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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신영 Jan 20. 2024

길을 예비하는 자, 마르셀 뒤샹

 


마르셀 뒤샹 <샘Fountain> 1917


자유로운 영혼 '뒤샹'

뒤샹은 정말 특이한 예술가였습니다. 그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는지 어느 날 공공 화장실에서 쓰는 소변기에 사인한 후 전시장에 가져다 놓고는 예술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죠. 이 작품이 그 유명한 <샘>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비판할 겨를도 없이 그냥 멍한 반응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파격적이라고 해도 너무 과하게 파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소변기는 1917년에 전시되었는데, 당시는 사람들이 아직도 모네의 인상주의나 고흐의 표현주의 그림을 보고도 고개를 갸우뚱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변기를 예술이라고 주장하는 괴짜 예술가가 등장한 것이죠. 

사실 뒤샹은 타고나길 '자유로운 영혼'으로 태어났습니다. 뒤샹은 파리에서 알아주는 난봉꾼으로도 유명했는데, 젊은 시절부터 수많은 파리의 여자들과 연애를 즐겼다고 합니다. 뒤샹은 '모든 파리의 여인들은 뒤샹과 잠자리를 갖고 싶어 한다'는 말을 들을 만큼 날렵한 미남이었으니까 연애에 있어서는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던 것이죠. 소문에 의하면 사고를 치고 몰래 낳은 딸도 있었다고 합니다. 뒤샹이 어느 유부녀와 한참 바람을 피우던 시절 유부녀가 덜컥 딸을 낳아버린 것이죠. 물론 뒤샹은 자기 딸이라고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뒤샹은 이래저래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모양입니다.

뒤샹의 미술 <샘>으로 다시 돌아와 보겠습니다. 뒤샹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소변기를 예술이라고 주장했던 것일까요, 뒤샹은 그저 별 생각 없이 소변기를 예술이라고 주장했던 것일까요? 뒤샹이 자유로운 영혼이기는 했지만 예술에는 진심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그가 이런 엉뚱한 미술을 만들었던 것에는 나름의 생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미술에 대한 어떤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잠시 그가 처음 그 문제의식을 가졌던 때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때는 1912년, 소변기를 예술이라고 주장하기 5년 전의 일입니다.



<파리 그랑 팔레 에어쇼>


파리의 에어쇼

1912년, 뒤샹은 친구 예술가 브랑쿠시와 함께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비행기 전시회에 구경을 갑니다. 그랑 팔레에서 열린 이 전시는 많은 항공 기업들이 자기 회사의 신제품 비행기의 디자인과 성능을 뽐내는 전시였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람보르기니나 부가티 같은 슈퍼카들이 전시되어 있는 뉴욕의 모터쇼와 비슷하지 않았을까요. 

뒤샹이 브랑쿠시와 함께 안으로 들어서자 거대한 유리천장으로 된 화려한 전시장이 그들을 맞이했습니다. 두 사람은 높은 천장의 화려한 내부 디자인, 그리고 수많은 신제품 비행기들에 점점 압도당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당시 유럽 최고의 부자들이 고급 정장을 입고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부자들은 옆에 전리품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리따운 귀부인들과 팔짱을 끼고 다녔는데, 지금도 그렇겠지만 경비행기를 구입할만한 개인들이라면 엄청난 재력가들이었던 것이죠. 뒤샹과 브랑쿠시는 화려함과 규모, 그리고 부르주아들의 기세에 압도당한 채 너구리처럼 살금살금 전시를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계속 부자들 사이를 쏘다니던 뒤샹은 갑자기 멈춰 서더니 잠시 생각에 잠깁니다.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요. 뒤샹은 별안간 점점 안색이 어두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같이 구경온 친구 조각가 브랑쿠시에게 전시된 비행기의 프로펠러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조각이야! 이제 조각은 이보다 못해서는 안 돼.”


이건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소리일까요. 뒤샹은 하얀 비행기 프로펠러를 보더니 조각과 비교하는 엉뚱한 말을 했던 것입니다. 아마 프로펠러 날개도 그리스 조각처럼 하얀색이니까 순간 겹쳐보였던 걸까요? 뒤샹은 아마도 프로펠러의 매끄러운 날개 곡선에서 비너스 조각의 허리 곡선 비슷한 무엇을, 그리고 하얀색으로 칠한 날개에서 대리석의 하얀색 표면을 보았던 모양입니다. 물론 프로펠러는 공장에서 만들어진 물건에 불과하니까 아름다운 그리스 조각과 비교해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뒤샹은 평범한 눈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괴짜 특유의 날카로운 시선으로 프로펠러의 날개에서 다른 사람이 발견하지 못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있었습니다. 

