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신영 Jan 28. 2024

팝아트, 공장+예술,
앤디 워홀 Andy Warhol


<뉴욕시의 타임스퀘어>


거인, 미국

양차 대전이 끝나고 그렇게 붕괴한 세상 위에, 새로운 거인 미국이 등장합니다. 덩치가 커질 대로 커진 미국은 홀로 전 세상을 압도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말 그대로 세상은 미국이라는 거인이 통제하는 새로운 질서로 개편되기 시작한 것이죠. 

정치질서가 개편되면 그에 따라 문화질서도 개편되기 마련입니다. 물론 문화질서는 당장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의외로 질서가 잡히는 현상을 눈으로 볼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젊은 예술가들이 '어디로' 몰려들어가는지를 보면 되는 것이죠. 양차대전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젊은 예술가들은 으레 프랑스 파리로 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전쟁 이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예술가들은 미국 뉴욕으로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 파리는 떠난 손님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가게의 주인처럼 씁쓸했겠지만 어쨌든 세상은 그렇게 순식간에 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뉴욕은 젊은 예술가들과 그들의 꿈으로 넘쳐나는 화려한 도시로 꽃피기 시작합니다. 뉴욕을 대표하는 노래 중 하나인 프랭크 시트라나의 <New York, New York>이라는 노래에는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Start spreadin' the news. I'm leavin' today. I want to be a part of it. New York, New York.

I want to wake up In a city that doesn't sleep. And find I'm king of the hill Top of the heap.'


'세상에 소식을 알려줘, 나는 오늘 떠나 뉴욕, 뉴욕의 한 부분이 될 거야.

나는 잠들지 않는 도시에서 아침을 맞이할 거야. 그리고 나는 언덕 꼭대기에서 왕이 되고 말 거야.'


정말 가사의 말처럼 당시의 젊은 예술가들은 미국 뉴욕으로 몰려들어 예술가로 성공하는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뉴욕에서 최고가 된다면 세상의 최고가 되는 셈이니까요. 뉴욕에서 잠시 살아본 입장에서는 사람 살기는 그래도 서울이 훨씬 낫다고 말하고 싶지만, 사람을 꿈꾸게 하는 힘은 그 자체로 거대한 소용돌이 같은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앤디 워홀 '코카콜라' 1962>


그렇게 많은 예술가들이 꽃피는 뉴욕의 예술계에 독특한 예술가가 한 명 등장합니다. 이름은 앤디 워홀. 바로 '팝 아트'를 들고 등장한 예술가입니다. 앤디 워홀은 특이하게도 코카콜라 병을 그림으로 잔뜩 그려놓고는 예술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항아리 바나나 우유'를 여러 개 그려놓고는 예술이라고 주장한 것과 비슷합니다. 아무리 자유가 꽃피는 뉴욕이라고 해도, 앤디 워홀은 왜 이런 콜라 따위를 그려놓고는 예술이라고 주장했던 것일까요?


American Dream

나중에 '팝아트의 황제'라는 별명을 얻게되는 앤디 워홀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미국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출신 성분부터 그러합니다. 미국 하면 떠오르는 것 중 하나는 'American Dream'인데, 미국은 가난한 이민자들도 와서 성공할 수 있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앤디 워홀네 가족도 2차세계대전 이후 그렇게 꿈을 품고 미국으로 온 이민가정 중 하나였습니다. 슬로바키아 출신이었던 이들은 펜실베이니아의 한 마을에 정착합니다. 아마 앤디 워홀은 어릴 때까지만 해도 슬로바키아 말과 문화를 배우면서 자랐을 것입니다. 앤디 워홀의 부모님은 이민 1세대가 보통 그러하듯 노동자로 일했는데, 아버지는 탄광에서 일했다고 합니다. 앤디 워홀은 어릴 적부터 아버지로부터 '나는 노동자로 일하지만, 너는 언젠가 꼭 성공해서 사회의 주류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서 자라지 않았을까요. 이민자들이 대게 그러하듯 자신은 그늘에서 살아도 자식들은 그 사회에서 빛을 보기를 바라니까요. 

