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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비 Jun 03. 2020

매니저는 처음이라서

실패한 매니저의 이야기


서른넷이 되던 해 생각지도 못하게 매니저가 되었다. 회사에서의 입지로 보면 팀으로 일할 정도의 매출과 업무량으로 밤낮없이 일할 정도였기 때문에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혼자 일하는 것이 익숙해져 있던 터라 갑자기 생긴 부하직원이 어색하기만 했다. 누군가를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 조금 부담스러웠고 두려운 마음도 들었다. 한편으로는 매니저로서의 새로운 도전에 설레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외로웠던 회사생활에 내 편이 생긴다는 막연한 기대를 했던 것 같다. 어떤 사람이 오게 될지 앞으로 나에게 어떤 일이 생기게 될지 아무것도 모른 채 말이다.


외국계 회사는 보통 경력직을 채용하는데 관련 업계의 경력도 있고 나보다 어린 직원을 찾는 것이 무척 어려웠다. 그래서 영업 경력이 없다 하더라도 잠재력이 있는 후보자들 중 제일 괜찮은 친구를 채용했다. 그렇게 A과장이 입사했고 나의 첫 팀원이 생겼다. 그동안 혼자서만 일해왔는데 팀으로 일하는 것에 적응하기까지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열심히 일하는 능력은 타고난 반면 일을 시키는 능력은 부족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회사에서 팀을 만들어준다고 했을 때 막연하게 그렸던 이상적인 팀의 모습이 있었다. 일이 바쁠 때 서로 도와주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어려움을 나누는 사이가 되어 일도 개인적인 삶도 균형을 이루고 싶었다. 어쩌면 내가 가진 생각의 깊이를 나눌 수 있는 완벽한 파트너를 원했던 것도 같다. 애초에 시작부터 너무 거창했고 팀원에 대한 이상적인 그림도 그렸으니 이 관계의 시작은 나의 마음에서부터 잘못되었던 것이다.


매니저가 되기 전까지는 누군가에게 일을 시키는 경험을 할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팀원이 생기니 혼란 그 자체였다. 어느 범위까지 알려줘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고 내가 일하는 모든 것을 알려주면 알아서 잘하리라 생각했다. 내가 일하는 것을 보면 따로 일일이 지시하지 않아도 티키타카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실패 요인은 모든 사람이 나와 같지 않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는 것이다. 사람은 저마다 생각이 다르고 회사를 대하는 태도로 다르기 마련이다. A과장은 나와 같은 직업관을 가진 친구가 아니었고 주어진 일은 잘 해내지만 그 외에 일은 하지 않으려는 성향이었다. 지시를 기다리는 친구에게 알아서 하기를 기대했으니 한참 잘못된 방법이었다.


처음 매니저가 되었을 때 마냥 들뜬 마음에 착한 매니저병에 걸렸던 것 같다. 일을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누릴 수 있는 회사의 편의를 먼저 얘기했고 매니저의 고충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얘기했다. 솔직함이 지나쳐 엄청난 실수도 함께 저지르고 말았다. 늘 회사생활이 외로웠고 마음을 나눌 누군가를 갈망해왔는데 그 누군가가 나의 팀원이 될 거라는 막연한 확신이 실수의 시작이었다. 회사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어려움과 내가 지금까지 겪었던 고충 그리고 묵혀왔던 감정들까지 이제 갓 새로 입사한 친구에게 다 털어놓았다. 시간이 흐른 뒤 그녀와의 관계가 어려워지고 나서 제일 후회되는 일이 처음부터 속내를 다 드러내 놓고 보여줬던 것이다. 한참 뒤에 그녀에게 매니저로서의 고충을 듣는 것이 힘들었다는 피드백을 들었을 때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전까지는 나의 실수도 까맣게 모를 정도로 착한 매니저의 역할에 취해있었다.


관계가 악화되면서 개선해보려고 대화를 시도해보기도 하고 함께 술을 마시기도 했다. 그런데 조직이라는 곳이 둘만 해결해서는 안 되는 곳이라는 걸 미처 알지 못했다. 팀 내의 문제가 있다는 것을 회사의 다른 사람들도 알게 되었고 우리 팀의 문제가 회사에서는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중간에서 말을 왜곡해 전달하는 일이 생기기도 했고 그런 과정 속에 A과장 역시 해서는 안 될 실수를 하고 말았다. 나에 대해 안 좋은 얘기를 사람들에게 하고 만 것이다. 뒤에서 하는 얘기들은 꼭 당사자에게 부메랑처럼 돌아온다. 나에 대한 얘기가 들려왔을 때 나는 그녀의 어리석음에 화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이미 마음이 떠나 있었다. 그녀의 실수에 대해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그녀도 인지할 때쯤 둘 만의 회식을 했다. 첫 술잔을 넘기자마자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허심탄회하게 왜 그랬는지 이유라도 들어보자는 심산이었다.


