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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신영 May 30. 2021

인상주의의 태동,
낭만주의와 사실주의 이해하기

시민혁명-낭만주의-사실주의-인상주의

왜 '빛'이었을까.

모네와 르누아르 외에도 드가, 세잔, 시슬리, 카사트처럼 이 책에서 다루지 못한 수많은 인상주의 화가들은 '빛을 그린다'는 아이디어로 새로운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그림들은 모던 미술로 가는 문을 열어주었다. 

그런데 다음으로 넘어가기 전에 이런 의문을 한번 가져볼 수 있다. 왜 하필 '빛'이었을까. 모네와 함께 카페에서 고민하던 르누아르, 시슬리, 바지유 이렇게 4명은 왜 갑자기 '빛을 그린다'는 이상한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되었냐는 것이다. 꼭 '빛을 그리는 그림'이어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이상한 인상주의 탄생의 기원은 시민혁명 그 자체에 있었다. 하지만 아마도 그렇게 말하면 오히려 더 이상하게 느껴질 것이다. 화가들이 빛을 포착해서 그리는 것과 시민들이 왕을 처형하고 자유를 얻는 것, 그러니까 '빛의 그림'과 '민주주의' 사이에는 아무런 논리적 연관성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상주의의 탄생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상하게도 시민혁명이 '빛을 그리는 그림'이 탄생하도록 멀리서 유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멀리서'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둘 사이에 100년이라는 시간 간격이 있기 때문인데, 말하자면 시민혁명은 100년 뒤쯤에 '빛의 그림'이 탄생하도록 미리 손을 써 놓았다는 것이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실제로 그러했다.

시민혁명은 어떻게 100년이라는 시간을 사이에 두고 그런 마법을 부릴 수 있었을까. 이 장에서는 시민혁명이 어떻게 빛의 그림을 탄생시키게 되었는지에 대해 한번 살펴볼 것이다. 


1789년 프랑스 시민혁명 직후 

우선 시민혁명 상황으로 잠시 돌아가 보자. 1793년, 시민혁명이 발생한 지 4년 뒤, 왕의 목은 광장에서 참수되었고 시민들은 자유를 얻었다. 그리고 자유를 얻은 시민들은 이제 왕의 명령이 아닌 각자의 의지대로 자신만의 삶을 살기 시작하게 된다. 

이는 예술가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과거의 화가들이 주로 그리스 신화 이야기, 성경 이야기, 아니면 귀족의 초상화를 그렸던 것은 왕과 귀족들의 궁전과 저택을 꾸밀 그림들, 말하자면 지배계층이 원하는 고급스러운 그림들을 그려왔던 것이다. 그러나 혁명 이후부터 예술가들은 더 이상 이런 그림들을 그릴 필요가 없어지게 된다. 이것이 변화의 시작이다.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1830


컨스터블의 '건초 마차', 1821


프리드리히 '얼음 바다', 1823-24

낭만주의Romanticism

그 첫 번째 변화의 시작은 바로 낭만주의Romanticism의 등장이다. 낭만주의의 대표 그림으로는 위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영국 화가 컨스터블의 '건초 마차', 그리고 독일 화가 카스퍼 프리드리히의 '얼음 바다'가 있다. 

낭만주의의 특징은 무엇일까. 낭만주의 특징은 재미있게도 하나의 사조라고 말하기 민망할 만큼 서로 공통점이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위 세 그림은 낭만주의의 대표 그림이라고는 하지만 아무리 봐도 공통점을 찾을 수가 없다. 총을 들고 혁명을 완수하는 그림과 시골 풍경 그림, 그리고 저 먼 오지의 빙하 그림에서 도대체 무슨 공통점이 있겠는가. 

낭만주의에서 중요시하는 것은 개인의 낭만 혹은 개인의 관심사다. 그래서 낭만주의의 주제는 다양할 수밖에 없다. 자유를 찾은 모든 개인은 각자 자신만의 꿈과 이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면 혁명을 꿈꾸는 사람은 혁명의 그림을, 시골 풍경에 끌리는 사람은 시골 풍경을, 그리고 저 먼 오지의 대자연을 꿈꾸는 사람은 대자연을 그리는 식이다. 이런 낭만주의의 경향은 독일 낭만주의의 대표화가인 프리드리히의 말에서 잘 드러난다.

"화가는 자신 앞에 있는 것 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것도 그릴 수 있어야 한다." 

내면의 소리, 즉 개인성을 중시하는 것이다.

낭만주의에서 귀족적 취향은 거의 고려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의 경우, 이 그림을 귀족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림 내용으로 보면 평민 계급이 자유의 여신과 함께 귀족들을 짓밟고 혁명을 완수하는 그림인데 왕이나 귀족들 입장에서 지금 자기들을 밟아 죽이겠다는 그림을 좋아했을 리가 없다. 