하지만 몸이 약했던 앤디 워홀은 밖에서 뛰어놀기보다는 침대에 누워서 생활하는 날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전화위복이라고 해야할지 침대에서 끄적거리던 그림이 소질로 발전하여 앤디 워홀은 결국 미대로 진학하게 됩니다. 다만 앤디 워홀은 예술이 아니라 산업 디자인을 전공으로 택했습니다. 아직까지는 이방인이었던 앤디 워홀의 입장에서는 주류사회로 정착하려면 직장을 구할 수 있는 전공이 필요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어쨌든 워홀은 미대를 졸업 후 뉴욕에 있는 한 회사에 직장을 구하게 됩니다. 아마 워홀의 어머니는 뛸 듯이 기뻐했을 것입니다. 노동자로 일하던 남편은 얼마전 사고로 죽어버렸고, 자신은 여전히 그늘에 살고 있었지만 그래도 내 자식은 대학도 보내고 뉴욕에 있는 번듯한 회사에 직장까지 구했으니까요. 'American Dream'을 이룬 것이죠. 앤디 워홀은 그렇게 뉴욕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글래머Glamour>라는 잡지사에서 신발을 그리는 일을 시작했고 나중에는 신발 제조업체인 '이스라엘 밀러(Israel Miller)'라는 회사에 입사해서 신발 디자이너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로이 리히텐슈타인 '행복한 눈물' 1964>


뉴욕의 자유로운 분위기

정확히 언제부터 엔디 워홀이 디자이너가 아닌 예술가가 되려고 마음을 먹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 디자이너로 활동하던 시절 사귀던 친구들을 통해 예술 쪽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뉴욕의 분위기는 상당히 자유로웠기 때문에 디자이너였던 워홀도 예술가 친구들과 사귈 기회도 많았을 것입니다. 이때 사귀었던 친구들이 나중에 유명해지는 로이 리히텐슈타인, 웨인 티보같은 미국의 초기 팝 아티스트들이었습니다. 팝아트의 흐름은 뒤샹 이후부터 시작되어 바닥에서는 조금씩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죠. 아마 앤디 워홀은 저녁마다 화가 친구들과 소호 지역의 갤러리들에 구경 하고 파티도 다니면서 '뉴욕 예술가 라이프'를 즐겼을 것입니다. 그렇게 팝 아트 친구들을 만나던 앤디 워홀은 어느 시점 쯤 자신이 그린 디자인 이미지들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몇 번 단체 전시를 참여하다가 1952년에는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게 됩니다. 


젊은 예술가 앤디 워홀 vs 최고의 지성인 클래멘트 그린버그

지금에야 앤디 워홀은 너무도 유명하지만, 당시에는 아무리 자유로운 뉴욕이라도 이런 일러스트 같은 그림은 예술로 인정받기 쉽지 않았습니다. 시대가 아직 팝 아트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것이죠. 앤디 워홀의 첫 개인전도 완전히 실패했는데, 어느 평론가는 앤디 워홀의 그림을 보고는


"이 젊은 예술가는 뇌가 물렁한 멍청이 거나 뇌가 딱딱한 사기꾼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라고 악평하기도 했습니다. 여전히 모더니즘의 분위기가 남아있던 뉴욕의 예술계 사람들은 팝아트를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이죠. 평론가들은 소문을 듣고 이래 저래 앤디 워홀의 그림을 살펴보았지만 그들이 보기에 이 그림은 그저 잡지 표지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자신들이 지금껏 대학교에서 배운 예술 이론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그림이었습니다. 

특히 이런 앤디 워홀의 등장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평론가 한 명이 있었습니다. 이는 당시 뉴욕에서 활동하던 미국 최고의 비평가이자 20세기 최고의 지성인 중 한 명이었던 클레멘트 그린버그입니다. 클래맨트 그린버그는 단순히 평론가가 아니라 미국 예술계의 '교황'이라고 불리던 평론가였습니다. 그의 말 한마디에 예술가들의 성공이 좌우될 만큼 압도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린버그가 권위나 앞세우는 꼰대 평론가였던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린버그는 실제로 뛰어난 평론가였습니다. 그의 글을 직접 읽어보면 예술을 해석하는 그의 통찰력에 연신 감탄하며 읽게 됩니다. '지성'이 무엇인지 보여준다고 해야 할까요. 그런데 그렇게 예술을 깊이 이해하는 그린버그 조차도 이해하기 어려운 그림이 등장한 셈입니다. 

