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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윌로 Nov 21. 2023

떠나는 날, 우리 집이 이렇게 아늑했었나

D-day

 출국 전날, 아이가 편지를 줬다.

지금 읽지 말고 꼭 출장 가서 보라면서 생각날 때마다 짐을 던져 넣느라 활짝 펼쳐져 있던 캐리어에 숨기듯 넣어 두었다. 다음날 아침엔 엄마를 두고 학교 가기 싫어할까 걱정했는데, 그건 내 기우일 뿐, 아이는 평소처럼 씩씩하게 학교에 갔다. 매번 아이는 내 걱정이 무색하게 조금 더 단단하다.


아이가 학교에 가자마자 편지를 읽었다.

여행 기간 3주 중, 마지막 1주일은 남편이 휴가를 내고 아이와 함께 발리로 오기로 했기 때문에 떨어져 있는 기간은 보름쯤이었고 편지마저 씩씩했지만 나는 짐을 다 챙기고, 캐리어를 잠가 현관에 두고 나서도 한동안 거실에 멍하게 앉아있었다.


뭘 두고 가는 것처럼 발길이 무거웠고 새삼 우리 집이 그렇게 포근해 보일 수가 없었는데, 혼자 떠나는 여행이 굉장히 홀가분할 줄 알았기에 상당히 당황스러웠고, 예상을 벗어난 '홀가분하지 않음'은 문 밖을 나서면서 사라지는 줄 알았지만 사소한 이유로 종종 다시 찾아왔다.


 첫째, 매번 남편이 끌고 다녔던 수화물용 캐리어의 바퀴가 부분 마모되어 3주짜리 짐을 (당차게 넣은 약 2kg의 만두카 요가매트 포함) 버티기에 버거웠던 바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캐리어가 움직여주지 않았다. 최근의 여행 때도 분명 이렇게 힘을 써야 했을 텐데 단 한 번도 내게 짐을 미룬 적이 없는 남편이 새삼 고마웠다. (이 캐리어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폐기물 딱지를 붙여 시원하게 버렸다!!)

 둘째, 발리까지는 8시간이 걸리는 대한항공을 이용했는데, 비행시간 대부분을 두통에 시달렸다. 카페인 중독이라 점심시간 즈음까지 커피 2잔을 마시지 않으면 두통이 오는데 두 번째 커피가 늦은 탓인 듯하다. 주문하지 않아도 계속 나오는 기내식/간식/음료...로 식탐을 부리며 영화를 볼 참이었지만, 기내식은 반만 겨우 먹었고 그럼에도 소화가 안 되는 느낌이 지속되었다. 이럴 때 보통 남편이 엄지 손가락 옆을 꾹꾹 눌러줬었는데 내 손으로 누르려니 영 시원하지 않았다.

 셋째, 응우라라이 공항에서 수화물이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같은 비행기에서 내린 내 아이 또래 혹은 그보다 더 어린 여자아이의 신난 모습이 보였다. 갑자기 미안하고 그리운 마음이 들뻔했지만 '괜찮아, 저 아이도 길어야 일주일일 거야, 내 아이도 지금은 아니지만 곧 와서 일주일 보낼 거잖아!' 합리화하며 털어냈다.


 자정에 도착했지만 심한 교통체증으로 우붓으로의 이동은 밤이 좋다는 얘기를 듣고 한국에서 미리 예약해 둔 클룩의 공항택시를 타고 우붓까지 달렸다. 친절한 택시기사가 얼마나 지내다 갈 건지, 일행은 없는지 물어봤는데 의심 많은 나는 "남편과 아이가 먼저 우붓에 가있고, 나는 일 때문에 하루 늦게 도착했다"라고 거짓말을 했다. 사심 없어 보이는 사람이라 거짓말이 꽤 미안했지만, 사고는 방심에서 오는 거니까 =)

(물론 이 거짓말은 나중에 또 거짓말을 낳았다!)


 아고다에서 예약한 우붓의 숙소비는 현금으로 지불하도록 되어 있어서 공항 ATM에서 바로 트레블월렛으로 출금을 시도했지만 실패했었다. 화면에 '문제가 있으니 안내를 확인하라'는 류의 문구가 출력되었고, 내 앞사람도 내 뒷사람도 출금에 실패하는 걸 보고 그냥 나온 참이라 기사님에게 ATM 있는 곳에 들러달라고 요청했다. 그렇게 내린 곳에서도 오류가 났다. 당황해하는 나를 본 현지인 커플이 도와주겠다고 왔다. 굉장히 친절했고, 비밀번호를 누를 때는 한발 뒤로 물러나는 배려도 잊지 않아 줘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그러나 결국 실패했다. 이번에는 비밀번호 오류였는데, 월렛을 처음 써본 나는 비번이 틀리면 카드 이용이 정지될까 봐, 이미 인도네시아 돈으로 환전해 넣어둔 상태이므로 더 시도하지 못하고 결국 신용카드 현금서비스를 이용하고 말았다.

(물론 트레블월렛은 그런 걱정 따위 할 필요 없이 앱에서 풀고 닫고 가 자유로운 서비스였다는 걸 다음 날 깨달은 신문물 초심자)


 마침내 우붓 여행을 생각할 때부터 점찍어뒀던,  '위생점수 포함 아고다 별첨 최상위의 1박당 4만 원짜리 숙소'에 도착했다. 현금서비스를 받을 때, 이자(큰돈은 아니다만) 생각해서 양해를 구해야겠다 하고 숙박비의 절반만 뽑았었는데 체크인과정이 끝날 때까지 돈 얘기를 안 하길래 먼저 물어봤다. 세상 쿨하게 지금 줘도 되고 나갈 때 줘도 되고 아무 때나 달라고....?! 나 괜히 쓸데없이 현금 때문에 마음 졸였네? 생각해 보니 체크인할 때 전액 지불해야 된다는 조건은 아무 데도 안 쓰여있었는데, 좀 빡빡한 생각이 배어있던 것 같다. 


여기서, 흐트러뜨리고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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