그나저나 친구 브랑쿠시는 정작 조각가는 자신인데 화가 출신인 뒤샹이 꼰대같이 옆에서 조각이 어떻다느니 너는 이거보다 잘해야 한다느니 중얼대는 게 고까웠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뚱한 표정의 브랑쿠시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뒤샹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습니다. 


“이것 봐, 이제 회화는 망했어, 누가 이 프로펠러보다 아름다운 것을 창조할 수 있을까? 말해봐 자넨 할 수 있나?”


회화까지 망했다고 말하는 뒤샹을 멍하니 바라보던 브랑쿠시는 이번에는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뒤샹은 친구에게 잔소리나 하려고 그런 말을 했던 게 아니었습니다. 그는 지금 분명 어떤 '예술의 위기'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남들은 아직 눈치채지 못했지만, 예술가들은 지금까지 역사상 한 번도 없던 새로운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고 본 것이죠. 


<하얀색 람보르기니>

예술의 위기

뒤샹은 왜 고작 프로펠러 하나 따위에 '예술의 위기'까지 느꼈던 것일까요? 뒤샹이 천재인지 아니면 그저 괴짜에 불과한지 살펴보겠습니다. 이 시기는 산업화의 결과로 프로펠러 같은 공장에서 찍어낸 물건들이 그야말로 시장에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이런저런 제품들도 그저 '생활용품'이라고 하기엔 그 나름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장 길거리를 다니는 자동차를 봐도 알 수 있지만 공장에서 생산된 세련된 디자인의 자동차들은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자동차 회사들이 수억 연봉의 최고의 디자이너들을 고용하는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습니다. 사실 이는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장사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상품을 많이 팔기 위해선 아무래도 예쁜 디자인으로 생산할 필요가 있으니까요.  

뒤샹의 문제의식은 여기서 출발합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공산품들은 하나씩 생산되는 게 아니라 공장에서 수천수만 개씩 무서운 속도로 찍혀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술가인 자신은 집에서 꾸부정하게 앉아서 작품을 하나씩 손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예술가의 작품이 더 '깊이'가 있다고 해도, 기계들이 찍어내는 '물량'을 감당할 수 있을까? 그것이 뒤샹의 문제의식이었습니다.

물론 누군가는 '예술'과 '상품'은 다른 게 아니냐, 아무리 그래도 예술은 상품보다 우위에 있는 것 아니냐라고 반문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뒤샹은 이미 그다음까지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산업 기술은 점점 좋아질 것이다, 그렇다면 상품의 질도 점점 좋아질 것이고, 결국 언젠가는 '예술'보다 더 높은 완성도를 보여줄지도 모른다라고요. 실제로 위의 람보르기니만 봐도 그러하지만 현대에 찍혀 나오는 상품들의 퀄리티는 어마어마합니다. 뒤샹은 분명 남들보다 멀리 미래를 보고 있었던 것이죠.




<샘>

이 사건이 있고 5년 뒤, 뒤샹은 뉴욕의 어느 전시회에서 소변기를 전시장에 가져다 놓고는 예술이라고 주장하게 됩니다. 이 소변기가 바로 그 유명한 <샘Fountain>이라는 제목의 작품이었습니다. 소변기는 밖에서든 안에서든 '물'은 충분히 넘쳐 나오니까 '샘'이라는 것이죠. 당시의 사람들은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소변기를 보면서 도대체 왜 오줌받이 따위가 예술이 되는 것이냐고 어이없어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뒤샹의 위기의식에 따르면 분명 공장에서 찍혀 나오는 공산품들이 언젠가 '예술가들의 적'이 될 것입니다. 소변기도 분명 공산품이니까 잠재적 적이 되는 셈인데, 뒤샹은 그 적을 예술가들의 공간인 미술관에 가져다 놓은 셈입니다. 적군 병사를 아군 진영으로 가져다놓은 것이죠.

이 행위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뒤샹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던 만큼, 이는 경쟁상대를 이길 수 있는 방법으로 굉장히 특이한 방법을 제시한 것입니다. 바로 '정치적 해결'입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뒤샹은 인간만이 가진 '정치'라는 방법을 활용하려고 했던 것이죠. 