여기서 잠깐 그린버그가 당시 어떤 눈으로 예술을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미술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명쾌한 해석이니까 쉽게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 농부의 이야기 

그린버그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양극화가 생기는것에 따라 예술도 두 계층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고 보았습니다. 소위 고급미술과 저급 미술입니다. 가방에도 명품 가방이 있고 싸구려 시장 가방이 있는 것처럼 미술도 자연스레 상류층이 즐기는 고급 미술과 서민들이 즐기는 저급 미술로 분류된다는 것이죠. 그린버그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한 농부를 예로 듭니다. 

어느 젊은 농부가 한적한 시골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농부는 요즘 세상의 변화를 몸으로 체험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산업사회로 변하면서 농산물로 얻는 수익이 점점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죠. 그래도 아직 나이가 젊었던 농부는 고민 끝에 도시로 이사하기로 결정합니다. 도시로 나가 새로운 직장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이죠. 그는 곧 가진 밭을 모두 팔아서 종잣돈을 만든 후 도시로 이사합니다.  

다행히 운이 좋았는지 그 젊은 농부는 어느 공장에 취직할 수 있었습니다. 월세지만 그래도 머물 수 있는 작은 집도 구했고 먹고사는 것도 어느 정도 해결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점점 여유가 생기기 시작한 농부는 어쩐지 문화에도 관심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삭막한 도시에서 일만 하고 살기에는 마음이 헛헛했던 것이죠. 어느 날 농부는 용기 내어 도심의 한 미술관에 찾아갔습니다. 그 미술관에서는 마침 '피카소' 전시를 하고 있었습니다. 피카소라... 어디선가 이름은 얼핏 들어본 듯한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막상 가서 피카소의 그림을 보니 사람들이 왜 이런 그림을 예술이라고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딴 낙서 따위가 예술이라니...

실망한 농부는 미술관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집에 오는 길에 생활용품을 구입하러 잠시 다이소에 들렸습니다. 그런데 매장 안에 예쁜 풍경화가 그려진 액자가 눈에 띄었습니다. 그 농부는 생각합니다. '그래 이런 게 미술이지!'. 그리고는 예쁜 풍경화를 구입해서는 자신의 방에 걸어 놓았습니다. 농부는 매우 만족해하며 그날 밤 잠에 들 수 있었습니다.


평범해 보이는 이야기지만, 여기에는 우리 시대의 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코드가 숨겨져 있습니다. 농부가 다이소의 풍경화 액자를 구입하는 순간은 문화적으로 매우 중요한 변곡점입에 해당합니다. 농부가 액자를 손에 집어드는 '그 순간'이 바로 고급문화와 저급문화가 분리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피카소의 어려운 그림은 '고급 미술'이고, 다이소에서 구입할 수 있는 쉬운 풍경화는 '저급 미술'입니다. 서민들은 아무래도 이해하기 어려운 피카소의 그림보다는 보자마자 이해할 수 있는 다이소 미술 쪽으로 눈이 가게 되어있습니다. 반면 시간과 여유가 많은 상류층은 자연스럽게 어려운 미술을 찾게 됩니다. 오히려 너무 쉬우면 재미가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이 농부가 예술에 대한 식견이 너무 낮다고 폄하할 수 있을까요? 딱히 그렇게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농부는 합리적인 소비를 한 것 뿐입니다. 그린버그는 산업사회로 접어들면서 시골에 살던 사람들이 갑자기 도시로 유입되기 시작했고, 이들을 위한 문화가 사회적으로 자연스럽게 등장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원래 있던 저급미술을 서민들이 감상하기 시작한게 아니라, 반대로 서민들이 감상할 미술이 필요했기 때문에 저급미술이 등장했다고 본 것이죠. 