언어적 혼동

잠깐 덧붙이자면, 예리한 사람들은 아마 이런 의구심을 가졌을 것이다. '왜 낭만주의에는 낭만적 이야기가 없을까?' 우리는 보통 낭만 하면 남녀 간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를 떠올리는데 낭만주의의 대표 그림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만 봐도 총과 칼을 꼬나쥐고 혁명을 완수하는, '낭만'과는 전혀 상관없는 오히려 폭력적인 그림이기 때문이다.

이는 낭만주의라는 말 자체가 원래 문학에서 사용하던 말을 미술에서 가져다 쓴 것이기 때문에 생긴 혼동이다. 혁명 이후 유럽 사회는 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변화를 겪게 되는데, 미술뿐 아니라 문학, 음악 등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중에 특히 문학 쪽에서는 혁명 이후 새로 등장한 문학들이 로만Roman어로 쓰인 중세의 기사 문학과 성격이 비슷했기 때문에 Romanticism, 즉 낭만주의라는 말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 용어는 18세기 말 유럽 문화를 전반적으로 지칭하는 말로 확장되어 미술에서도 쓰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미술에서의 낭만주의와 문학에서의 낭만주의는 약간 성격이 다를 수밖에 없는데, 넓게 '개인의 낭만'정도로 이해해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이다.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 (1857)


구스타브 쿠르베의 '마을의 여인들' (1851-2) 195cm X 261cm

사실주의Realism의 등장

낭만주의의 다음 등장한 사조는 사실주의Realism다. 사실주의의 대표 그림은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인데, 그림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농촌이나 소시민을 그린 매우 친서민적 미술이다.

사실주의는 낭만주의에는 파생된 성격의 미술이다. 낭만주의에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여러 다양한 경향의 그림들이 동시에 등장했는데 그중에는 특히 농촌과 서민들의 삶에 관심을 가진 예술가들이 있었다. 이들이 따로 발전하여 계파를 형성한 미술이 사실주의다. 그래서 사실주의는 일종의 '민중 미술'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대표화가로는 밀레와 쿠르베가 있다. 

사실주의는 서민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혁명의 여파가 훨씬 더 직접적으로 드러난 미술이다.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을 생각해 보면, 왕과 귀족의 입장에서 가난한 시골 아낙들이 손에 흙을 묻혀가며 이삭 줍는 모습을 굳이 비싼 돈을 주고 그림으로까지 그려서 봐야 할 필요가 있을까? 아니면 이렇게 소박한 그림들을 귀족들의 화려한 저택을 꾸미는 용도로 사용할 수 있을까? 사실주의의 그림들은 귀족의 입장에서 보면, 감상할 필요도, 벽에 걸 필요도 없는, 전혀 쓸모없는 그림들이다. 그러므로 사실주의는 시민 혁명 이후의 시대상을 가장 정확히 반영한 반 귀족적, 친서민적 미술이다.

마찬가지로, 사실주의에서도 약간의 용어 혼돈이 있다. 사실주의하면 왠지 '굉장히 사실적으로 똑같이 잘 그린 그림'처럼 느껴지는데, 사실주의에서 말하는 '사실'은 서민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리얼Real하게 보여준다는 의미이지 기술적으로 잘 그린 그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Real이라는 단어에는 '현실'이라는 의미도 있으니까 '현실주의'로 번역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지만 이미 그렇게 쓰이고 있으니 이 또한 어쩔 수 없다.


그림의 크기

사실주의의 본질을 잘 보여주는 특징 중 하나는 그림의 '크기'에 관한 것이다. 사실주의의 대표화가였던 쿠르베는 몇몇 그림들을 굉장히 크게 그렸는데 예를 들어 아래의 '마을의 여인들'의 그림의 사이즈는 195cm X 261cm다. 이 정도면 꽤 큰 벽 전체를 채울만한 크기의 그림이다.

그림을 크게 그렸다는 것이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일까. 보통 과거의 미술에서 그림을 크게 그리는 경우는 정치적 의미를 반영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왕의 대관식이라던가, 아니면 중요한 전쟁에서 승리하는 장면이라던가 하는 식으로 크고 중요한 사건을 그릴 때 크게 그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쿠르베가 이토록 크게 그린 '마을의 여인들'은 어떤 사건을 다루고 있을까. 그림의 내용은 어느 마을의 여인들이 길을 가다가 시골의 목동 소녀를 만난 상황을 그린 것이다. 어린 소녀가 소들을 돌보느라 고생하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안쓰러워져서 '얘야 배고플 텐데 빵이라도 하나 먹고 하렴'하면서 빵을 하나 건네주는 상황을 그린 것이다. 그림의 내용은 이것이 전부다. 그런데 쿠르베는 이렇게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이는 서민의 일상을 어마어마한 양의 물감을 쏟아부어가며 벽 전체를 채울 만큼 크게 그린 것이다. 아마 고전 예술가들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림일 텐데, 이 역시 '탈 권력'의 현상을 정확히 보여준다.


