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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칼두 Aug 20. 2020

유튜브의 서사

유튜브는 영원히 지속될 것인가? 

사람들은 말한다. 이제 TV의 종말이 올 것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주로 내 또래이다. 2030 정도에 해당된다.

여전히 중장년층은 TV를 본다. 정확히는 TV를 틀어둔다.

이를 방증하는 것은 홈쇼핑, 미스터트롯 등이다. 


혹은 식당을 가도 여전히 TV 소리가 흘러 나온다.

유튜브와 넷플릭스를 틀어두지 않는다.

대충 3가지 정도의 이유라고 생각한다.


첫번째는 유튜브와 넷플릭스의 존재를 알지 못하거나 굳이 식당 TV로 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


두번째는 TV는 원래 그냥 보게 되는 수동적 행위이다. 그런데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보는 것은 스스로 봐야할 것을 찾는 주체성에 기인한다. 하지만 식당에 계신 분들은 그러한 주체성을 바라지 않는다. 더 중요한 행위가 있다. 먹거나 일하거나, 혹은 앞에 놓인 사람과 대화하거나.


세번째는 유튜브와 넷플릭스는 자신의 관심을 기반으로 움직인다. 예를 들어 정치 유튜브를 보는 사람은 정치 방송을 위주로 볼 것이다. 그러한 관심을 타인과 공유하길 원하는가? 혹은 다른 사람이 나와 같은 영상을 좋아할 거라는 기대가 있는가?  그렇지 않다. 유튜브와 넷플릭스는 개인주의를 표방한다. TV는 그에 비해 보편성에 가깝다.


젊은 층이  TV를 보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들은 주로 유튜브, 넷플릭스 등을 본다. 


그럼 유튜브와 넷플릭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소비자가 주체적으로 소비한다는 데 있다. 소비자가 스스로가 무엇을 볼지 결정한다.

하지만 그러한 선택은 고민과 사유에서 비롯된다. 

과연 우린 영원히 죽을때까지, 무엇을 봐야할지 끊임없이 고민 할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유튜브의 사유는 알고리즘의 사유를 갖고 온다.

자신이 해온 선택들이 레퍼런스가 되어, 선택지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정치 영상을 본 사람은 끊임없이 정치 영상 추천을 받게 된다. 

새로운 유형의 영상을 보기 위해선, 알고리즘이 아닌 외부 세계의 사유를 갖고 와야 한다. 유튜브의 추천이 아니라 스스로 검색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또한 유튜브의 편집 방식은 여백을 생략하는 방식이다.

한 영상 내에서 나오는 말 사이엔 공백이 없다.

끊임없이 재미와 감동을 소비자에게 주어야 하며, 지루한 틈을 준다면 소비자는 과감하게 다른 영상을 볼 것이다. 

그래서 유튜브에선 TV에 나온 영상이 토막 나기도 하며, 혹은 한 명의 말을 계속 공백없이 연속적으로 붙여낸다.


공백은 하나의 사유이다. 

그런데 유튜브엔 공백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점에서 앞으로 유튜브를 통해 배워온 사람들은 그 전의 여백이 가득한 텍스트들을 통해 배워온 사람들과

다른 방식의 사유를 할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흘러갈지 좀 더 관찰해야 할 듯 싶다.


또, 위에서 말한 것처럼 유튜브는 2가지가 모순적으로 충돌한다. 스스로 선택을 해야한다는 주체성과 영상의 공백을 허용하지 않으며 알고리즘에 의존하는 수동성.

이 두가지는 충돌되는데, 이 충돌지점이 유튜브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나는 유튜브의 미래가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면 인간은 최종적으로 수동적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책이 있다. 그 책에선 근대 시대에 자유로워진 사람들이 불안감을 느끼고 다시 집단주의, 즉 파시즘에 의존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한다.

유튜브는 각 개인의 자유로움, 혹은 개별성, 혹은 외로움을 야기했다.

불안정한 개인들이, 주체성에 피로해진 개인들이 다시 집단주의로 흘러가지 않을까.

그것은 TV와 같은, 혹은 집단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매체가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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