그린버그는 이렇게 사회적으로 양극으로 미술이 분리되는 것을 '아방가르드(Avant-Guard)와 키치(Kitsch)'로 분리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방가르드는 프랑스말로 최전방 수비수라는 뜻인데, 해석하자면 최전방에서 가장 앞서 나가는 어려운 미술을 뜻합니다. 그리고 키치는 독일어로 '반짝거리는'이라는 뜻인데, 공장에서 찍혀 나온 반짝이는 크리스마스 구슬처럼 예쁜 미술, 즉 어렵지 않고 눈에 예쁜 가벼운 미술을 뜻합니다. 


<앤디 워홀 '꽃' 1970>


예술이 맞아?

그렇다면 다시 앤디 워홀의 그림으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앤디 워홀의 그림은 아방가르드와 키치 중에 어디에 속해 있을까요? 당연히 키치 쪽입니다. 아까 그 젊은 농부도 앤디 워홀의 그림을 보면 바로 이해할 수 있을것입니다. 피카소의 추상화랑은 달리 콜라병이나 꽃처럼 보이는 대상이 명확하니까요. 그리고 색도 키치 미술처럼 크리스마스 구슬처럼 화려합니다. '키치 중에서도 키치'라고 해야 할까요.

그린버그는 순수 미술이라면 당연히 상류층의 고급미술, 즉 아방가르드를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이소에서 살 수 있는 싸구려 액자나 프린트 화보와는 다른, 뭔가 깊이 있는 아름다움과 철학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앤디 워홀의 그림은 다이소의 액자 풍경화보다 더 가벼운 그림입니다. 색도 핑크, 노랑, 너무 자극적인, 전형적인 키치 예술인 것이죠.

그래서 그린버그는 앤디 워홀의 그림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앤디 워홀은 저급미술을 가져와서 미술관에 걸어놓고는 고급미술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린버그가 앤디 워홀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단순히 꼰대라고 폄하할 수 없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그의 말은 냉정하게 평가해 봐도 딱히 논리적으로 오류가 없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이해할 수 없는 모더니즘의 사람들

그렇다면 앤디 워홀의 그림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그린버그의 해석은 논리적으로 하나 틀린 게 없이 완벽하지만, 그는 한계는 그의 해석이 모더니즘 시대에 멈춰있다는 점입니다. 비유하자면 그린버그는 과거 졸업한 초등학교 시절의 시험지를 들고 와서는, 대학생들에게 이것이 정답이라고 강요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초등학생의 시험지는 명쾌하게 답이 떨어지지만, 대학생의 논술시험에는 애초에 정확한 답이 존재하지 않을수도 있다는 것을 그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죠. 아니, 어쩌면 그린버그는 이해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다만 그렇게 자신이 꿈꿔왔던 모더니즘의 시대가 저무는 것을 받아들이기 싫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앤디 워홀의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 포스트모더니즘의 안경을 다시 써 보겠습니다.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은 좀비와 비슷합니다. 좀비가 '죽음과 삶'의 경계에 있는 존재인 것처럼, 포스트모더니즘미술은 '미술'과 '다른 무엇'과의 경계에 존재하는 미술입니다. 그 경계는 정치, 철학, 과학, 사회운동, 이념, 문학, 음악 등, 미술은 세상의 모든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한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미술+공장

그렇다면 앤디 워홀의 팝아트는 미술과 무엇의 경계라고 해야할까요. 팝아트는 '미술과 공장'의 경계에 존재합니다. '아니, 미술이 어떻게 공장과의 경계에 있을 수 있지? 미술과 공장은 너무 이질적이잖아?' 라고 생각할수도 있겠지만, 포스트모더니즘미술은 세상 그 무엇과의 경계에도 위치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살펴볼 현대 미술에서도 계속 그 현상이 나타난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앤디 워홀은 공장에서 생산되는 코카 콜라, 캠벨 통조림 같은 공장에서 생산되는 물건들을 그렸습니다. 누군가가 앤디 워홀에게 코카 콜라 그림에 관해 물어보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 나라의 위대한 점은 가장 부유한 소비자와 가장 가난한 소비자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을 소비하는 전통을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상관없이 똑같이 코카콜라를 마십니다. 대통령도, 세기의 여배우도 당신과 똑같은 코카콜라를 마십니다. 콜라는 그저 똑같은 콜라일 뿐, 아무리 큰돈을 준다 해도 더 좋은 코카콜라를 살 수는 없습니다. 모든 코카콜라는 동일하며, 똑같이 좋기 때문이죠.”