카라바조의 '예수 그리스도가 잡히심', 1602


마네의 '뱃놀이' (1874)


사실주의와 인상주의의 과도기, 에두아르 마네

사실주의 다음으로 나타난 미술이 바로 인상주의다. 순서를 잠깐 정리해 본다면, 시민혁명 이후 낭만주의가 가장 먼저 등장했고, 낭만주의의 여러 계열 중에서 서민의 삶을 그리는 사실주의가 등장했으며, 그리고 여기서 다시 인상주의가 등장한다. 

그런데 여기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사실주의는 서민의 삶을 그리는 그림이라고 설명했는데, 인상주의는 그냥 '빛을 그리는 그림'이니까 둘 사이에는 별로 연관성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어떻게 혁명의 느낌이 진하게 나는 사실주의에서 '빛을 그리는 인상주의'가 탄생하게 된 것일까?

그 과정을 이해하려면 우선 두 미술 사이의 과도기에 해당하는 에두아르 마네의 그림을 이해해야 한다. 마네는 사실주의로 보기도 하고 인상주의로 보기도 하는데, 두 미술 사이의 중간쯤에 겹쳐있는 예술가다. 

우선 아래 마네의 그림을 한번 살펴보자. 마네의 그림은 사실주의일까? 일단 서민들의 일상을 그렸다는 점에서 분명 사실주의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왼쪽 여인이 드레스를 입고 있으니까 혹시 귀족이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저 여인은 도시 여인일 뿐 귀족은 아니다. 중앙의 남자가 입고 있는 옷을 봐도 알 수 있지만 저렇게 '러닝셔츠'같은 옷을 걸쳐 입고 배를 타는 것은 격식을 갖춘 귀족의 모습은 아니다. 그런데 마네는 이전 사실주의 그림들과는 조금 다른 특징이 있다. 바로 형식의 문제이다.


형식의 문제

앞서 살펴본 밀레와 쿠르베의 사실주의는 분명 '친서민적' 그림이지만 그리는 방식만 따져 보면 '친귀족적' 과거의 그림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원근법이나 명암법 같은 고전회화에서 사용하는 회화의 기법을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밀레와 쿠르베의 그림은 '서민을 그렸다'는 주제를 빼고 보면 우아한 고전의 명화들과 비슷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마네는 달랐다. 마네는 '주제' 뿐 아니라 그리는 방식, 즉 '형식'에서도 변화를 주기 시작한 것이다.

위 고전 화가 카라바죠의 그림과 아래 마네의 그림을 비교해 보자. 두 그림은 눈에 보기에 무엇이 가장 다르다고 해야 할까? 그냥 봐도 느껴지는 가장 큰 차이는 '깊이감'이다. 고전의 회화는 강하고 깊어 보이지만, 마네의 그림은 어쩐지 가볍고 얕아 보인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할까?

조금 더 자세히, 두 그림에서 인물의 얼굴을 어떻게 표현했는가를 살펴보자. 위 카라바죠의 그림에서 왼쪽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면 눈과 코 아래쪽에 강한 그림자를 그려서 입체감을 강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아래 마네의 그림에서 남자의 얼굴을 보면 얼굴이 전체적으로 흐릿하고 눈, 코, 입이 마치 만화처럼 점만 찍혀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 마네는 이렇게 그린 것일까?

우선 고전회화에서는 입체감을 강조하기 위해서 빛과 그림자를 강조해서 그리곤 했다. 카라바죠의 그림을 보면 왼쪽에서만 빛이 비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왼쪽에 '가상의 조명'이 있다고 가정하고 빛과 그림자를 계산해서 그렸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을 때 조명을 터뜨려 더 극적인 시각적인 효과를 내는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고전회화의 그림은 정돈되어있고 매우 입체적이며, 강하게 느껴진다.

반면 마네는 빛을 전혀 계산하지 않고 그냥 그렸다. 마네의 그림에서 남자의 얼굴은 말 그대로 아무런 보정도 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그대로만 그린 것이다. 사진으로 비교해 본다면 핸드폰 카메라나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대충 찍은 것과 비슷하다. 고전 회화에서 쓰던 회화 기법들을 제거시켜버렸기 때문에 얼굴이 가볍고 얕아 보이는 것이다. 

