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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stain Life Sep 14. 2023

무해한 행성

스마클릭



지속 가능한 삶이 곳곳에 펼쳐진 도시, 겐트. 시민들의 자발적인 '커먼즈' 활동은 '지속 가능성'이 더 이상 뜬 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님을 몸소 보여주고 있다. 겐트에서도 커먼즈가 가장 활성화된 분야는 식문화다. 겐트시는 'Gent en Garde'라는 플랫폼을 통해 공정하게 생산된 유기농 지역 식품 유통을 장려한다. 지속 가능하며 건강한 식품 생태계를 추구하며 도시와 농촌을 연계하여 생산자와 소비자의 거리를 좁힌다.


도시의 생태계는 유기적이다. 얽히고설켜 서로 영향을 미치며 결국엔 어떤 흐름을 형성한다. 마치 산에서 계곡을 타고 흐르는 얇은 물줄기가 커다란 지류를 형성해 강을 만들고 광대한 바다를 향해 나아가듯 말이다. 겐트의 모든 게 커먼즈를 향한 것도 아닐 테고 지속가능한 삶을 위해 수렴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합치점을 찾기 위해 발을 맞춰가는 과정의 연속일 것이다. 그 흐름이 '지속 가능성'이라는 작지만 커다란 지류를 만들어 낸 것이리라.




겐트에서 장을 보기 위해 가장 먼저 들른 곳은 <BIO PLANET>이라는 체인점이었다.  <BIO PLANET>은 Colruyt 그룹에서 운영하는 자사 브랜드 슈퍼마켓이다. 운영의 주체가 대기업이라는 사실은 커먼즈의 철학과 궤를 나란히 하기엔 어불성설인 듯도 싶다. 그러나 기업이 걸어온 길을 살펴보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지점에서 한 번쯤 생각을 톱아보게 될 것이다.


1928년, 브뤼셀에서 남쪽으로 떨어진 할레 Halle 지방의 작은 마을 Leembeek에서 식료품점을 운영하던 Baker Franz Colruyt 가 Colruyt 그룹의 시초다. 유럽을 뒤흔든 전란 속에서 사업을 다져오던 Colruyt 부자는 1953년 'Boni'라는 상점을 열고 미국식 체인 슈퍼마켓 모델을 받아들여 'Super Boni'라는 체인 마켓을 확장해 나간다. 그렇게 자본주의의 총아로 성장해 가던 Colruyt 그룹은 1984년 파산 위기를 겪게 되고 생태와 경제가 공존하는 방향으로 선회한다. 1999년 할레 최초의 풍력 터빈 건설을 주도하며 지속가능성을 이정표로 삼은 것이다. 이후 기업의 성장이 무한정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경제성의 추구가 생태와 사회가 맞물려 지속가능한 방향으로 흘러가도록 구체화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탄생한 브랜드가 바로 <Bio Planet>이다.




장을 볼 때면 늘 먼저 발길이 닿는 곳, 제철 식재료가 진열된 코너다. 6월에 접어든 당시, 파프리카는 끝물이며 딸기가 한창임을 알려주는 포스터가 곳곳에 붙어있다.




op het ritme van de seizoenen
계절의 리듬에 맞춰

5월엔 "계절의 리듬에 맞춰" 다음과 같은 야채와 과일을 실컷 즐기세요.

파프리카, 콜라비, 청경채, 루바브(대황), 근대, 화이트 아스파라거스가 지천에 널렸답니다.




제품과 육가공품이 진열된 선반으로 눈을 돌린다. 종류도, 형태도 너무도 다양해 무언가 섣불리 점찍을 수가 없다. 다만, 모든 제품에 'Bio' 마크가 붙어있다는 사실.

 


명성이 자자한 벨기에 와플과 돌돌 말린 어여쁜 파스타, 갖가지 차와 곡물류, 귀뚜라미 시리얼 같은 대체식품까지. 유기농 제품이라면 웃돈을 주고 사야 하는 환경에 익숙해서인지 유기농 시장에 형성된 물가가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던 순간들. 진열된 모든 것이 궁금했지만 호기심을 남기고 발길을 돌린다. 슈퍼마켓에 들어가면 나의 시간은 축소되는 경향이 있다.



빵이 그득 쌓인 선반 사이로 요리책이 매달려 있다. 채소와 과일을 다룬 비건식이 유럽의 식탁을 물들이고 있는 건 자명한 사실인 듯하다. 우측 하단에 진열된 <SOUL KITCHEN>을 발간한 'LANNOO'가 바로 우리의 프로젝트를 이끄는 주체다. 벨기에 최대 실용서 전문 출판사.



부르는 이름만 다를 뿐, 우리에게도 익숙한 씨앗들, 흙조차 오염되지 않은.



모순일까. 지속가능한 삶을 위해 채식을 지향하고 탄소 저감 정책을 펼치면서도 육가공품 소비는 떨쳐낼 수 없는 현실. 벨기에 사람들에게 소시지와 치즈는 우리에게 밥과 김치, 된장 같은 존재다. 저녁거리를 찾아 반찬 가게를 헤매듯 식사 시간이 다가오면 정육점과 치즈 진열대는 사람들로 붐빈다. 우리 역시 정육점에 들러 저녁거리를 챙겼다. 뜨거운 기름 위에 올리면 툭 터져버릴 듯한 생 소시지로.  



"신선한 유기농 과일과 야채, 고기와 채소, 치즈와 와인, 빵과 스프레드 등 맛있는 식료품은 물론 생태학적으로 관리된 청소 용품 모두를 구입할 수 있습니다. 지속 가능하고 건강하며 맛있고 순수한 음식을 좋아한다면, 제대로 찾아오셨습니다 <Bio-Planet>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Bio-Planet>의 소개 문구다. 우리는 빗자루와 쓰레받기가 하나로 묶인 청소 용품을 샀다. 이유는 거창하지 않다. 디자인이 예뻐서. 서울로 돌아와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고양이 화장실 앞에 두고서 모래가 튈 때마다 여전히 잘 사용하고 있다. 5년이 흘렀음에도 닳거나 부러진 곳이 없으니 내구성은 좋은 듯하다.



계산대가 가까워오면 왠지 모를 초조함과 긴장감이 엄습하던 나의 생체 리듬이 이곳에선 작용하지 않았다. 그저 느긋했다. 서로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줄을 선 사람들이 전혀 서두르지 않은 탓이다. 커먼즈며, 지속가능성이며 알면 알수록 알쏭달쏭하지만 <Bio-Planet>이라는 슈퍼마켓이 구축한 이 작은 세계가 무해한 행성이고자 했던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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