"과장님, 팀과 관련해서 내가 알아야 될 일이 있다면 오늘 솔직하게 다 얘기하세요."


"제가 차장님에 대해 안 좋은 얘기를 했어요. 차장님이 파트너들한테 우리 세일즈들 욕하고 다닌다고."


"왜 그랬는데요?"


"차장님이 저를 자르려고 하는 줄 알고 미워서 그랬어요. 그렇게 들었거든요."


"그럼 나한테 사실관계를 확인했어야지. 사실관계도 확인 안 하고 그런 얘기를 했다고?"


"네. 죄송해요. 근데 사람들은 다 차장님을 인정해요. 제가 그렇게 말했는데도 차장님을 칭찬하셨어요. 그래서 저도 괜히 말했다고 생각했고 후회했어요. 정말 잘못했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말하고 다니면 내 귀에 안 들어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니요. 들어갈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전 망했어요."


망했다는 그녀의 말에 어이가 없어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말문이 턱 막혔다. 도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될지 사실 나도 잘 몰랐던 것 같다. 이내 A과장은 본인이 얼마나 괴로웠는지에 대해 얘기를 이어갔다.


"정말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그동안 저도 제 잘못을 스스로 돌아보는 게 너무 어려웠어요. 그런데 계속 생각해보니 제가 정말 잘못했더라고요. 저도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고 제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어요."


이 말 한마디 때문에 나는 그녀를 용서했었다. 잘못을 돌아보는 과정을 경험했다는 말에 달라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었던 것 같다.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고 나 역시도 과거에는 개념 없는 행동도 했었으니까.


그녀의 말에 나는 진심을 얘기했다.


"나 자신을 마주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 그래도 그 경험을 했다니 다행이네요. 죽을 때까지 모르는 사람도 많을 텐데 말이에요..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


"저는 지금까지 어떤 사람과도 나쁘게 끝나 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차장님과도 나쁘게 끝나고 싶지 않아요.”


"지금까지 한 번도 나쁜 관계가 없었다고?"


"네. 한 번도 없었어요. 앞으로 3개월 동안 차장님 마음에 들게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동안은 열심히 일하지 않았던 거 인정해요. 앞으로는 정말 달라지겠습니다."


"그래요. 본인이 깨달은 바가 있을 테니 열심히 할 거라고 믿어요. 오늘 솔직하게 얘기해줘서 고맙고 나도 앞으로는 편견 없이 보려고 노력할게요."


내심 불안한 마음과 기대가 공존했다. 그동안 누구와도 나쁜 관계로 지낸 적이 없다는 말에 불안했다. 사람은 완벽하지 않은데 어떻게 나쁜 관계였던 적이 없었을까? 상대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고 본인 편할 대로 생각하는 친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불안보다는 기대가 더 컸던 것 같다. 잘못을 마주하고 스스로 털어놓는 경험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변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허심탄회한 대화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이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다. 이 날 나는 꽤 괜찮은 매니저가 된 것 같아 만족스러웠고 그 날의 대화로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줄 수 있게 되었다는 엄청난 착각에 빠졌었다. 누군가의 인생을 쉽게 바꿔줄 수는 없는데 말이다. 착한 매니저는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던 것이다.


그 날 이후로도 그녀는 지시하는 일은 잘했지만 그 외의 일은 따로 지시할 때까지 하지 않았다. 나는 매번 일을 시키는 것이 버거워졌고 그녀가 적당히 일하며 회사생활을 편하게 하는 것처럼 보여 성에 차지 않았다. 점점 지적하는 날들이 많아졌고 그럴 때마다 그녀는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로가 답답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시키는 일을 다 했는데 대체 뭐가 문제지?' 였을 것이고, 내 입장에서는 '일을 시키는 것이 두 배로 힘들다. 그냥 혼자 하는 게 낫겠다'였다. 그렇게 점점 대화하는 것조차 어려워졌고 서로의 오해는 쌓여만 갔다. 관계가 힘들어지는 만큼 회사생활도 점점 지쳐갔다. 물론 관계는 나만 힘든 것은 아니었다. A과장도 나와의 관계를 무척 힘들어했고 우리의 관계는 마치 헤어지기 직전의 연인 사이 같았다. 아무리 대화를 해봐도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연인 사이는 헤어지면 그만이지만 먹고사는 문제가 달린 일에 둘 중 하나가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과적으로 여러 가지 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혀 나는 퇴사를 하게 되었고 이제 더 이상 팀에 대한 스트레스는 없다. 그런데도 팀원에 대한 기억은 여전히 나에게 무거운 주제이다. 매니저로서의 어려움이 퇴사를 결심하게 된 트리거가 되기도 했고 관계에 대한 어려움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실패를 똑바로 마주하고 돌아보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 같아 글로 쓰려한다. 나는 매니저로서 실패했고 그 실패의 경험은 꽤 쓰린 기억을 남겼다. 그래도 얻은 것이 있다면 다음에 같은 경험을 하게 되었을 때 적어도 같은 실수는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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