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삶에서 비극적인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 행복을 향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위험이 줄어들고 안정성이 높아질수록 평화와 행복이 보장된다고. 그러나 그런 사고방식은 우리의 영혼을 나이 들게 하고 영원히 피곤하고 지루한 일상의 감옥에 가둘 뿐이다. 오히려 역동적인 자유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고 획일적인 삶이 안전을 보장한다는 착각에서 벗어나는 순간 비로소 안전을 획득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을 긍정하게 하는 경험은 자발적인 체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특히 극단적인 상황에 자신을 던져 온몸의 감각으로 갈등에 부딪혀야 진짜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
나는 오랫동안 인간관계를 맺는 데 있어 성숙한 태도란 무엇일지 고민했다. 나이가 들수록, 서로의 다름을 건드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은 관계를 만들 거라고 생각했다. 이론적으로 훌륭해 보이지만 실천하기는 쉽지 않았다.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 사이의 선을 건드리지 않는 이유는 그 사람을 인정하고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니라 건드렸다간 괜히 귀찮고 사이가 멀어질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스무 살 때부터 많은 시간을 공유해오고 있는 친구 G와는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모든 것을 말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는 통하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건 나의 기대에 불과했고, 우리 사이에 민감한 주제들이 분명히 존재했음에도 나는 그걸 굳이 언급해 문제를 악화시키고 싶지 않았다. 여성 문제가 대체로 그러했다. 감수성이 풍부하고 나와 친밀한 사이라고 해서 생물학적 남성이 쉽게 여성의 삶을 상상하고 이해할 수 있을 리 없는데도, 나는 그 사실을 계속 외면해왔다. 그리고 그 문제가 마침내 수면 위로 올라왔을 때, 물리적으로는 아주 가까운 사람이 정신적으로는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사실에 크게 충격받았다.
어떻게 이 문제에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을까? 감정적인 슬픔과 배신감 따위를 느끼며 분노와 실망의 롤러코스터를 오르내렸다. 표면적으로는 관계에 아무런 흠집이 없는 것처럼 다시금 그 문제를 언급하지 않으며 지냈지만 그건 오래갈 수 있는 침묵이 아니다. 내가 입을 다물고 전처럼 잘 지내는 척을 해봤자 그것은 서로를 기만하는 연극에 불과하다.
결국 이 선을 그은 사람은 나라는 걸 깨달았다. 상대의 생각을 많이 궁금해하고, 질문을 던지고 대화를 나눠 그 선을 차츰 지워나가야 했다는 것도 뒤늦게 깨달았다. 진실한 관계는 갈등에 부딪히며 만들어가는 것이지 극단적 입장을 내버려 둔 채 외면한다면, 지금은 좋을지 몰라도 서서히 그러나 완전히 관계를 끝내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건 지레짐작으로 타인을 평가하고, 내 마음대로 단정 짓고 포기한다는 말이나 다를 바 없었다! 나는 G와의 관계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조금 귀찮고 스트레스를 받겠지만 기꺼이 부딪히고 싶었다.
포기의 방식은 타인을 대할 때만 나쁜 게 아니다. 사회를 생각할 때, 나 자신의 문제를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원래 세상 돌아가는 게 그렇지 뭐. 돈 있는 사람은 법 어겨도 괜찮고, 세상엔 원래 비리가 많고, 돈이 최고고, 좋은 게 좋은 거니까 남들처럼 살면 돼.’
‘내가 원래 그렇지 뭐.’
이런 생각은 가능성과 미래를 끊어내 버리는 것이다. 지독한 패배감과 에너지를 앗아가고 다음 기회에는 시도조차 하지 않게 되면서 차차 자기혐오로 발전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런 식의 자기 파괴적인 생각과 행동에 너무나 익숙해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