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육아잡담록: 육아인과 인구증가의 상관관계에 관한 가설
1.
땅에 발 딛고 사는 동물 중 인간만큼 허약한 개체도 찾기 힘들다. 빠르지도 않아, 힘도 약해, 이빨도 무뎌, 눈도 느리다. 매일매일이 죽기 딱 좋은 날씨다.
허나 이 동물이 끝내주는 게 하나 있으니 바로 장거리 달리기다. 한 공간에 1:1로 가둬놓으면 먹히기 딱 좋은 이 최약체는, 힘을 합친다면 어떤 동물도 지치고 지칠 때까지 쫓아가 결국 먹잇감에서 포식자로 지위를 바꾼다.
그렇게 매머드까지 잡아먹고 산 게 너와 나의 조상들이다.
2.
인간은 우째 고따구로 약해 빠졌는데 장거리에서만큼은 그리 강할까. 진화학에서 주요 장면으로 다루기도 하는 이 비결의 출발점은 이렇다. 약한데 절박하니까, 그런데도 살아가야 하니까.
이상하다. 모든 면에서 압도적인 상대를 몇십 킬로, 때론 수 백 킬로 이상 끈질기게 쫓아가고 또 쫓아가 기어코 일용할 양식으로 만드는 이 변태적 끈질김은 분명 협동력과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알다시피 인간은 협동력은 있지만 체력은 형편없다. 직립보행의 장점이라지만 누가 봐도 한계를 넘어선 끈질김 아닌가.
1979년, 미국의 심리학자 A.J. 멘델은 자신의 논문에서 이를 유추할 단서를 언급한다.
러너스 하이.
3.
요약하면 졸라 고통스러운데 그걸 넘어서면 기분이 째진다. 대충 현재까지의 연구결과까지 퉁치면 1분에 120회 이상의 심장박동수가 동반되는 강도로 30분 정도 달리면 체내에서 자체뽕이 아흥하고 샘솟는다는 얘기다.
흔히 마라토너들이 느낀다는 이 기분은 죽을 것 같다가 마약을 한 것과 같은 기쁨, 행복감, 쾌락이 오는데 정말로 마약과 같아서 여기에 중독되어 몸을 스스로 망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4.
진화의 관점에서 생명연장, 즉, 유전자를 계속 퍼트리기 위해 읏샤웃샤 노력한 결과로 대개 두 가지를 꼽는다. 하나는 DNA의 전파를 유도하는(아이를 만드는) 섹스의 ‘쾌락’이고 하나는 DNA의 안전을 도모하는(아이를 보살피게 하는)’사랑’이라는 감정의 탄생이다.
허나 모든 개체에선 설명하기 힘든 이상한 녀석들이 나타나기 마련이고 걔중엔 섹스로 인한 쾌락이 생각보다 크지 않으며 사랑이라는 감정도 평균보다 시니컬한 개체가 있다. 문화적인 영향이 아니라 태생적으로.
그럼 이런 인간이 우짜다 자식을 가지면?
본인이나 자식이 행복하지 않을 확률이 높고 무엇보다 부모가 자식을 버릴 확률도 높다. 그 자식이 병이나 여타 사고로 죽을 확률도 높다. 왜, 보살피지 않으니까.
아이를 키우며 어마어마한 시간 동안 거듭한 진화, 혹은 DNA의 방어체계가 생각보다 허술하지 않나 의심한다. 굳이 태생적인 영향이 아니더라도, 비록 자기 자식이라도, 장기간 보살피며 변치 않게 사랑하는 건 무쟈게 힘들기 때문이다.
딱히 터닝 포인트가 없다면 사랑이 지속될 확률보다 사랑의 끝이 존재할 확률이 더 높은 게 합리적이니 않을까.
의문은 이렇다. 헌데 우째 인간은 계속 육아를 할 수 있는 걸까? 한 명까진 본능적인 사고(?)라 몰랐다 치고 어떻게 그 고생을 했음에도 또 낳는 선택을 하는 걸까?
5.