이는 상당히 세련된 방법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선 뒤샹이 했던 행동을 다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뒤샹은 동네 철물점에서 소변기를 구입한 후 소변기 옆쪽에 'R. Mutt'라고 사인을 하고 이것을 예술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사인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간단히 말하면 예술가인 자신이 이 소변기에 사인을 하는 것으로 예술품으로 '인정'해 준다고 갑자기 선언한 것이죠. 어떻게 보면 상당히 우스운 전략이기도 한데, 굳이 비유를 하자면 길바닥에 있는 전봇대에게 다가가서는, '야 내가 너랑 싸우면 솔직히 질 거 같은데, 그냥 내가 이긴 걸로 하자. 대신 내가 너 부하시켜 줄게.'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전봇대는 별로 싸울 마음도 없어 보이는데 말이죠. <샘>도 마찬가지입니다. 철물점에 조용히 앉아있던 소변기를 전시장에 억지로 데려와 놓고는 '너 같은 더러운 소변기 따위, 내가 예술가의 권위로 친히 사인을 해줬으니까 너는 오늘부터 예술품이다'라고 선언을 해버린 것입니다. 이게 말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뒤샹은 이렇게 상대방의 위치를 미리 '선언'해 버리는 정치적 방법을 사용합니다. 


<클래스 올덴버그 ‘톱, 톱질’ 1996, 도쿄>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뒤샹의 이 일방적 '정치적 선언'이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뒤샹이 <샘>이 논란을 일으키고 얼마 뒤, 공산품을 예술의 소재로 사용하는 팝 아트Pop art가 등장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팝 아트가 등장하면서 산업 미술은 어쩐지 순수 미술의 하위문화로 포섭되어 버렸습니다. 뒤샹의 이 '정치적 행동'이 일종의 '나비효과'를 일으켰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위는 클래스 올덴버그(Claes Oldenburg, 1929~)라는 미국의 팝 아티스트의 작품입니다. 올덴버그는 공산품들을 사물들을 극단적으로 크게 키워서 전시하는 조각가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올덴버그의 작품을 볼 수 있는데, 서울시의 청계천 중앙에 세워져 있는 거대 다슬기가 바로 클래스 올덴버그의 작품입니다.    

뒤샹이 없었다면 아무도 나무 자르는 톱 따위가 예술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위와 같은 팝 아트Pop Art는 공산품을 예술의 소재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뒤샹의 직접적인 후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팝 아트에 관해서는 나중에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지만 이렇게 공장에서 찍혀 나온 물건을 예술의 한 도구로 사용하기 시작한 최초의 사람이 바로 뒤샹이었습니다. 어쨌든 천재는 천재라고 해야 할까요.


시대적 맥락

뒤샹의 <샘>이 가진 맥락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시나요? 여기서 한 번만 더 깊이 한번 들어가 보겠습니다. 사실 뒤샹의 <샘>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에는 그가 당시 처해있던 시대적 상황도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뒤샹의 <샘>은 일종의 '반항적 행동'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소변기 옆에 이상한 글자로 사인한 것도 그렇지만, 누가봐도 오줌이 넘치는 소변기인데 작품 제목을 생수가 넘치는 '샘'이라고 지은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동네 불량학생들이 길거리의 벽에 스프레이로 낙서를 하는 것처럼 좋게 이야기 하면 창난치는듯한, 진지하게 이야기하면 반항, 또는 저항하는 듯 한 느낌이 있다는 것이죠. 뒤샹은 반항아이기도 했던 걸까요?

당시 시대적 배경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뒤샹이 <샘>을 전시했던 게 1917년이었는데, 이 시기는 유럽이 가장 큰 격동으로 빠졌던 시기입니다. 바로 3년 전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터졌기 때문입니다. 이 전쟁에서 자그마치 1600만 명의 유럽인이 사망했습니다. 힘차게 미래를 꿈꾸어야 할 젊은이들이 먼지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죠. 

이 전쟁이 터지면서, 전쟁에 저항하는 젊은 예술가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바로 다다이즘Dadaism과 초현실주의Surrealism입니다. 뒤샹은 바로 이 다다이즘에 속해있던 예술가였습니다. 다다이즘의 다른 예술가들도 뒤샹처럼 반항적인 예술을 만들었습니다. 사진이나 신문, 포스터에서 따온 글자들과 이미지들을 조잡하게 섞어서 기괴하게 만들기도 했고, 쓰레기나 기계부품 등을 대충 붙여서 조각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뒤샹의 소변기가 가장 상징적이긴 하지만 다다이즘의 미술들은 전반적으로 다 그러했던 것이죠. 

