물론 그 집 아이들도 영유를 다니지 않았다. 내가 믿고 따를 것은 영어유치원장의 할인제안이 아니라 전문가 지인의 의견이어야 했다.        

  

실제로 우리 부부는 아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학원에 보낼 마음이 없었다. 우리는 아이가 좋은 책 잘 읽고 다양한 경험을 통해 배우면, 안전하고 행복하면 잘 성장할 것을 믿었다. 당연히 방과 후 수업은 인라인스케이트, 바둑, 체스 등 학습과는 거리가 있는 것들로.  


아빠가 본인 수업을 마치고 아이를 픽업하려면 방과 후에도 시간이 많이 남았다.  그래서  G와 방과 후 영어 프로그램을 다니도록 했었다. 당연히 영어학원보다 저렴했다. 당시 월 2-30만 원 호가하던 영어 프로그램을 생각하면 영어 방과 후 수업이 비교될지 의문이었으나 그마저도 부담이 적진 않았다. 수업에 요구되는 과제는 ++이가 여러 번 하기 싫다고 표현하기도 했었고 나 역시 영어로, 공부로 스트레스받게 하기 싫어서 과제에 그렇게 마음을 들여 점검하지는 않았었다.  특히  일하고 들어와 하루종일 엄마를 그리워한 아이에게 숙제했는지만 점검하는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아서 더더욱 너그럽게 대하려고 노력했었다. 


회사 쉬는 날 오후엔 종종 아이를 보러 학교를 가곤 했었는데 그날 마침 영어 방과 후 수업이 있던 날이었다. 건물 현관에 볕을 피해 들어서자 한 여자아이가 화장실에서 눈물을 훔치며 나왔다. 놀라 자초지종을 물으니 단어시험에서 한 개를 틀렸단다. 2학년. 아들과 같은 학년이었다. 울일인가 싶다가도, 아이 마음에 어떤 위로가 힘이 될까 고민도 했었지만 쉽사리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이어 두 아이가 해맑게 나온다. 영어 좀 하는 G는 2개를 틀렸다고. ++이는 묻지 말 것을. “나는 빵점인데요. 근데 우린 지금 어디로 놀러 가요?” 눈치 빠른 G엄마가 본인 아들은 어제 열심히 공부를 했다며 내 기분을 살핀다. 이 정도가 내 기분을 좌지우지할 정도의 문제는 아니었지만 나의 아들도 어제 단어 공부를 안 하지 않았다.  하... 난 널 믿지만... 그래도 엄마가 아무리 대인배여도 '빵점'은 저렇게 큰 소리로 말할 건 아니잖니... 아까 그 여자아이가 과하다 싶었는데, 과한 건 내 아들.

            

G패밀리는 인천으로 이사를 해야 했고,  G는 전학을 갔다. 목회자 자녀들의 숙명 같은 이사와 전학이다. 아쉽고 섭섭하고 그립고 상당히 복잡한 감정이었다. 물론 지금껏 서로의 생일을 기념하고 안부를 전하며 어떤 날은 만나서 어떤 날은 자정을 넘기는 일박이일 톡으로 속내를 꺼내놓지만 거리의 간극은 쉽지 않다. G와 ++이가 함께한 야구장, 미술관, 박물관, 남이섬의 추억은 진한 우정으로 진화하길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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