육아인이라면 95% 이상 신체적, 감정적 한계를 경험한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의 극에 간당간당 매달린 사회에서(돈이 없네? 앞으로도 없을 것 같네?!), 공동체가 처절히 박살난 상황이 지속되는데(이제는 옆집에 가서 밥 한 공기를 얻으려 하거나 애를 잠시 맡길 수 없다!), 대부분 부부가 오롯이 아이를 케어해야 한다는 건(운이 없으면 혼자), 노동의 역사와 전투가 이렇게나 길었는데도 아직도 노동자가 비참한 아이러니만큼이나 육아인을 고통스럽게 한다.
근디 어라라?
이상하게도, 인류는 계속 증가한다. 불과 얼마 전까지 강한 인간을 묘사할 때 60억 분의 1이라는 문구를 쓴 듯한데 곧 80억 분의 1이라는 말을 써야 한다.
딱히 별 일이 없다면 세계 인구수는 내가 살아있는 동안 100억 돌파가 확실시된다.
6.
엉망진창이라는 세계에서, 문명은 발전했으나 육아 환경은 그 속도를 쫓아가지 못하는 세상에서, 초연결사회라 상대적인 박탈감이 가속화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도대체 왜 계속 아이를 낳고 또 키울까.
내겐 단순히 성관계가 주는 쾌락이나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설명되지 못하는 지점이 있다. 쾌락은 순간이고 사랑도 영원하지 않다. 육아를 지속하기 위해선 무언가, 무언가 더 있어야 한다. 문명사적으로 큰 사건 사고가 없는 이상 인간은 계속 느는 것이 ‘평균’이기 때문이다.
는다는 건 인간의 문명이 발달해 죽지 않기도 하지만 더불어, 그만큼 계속 낳아 보살핀다는 뜻이다. 내가 아는 한 인간은 그리 책임감이 강한 존재도 아니고(특히 저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렇게 진화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7.
육아 4년 차, 문득, 1살과 4살을 함께 키우며 육아 스타트 이후로 한 번도 장기간 휴식을 얻은 적이 없는 우리 부부는 문득 아이를 돌보고 뻗기 일보직전, 멍하게 휴대폰으로 아이 사진을 보고 혹은 아이 사진을 교환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보며 자각한다(물론 매일 그러진 않습니다. 그 정도로 육아 변태는 아닙니다).
와, 하루 종일 그렇게 미친 듯이 육아를 하다 지쳐 쓰러지기 직전인데 애 사진을 보면서 또 흐뭇해하네…?!
글타.
달리기계에 “러너스 하이”가 있다면 “육아계”엔 “육아스 하이”가 존재한다.
이게 나의 가설이다.
(대충 패런츠 하이, 육아인스 하이라고 해야 할 것만 같지만 영어 잘 모르니까 대충 러너스 하이에서 리듬만 살려봤습니다. 난 한국인이니까 K-영어~ 룰루랄라~)
8.
모르긴 몰라도 일정기간 이상 육아를 하는 인간은 반드시 정신적, 신체적 한계를 경험하고 동시에 “육아스 하이”를 경험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부부가 아이를 키우다 신체적, 정신적 한계에 도달하다가도 어떤 순간에, 만물에 욕심이나 집착이 사라지고 오직 가족과 함께 울고 웃는 이 순간만이 최대의 보상 그 자체인 동시에 행복 혹은 인간 감정의 극한값이라는 느낌을 최소 한 번 이상 경험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약의 지속시간과 마찬가지로 일정 시간이 지나면 각종 희로애락으로 희석되지만 생애 다시없을 듯한 강렬한 감정임은 분명하다. 흔히 하는 농담처럼, “육아스 하이”의 여파가 남아 있을 땐, 애가 더 있으면 좋지 않을까, 그다음 아이는 어떻게 생겼을까, 하는 미친 생각마저 가능케 하니 말이다(물론 생각뿐 실행에 옮길 만큼 강한 인간은 아니니 더 낳아라, 같은 악담은 말아주세요).
이 자체뽕, 혹은 독특한 감정이 대책 없이 늘어나는 인류의 원인 중 하나로 설명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고통스러운데도 계속 아이를 낳고 보살피는 이 현상은, 마치 인간의 "러너스 하이"처럼, 인간의 본능조차 극한의 경험은 모두 해결하지 못하는 지점이 있기에 보조장치로 “육아스 하이”가 작동할 수 있게 진화한 것 아닐까.
요즘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으음. 과연 인간은 참으로, 괴상하다.
… …
물론, 내 자식은 더 괴상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