무슨 말인지는 알겠지만, 앤디 워홀의 이 말이 '예술가'의 말처럼 보이시나요? 예술가라기보다는 차라리 콜라회사 사장의 말처럼 보이지 않으시나요? 그의 이 말에는 이미 그린버그의 '아방가르드와 키치' 논리의 한계를 뛰어넘는 논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세상 모든 콜라는 동일하며, 부자와 가난한자도 똑같은 코카콜라를 마신다는 것이죠. 앤디 워홀은 콜라 공장 사장은 아니었지만 마치 공장 사장처럼 자신의 작품을 공장에서 처럼 '생산'했습니다. 공장에서 물건을 찍어내듯, 예술도 찍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그의 작품이 대부분 판화였던 이유는 공장처럼 여러 장의 그림을 빠르게 생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판화는 유화와는 달리 빠르게 여러장을 찍어낼 수 있으니까요. 

이렇게 팝아트에서는 모더니즘에서 중요시 했던 '고급미술'과 '저급미술'의 경계가 사라져 버립니다. 팝아트의 등장은 그 자체로 모더니즘의 한계를 완전히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앤디 워홀 '마를린' 1967>d


실버 팩토리Silver Factory

여전히 평론가들은 앤디 워홀의 예술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앤디 워홀은 계속 행보를 이어나갑니다. 앤디 워홀은 뉴욕 맨해튼의 미드타운에 자신의 작업실을 차리고는 아예 자신의 작업실을 'Factory', 즉 공장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예술가의 작업실을 두고 공장이라니요. 아마 평론가들은 '고급 예술'이 창조되어야하는 예술가의 작업실을 두고 스스로 '공장'이라고 부르는 앤디 워홀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앤디 워홀은 '공장'을 운영하기 시작합니다. 앤디 워홀은 이 '공장'에서 작품을 생산하기도 했지만 예술가들이 모이는 일종의 '살롱'으로도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내부 공간을 종이 포일과 은색 페인트로 장식하고는(그래서 실버 팩토리입니다) 음악가, 예술가, 배우들을 불러서 계속 파티를 열었던 것이죠. 이 소문은 빠르게 퍼져 곧 '팩토리'는 맨해튼에서 가장 '힙'한 파티 장소로 소문나게 됩니다. 당연히 앤디 워홀의 인기 또한 빠르게 높아졌습니다. 이제 맨해튼에서는 소위 '주류'로 인정받으려면 '팩토리'에서 열리는 파티에 초대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죠.

앤디 워홀은 이후 팩토리에서 '연예인 초상화 시리즈'를 판화로 찍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앤디 워홀이 찍어낸 판화는 미국 문화를 대표하는 메릴린 먼로, 엘비스 프레슬리 같은 셀럽들이었습니다. 이 초상화 시리즈들이 인기를 얻자 오히려 연예인이나 유명 인사들이 앤디 워홀에게 초상화를 의뢰하기 시작합니다. 앤디 워홀 초상화의 모델이 된다는 것은 '미국 문화를 대표할만한 인물'로 인정받는다는 뜻이 되니까요. 심지어는 미국의 39대 대통령이 되는 지미 카터도 앤디 워홀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의뢰합니다. 대선 캠페인에 활용하기 위해서였죠. 아마 지미 카터는 앤디 워홀을 통해 '인기남'으로 인정받아 뉴욕의 젊은 유권자들에게 어필하려고 했던 모양입니다. 앤디 워홀의 그림이 얼마나 효과를 발휘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지미 카터는 그림을 그린 다음 해인 1977년 대통령으로 당선됩니다.


