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차가 쌓여가면서 가끔 두려운 감정을 느낄 때가 있었다. 내가 그토록 싫어했던 꼰대 같은 선배들의 생각과 가까워져 가는 걸 느낄 때였다. 어느덧 후배들이 생겨 대화를 나눌 때면 간혹 그들의 말이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었다. 가령 일에 대한 태도나 회사에 대한 불만 같은 것들이다. 그럴 때마다 후배들의 모습에서 지난날을 떠올려 후회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나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바로잡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의 나는 내가 겪은 가시밭길을 너희들은 걷지 않길 바라는 순수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재 직면하고 있는 것만 눈에 보일 뿐 다른 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어떤 날은 나도 모르게 오지랖을 부릴 때도 있었다. 늦게 출근하는 후배에게 “외국계라서 출퇴근이 자유로워도 신입 때는 적당히 눈치껏 일찍 다니세요” 라며 훈수를 두었다. 회사는 외국계 지사로 대부분의 구성원이 영업직, 기술직이었기 때문에 외부 미팅이 많아 출퇴근이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몇몇의 후배들은 입사하고 며칠 눈치를 보더니 다들 늦게 출근하는 분위기라는 것을 파악하고는 선배들처럼 늦게 출근하고는 했다. 선배들로부터 새로 입사한 친구들의 근무태도에 대한 안 좋은 얘기를 들었고 오지랖을 부리고 싶어 졌다. 나의 오지랖에 대한 반응은 미적지근했고 괜히 꼬장을 부린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그러다 언젠가부터는 오지랖을 부리고 난 뒤의 찝찝함이 싫어 입을 다물었다.
중간급의 연차가 된 후로 일보다는 선, 후배들과의 관계에 대한 고민을 더 많이 했던 것 같다. 양 쪽 모두와의 관계가 어려웠는데 내가 생각하는 상식과 상대가 생각하는 상식이 어긋날 때 대화를 이어가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 막내였을 때는 상식에서 어긋나는 얘기를 하는 사람을 꼰대로 치부해버리고 아무리 상식에 어긋난 얘기를 하더라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면 그만이었다. 내가 겪었던 대부분의 꼰대 선배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주며 호응하는 시늉을 하면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다.
작년부터 경력직 후배들이 우르르 입사하면서 회사에서 중간급의 위치가 되었다. 남편 역시 회사에서 나와 비슷한 상황이었고 그즈음부터 우리 부부의 주된 대화의 주제는 “나 꼰대야?”였다. 어떤 후배와 얼마나 황당한 일이 있었는가에 대한 얘기들이었는데 그때마다 우리는 서로에게 꼰대가 되지 말자며 직설적인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후배에게 출근을 일찍 하라는 조언을 했는데 반응이 좋지 않았다는 얘기를 남편에게 해주었다. 남편은 "너도 늦게 출근하잖아. 그런 얘기를 할 거면 네가 먼저 일찍 출근하는 행동을 보여주고 조언을 해야 그 말에 힘이 실리지"라며 뼈 때리는 조언을 해주었다. 나는 남편의 말이 내심 서운했었다. "나는 신입 때 9시에 출근하고 밤늦게까지 야근하면서 열심히 일했거든. 이제는 누구도 내가 어디서 뭘 하든 관심 없을 만큼 회사에서 인정하니까 자유로워진 거고"라며 나름의 항변도 했었다. 아뿔싸. 나도 모르게 "라떼는~"을 얘기하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남편은 "그렇게 말하면 그 친구는 '김차장 꼰대네'라고 생각하겠네"라며 웃었다. "그래서 나도 그 얘긴 안 했어"라며 꼰대 짓은 절대 하지 않았다는 소심한 변명을 했었다.
우리는 왜 꼰대가 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것일까? 아마도 꼰대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때문일 것이다. 나 역시도 선배들의 '라떼는~'으로 시작하는 얘기를 들을 때면 '시대가 변한 게 언젠데.... 아직도 옛날 옛적 얘기를 하고 있는 걸까'라는 생각과 함께 들을 생각도 없이 귀를 닫아버리곤 했었다. 막상 선배가 되고 나니 지난날 나의 편협한 사고에 후회감이 밀려온다. 그리고 후배들 역시 내 얘기를 귀담아듣지 않는 것이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나 역시도 나이와 직급에 상관없이 일은 평등하게 해야 된다는 사고를 가진 세대이다. 그러니 나보다 어린 세대들은 그보다 더 평등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선배들이 과거에 회사를 어떻게 키웠는지 얘기할 때면 지금은 열심히 일하지도 않으면서 말로만 추억놀이를 한다고 생각했었다. 후배들만 죽어라 일하고 선배들이 공을 나눠가진다는 생각에 반항심이 들었다. 그러다 나의 위치가 선배들과 가까워져가면서 어느정도는 이해가 되었다. 사람은 경험하는 만큼 보이고 어느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관점이 달라진다. 막상 선배가 되고보니 선배들의 충고도 후배들의 태도도 모두 이해가 되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놓일때가 많았다.
요즘 친구들은 '꼰대'라는 표현보다 '틀딱’이라는 표현을 쓴다고 한다. 20대 초반, 남편의 사촌동생으로부터 들은 단어인데 단어만으로 무슨 뜻인지 유추할 수도 없을 만큼 생소한 단어였다. "틀니 딱딱딱"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뜻을 듣고 보니 꼰대보다 더 과격하고 무서운 표현으로 윗 세대를 규정짓는 것에 섬뜩해졌다. 더욱더 꼰대나 틀딱으로 불리지 않기를 바라게 되었다. 내 주변의 지인들에게 '틀딱’이 뭔 줄 아느냐고 물으니 10명 중 1명이 알까 말까 하는 단어였다. 어느새 나는 젊은 층을 대표하는 세대에서 멀어져가고 있었다. 끼인 세대가 되고 보니 위로도 아래로도 이해가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놓였다. 선배들처럼 내 얘기만 하고 싶지는 않고 후배들에게는 좋은 선배가 되고 싶은 이상적인 마음이 꼰대를 기피하는 현상을 만든 것이다.
나를 닮고 싶다고 말하는 후배가 있는가 하면 대하기 어렵다고 말하는 또 다른 후배도 있었다. 모두에게 똑같이 좋은 사람일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상대가 나를 꼰대로 생각할까 봐 조언하는 것을 주저한다면 후배들과의 대화가 영영 단절될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공감할 수도 어떤 면에서는 나를 꼰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자. 그리고 꼰대라고 생각하면 뭐 어떤가. 내가 선배들을 이해하게 된 것처럼 언젠가 후배들도 나의 진심을 깨닫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
나는 더 이상 꼰대 선배를 대면할 일도 후배들에게 꼰대가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하지 않는다. 회사 다닐 때 그토록 치열하게 고민했던 문제가 더 이상 주된 고민거리가 아니라는 것이 조금 씁쓸하다. 회사라는 조직 안에 있다 보면 얽히고설킨 관계 속에 오고 가는 말과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고 오해가 쌓이는 경우도 생긴다. 과거에 나는 그렇게 쌓인 오해를 '저 선배는 어차피 말이 안 통해. 꼰대야'라고 결론짓고 말을 듣지 않았다. 선배의 모든 조언이나 말이 후배에게 정답일 수는 없다. 나에게 와 닿지 않는 꼰대 같은 얘기들 속에 진심 어린 한 번의 조언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후배들에게도 나는 꼰대가 되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