만약 카라바죠에게 보트 위의 '러닝셔츠'입은 남자를 다시 그려달라고 부탁한다면 카라바죠는 아마 남자의 콧대 오른쪽에 강한 그림자를 주고 눈썹 밑에도 강한 그림자를 더해서 매우 깊이감 있게 그렸을 것이다. 그리고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마네는 이 사람은 도대체 미술 교육을 받기는 한건 가요?'라고 우리에게 물을 것이다. 고전 화가들의 입장에서 보면 마네의 그림은 빛과 그림자를 전혀 사용할 줄 모르는, 미술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은 사람의 그림처럼 느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네는 정말로 실력이 부족해서 빛과 그림자를 사용할 줄 몰랐던 것일까? 마네 역시 뛰어난 화가 밑에서 몇 년 동안 정식으로 교육을 받은 화가였으므로 당연히 빛과 그림자를 계산해서 그릴 수 있었다. 마네는 몰라서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이렇게 그린 것이다. 


내용을 따라가는 형식

그렇다면 마네는 왜 빛과 그림자를 계산하지 않고 그냥 그렸을까.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마네는 솔직하게 '눈에 보이는 그대로' 그렸을 뿐이다. 고전 화가들은 '계산대로' 그렸다면, 마네는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그저 자신의 '눈에 보이는 그대로만' 그렸다는 것이다. 

이는 형식이 내용을 따라가는 현상, 하드웨어가 소프트웨어를 따라가는 현상이다. 사실주의의 핵심 아이디어 즉 소프트웨어는 서민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것이었다. 밭 가는 농부든 거리의 행인이든, 사실주의는 자유로운 소시민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그렸다. 그런데 마네는 여기에 더해 하드웨어까지 바꾸기 시작했다. 마네는 이제 그리는 방식도 '눈에 보이는 그대로'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주의의 '서민의 삶을 있는 그대로' 그린다는 모토를 그리는 방식으로도 전이시켜서 '그냥 눈에 보이는 그대로' 그리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사실주의에서 인상주의로, 마네에서 모네로

이 마네에서 모네를 거쳐 최종적으로 인상주의가 발생한다. 실제로 마네와 모네는 친분이 있었다. 인상주의 초기 4인방이 카페에 모여 토론할 때 나이가 많은 '맡형'느낌이었던 마네도 가끔 와서 같이 미술에 대해 토론하고는 했기 때문이다. 모네는 마네의 방식을 약간 더 발전시키기로 한다. 마네의 그림이 '눈에 보이는 그대로' 그리는 방식이었다면, 과학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은 결국 '빛'이므로 '빛'을 직접 그리면 된다는 것이다. 

근대에 사진기가 처음 등장하면서 근대 사람들은 우리가 실제로 보는 것이 '빛'이라는 것을 과학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모네는 '우리가 실제로 보는 것은 반사된 빛이니까, 진짜 눈에 보이는 그대로 그리려면 반사된 빛을 그리면 된다'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낸 것이다.

이렇게 '빛을 그리는' 인상주의는 시민혁명 이후 낭만주의와 사실주의를 거쳐, 사실주의를 다시 약간 변형한 형태로 탄생한 것이다. 인상주의는 표면적으로는 그저 '빛을 그리는 그림'일뿐이지만, 그 과정을 천천히 뒤밟아 보면 분명 이렇게 시민혁명에서 출발하여 돌고 돌아 탄생한 미술인 것이다. 



"Everything is meant to be"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이 과정은 참 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앞장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인상주의 이후 미술계에는 갑자기 다양한 종류의 미술들이 폭발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고 다양성의 등장은 바로 모던 미술의 시작을 의미한다. 다양성이 모던 미술의 시작인 이유는 시민혁명 이후 등장한 '자유로운 시민사회의 다양성'이라는 시대 변화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민혁명은 시대 변화의 모습을 바로 미술에 반영시키지 않고, 낭만주의와 사실주의라는 사조를 거쳐 충분히 성장시킨 후에 인상주의를 통해 발현시켰다. 마치 건강한 아기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10개월이라는 충분한 '태동'의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시민혁명 이후 낭만주의가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해도 사실주의를 거쳐 100년 뒤쯤 빛을 그리는 인상주의가 등장할 것이라고는 예측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그 인상주의가 모던 미술의 시작을 열 것이라는 것 또한 예측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지나 놓고 보면 미술은 마치 이 모든 과정을 계획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시민혁명 이후 '시민사회의 다양성'이라는 시대 변화의 모습을 충분한 숙성의 시간을 거쳐 가장 완벽한 형태로 미술에 반영시킨 것이다.

미술은 어떤 식으로든 항상 시대를 반영한다는 것을 강조할 수밖에 없다. 앞으로 살펴볼 미술들도 계속 시대의 어떤 모습의 반영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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