<앤디 워홀 '지미 카터' 1976>


인생도 미국적인

앤디 워홀은 점점 미국 미술을 상징하는 인물로 성장하게 됩니다. 시대적으로 보면 미국에서 앤디 워홀의 팝아트가 등장하고 인기를 얻은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팝아트는 세상 어떤 미술보다 시장 친화적인 미술인데, 미국이야말로 시장 자본주의의 우두머리리격인 나라니까요. 미국을 대표할만한 미술로 더할나위 없이 좋았던 것이죠.

앤디 워홀은 예술 뿐 아니라 인생도 '미국적인' 인물이었습니다. 할리우드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일들이 앤디 워홀 주변에서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앤디 워홀의 인기가 한참 최고점을 달리고 있던 1968년 6월, 앤디 워홀은 엘리베이터에서 솔라나스라는 여자에게 총을 맞게 됩니다. 솔라나스는 '팩토리'의 파티를 드나들며 앤디 워홀과 친분을 쌓았던 여인이었습니다. 총상은 치명적이었는데, 총알이 워홀의 위, 폐, 간, 식도를 포함한 8개의 장기를 관통했습니다. 응급실에 실려간 워홀은 흉부를 열어 심장 마사지를 했어야 할 만큼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다행히 죽음은 피할 수 있었지만 이후에도 워홀은 수차례 어려운 수술을 받아야 했고 결국 똑바로 서기가 어려워 죽을 때까지 몸을 코르셋으로 고정시키고 살아야 했습니다. 

사실 워홀이 특별한 잘못을 해서 총을 맞았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워홀을 쐈던 솔라나스라는 여인은 정신분열증이 있었다고 하는데 솔라나스는 '세상의 모든 남자는 사라져야 한다'라고 믿는 급진 페미니스트 작가였습니다. 앤디 워홀은 페미니즘과 동성애에도 열려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솔라나스는 자신의 페미니즘 연극 대본을 보여주면서 연극으로 만들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앤디 워홀이 보니까 극 대본 중간 중간에 너무 외설적이고 자극적인 내용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자칫 잘못 도와줬다가는 자신에게 문제가 생길 것 같아 솔라나스를 도와주지 않게 됩니다. 아무리 개방적인 앤디 워홀이라도 1960년대는 지금과 달리 외설물에 대한 정부의 감시가 삼엄했기 때문에 워홀은 몸을 사렸던 것이죠. 그런데 솔라나스는 이 일에 앙심을 품었던 모양입니다. 결국 사고가 났고 이 사건 이후로 앤디 워홀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자제하고 폐쇄적인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민자의 아들, 아메리칸 드림, 뉴욕 최고의 예술가, 총격사건, 은둔생활, 앤디 워홀의 삶은 조금만 상상력을 더하면 영화가 한편 나올법합니다. 누가 억지로 '미국적인 삶'을 살라고 각본을 짜줘도 그렇게 살기 쉽지 않을 텐데 앤디 워홀의 인생은 어쩐지 '미국적으로' 흘러가 버렸던 것이죠.    


여전히 인기있는 팝아트

미국을 대표하는 팝아트는 앤디 워홀 이후에도 계속 이어져 여전히 현대미술에서 중요한 하나의 흐름으로 남아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모두 설명할 수 없지만 이후에도 제프 쿤스, 키스 해링, 카우스 같은 팝아트 예술가들이 등장했고,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은 우리나라에서도 이동기처럼 팝아트를 추구하는 예술가들이 나타났습니다. 그외에도 전 세계에는 여젆이 많은 팝아티스트들이 활동중입니다. 

'미국식 자본주의'가 여전히 전 세계적 주도권을 놓치지 않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팝아트는 적어도 당분간은 현대미술에서 주류 미술의 한 경향으로 남아 있을 것 같습니다. 절대로 멸망할 것 같지 않았던 로마가 멸망했던 것처럼, 미국이 언젠가 왕좌의 자리에서 내려올 날이 온다면 그때쯤에는 팝아트의 흐름도 맥이 끊기게 될까요.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09237226


매거진의 이전글 길을 예비하는 자, 마르셀 뒤샹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