다다이즘의 예술가들은 왜 이런 이상한 미술들을 만들게 됐을까요? 이들의 생각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발생한 시기는 기계문명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시기였습니다. 앞서 그랑 팔레의 전시장에서 살펴봤던 것처럼 비행기가 등장하여 하늘을 날아다니기 시작했고, 전구가 처음 발명되어 어두운 밤을 밝히기 시작했으며, 자동차들이 본격적으로 도로로 나온 것도 이 시기쯤입니다. 우리가 보통 '현대 문명'이라고 표현할 때의 그 문명이 처음 시작된 시기인 것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새로 등장한 신기한 문명들이 인간의 삶을 점점 살기 좋고 편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전구, 자동차, 세탁기처럼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해 주는 기계들과 동시에 인류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바로 대량 살상무기입니다. 기관총, 폭탄, 탱크, 전투기들이 그것이죠. 1차 세계대전에서 1600만 명이나 죽었던 이유도 전쟁 기계의 발달 덕분이었죠. 인류는 이런 식의 전쟁을 처음 겪어보았습니다.


<전구와 기관총>


이성 VS 반이성

이 현상을 목격한 예술가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를 풍요롭게 만들어 줄 것으로만 알았던 현대 기술문명이 대량학살의 도구도 동시에 만들어 내고 있는데 이런 문명을 인정해 줄 가치가 있을까?'


쉽게 말하면, 우리가 세탁기로 느끼는 편리함이 1600만의 젊은이들의 목숨과 바꿀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냐 하는 것이죠. 결국 유럽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유럽에서 발달한 과학기술문명 자체를 거부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들은 그 기치로 '반 이성'을 내세웁니다. 왜 '반 이성'이었을까요? 현대의 기술문명은 이성을 통해 발달한 것이니 아예 그 반대로 가자고 한 것이죠. 그리고 그런 반 이성적 문화 운동이 예술에서 나타난 것이 바로 다다이즘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다이즘은 기본적으로 '반 이성'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뒤샹의 <샘>도 마찬가지로 '반 이성'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변기가 미술관에 있는 상황을 과연 이성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상황이라면 아마 아름답고 고상한 그리스 조각이 미술관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화장실에 있어야 할 소변기가 미술관에 있는 것은 그 자체로 '비 이성적'상황입니다. 이렇게 뒤샹의 <샘>이 탄생하게 된 배경에는 1차 세계대전에 저항하려고 했던 당대 지식인들의 저항정신, 그리고 거기에 더해 시대의 기존질서에 반항하려고 했던 태도가 녹아있습니다. 


<살바도르 달리 '기억의 지속'>


초현실주의와 다다이즘은 같은 배에서 나왔다

덧붙이자면, 지난 책 '미술사 도슨트:모더니즘 회화'에서 설명드렸던 살바도르 달리나 르네 마그리트로 유명한 초현실주의Surrealism도 다다이즘과 같은 계열의 미술로 '반 이성'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꿈을 표현하는 것은 '무의식'을 표현하려고 하는 것인데, 초현실주의에서는 인간의 무의식을 인간의 이성의 반대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초현실주의 그림은 환상적인 이미지 때문에 '반 이성'이라는 목적을 금방 찾아내기는 어렵지만, 본질적으로는 다다이즘과 목적이 같았습니다. 실제로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의 예술가들은 서로 친구들이기도 했습니다. 같이 활동했지만 서로 표현방식이 약간 달랐을 뿐이죠.

정리해 보면 뒤샹은 <샘>은 두 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공장에서 탄생한 물건을 예술로 전환시키며 순수미술의 하위로 포섭시키려는 성격, 그리고 그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면 1차 세계대전 이후 세상의 질서에 저항하고자 했던 다다이즘의 저항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뒤샹의 <샘>은 장난스러워 보이기도 하지만 어찌보면 혼란스러운 시대의 혼란스러운 예술이라고 할수도 있습니다. 공장과 대량 생산의 등장으로 급변하는 산업 사회, 끔찍한 전쟁의 고통, 이 모든것을 겪으면서 뒤샹은 젊은 예술가로서 세상에 그렇게 세상에 소변기를 던져 놓았던 것이죠. 

 

뒤샹의 후반기

뒤샹은 이후 <샘>으로 전 세계적 유명세를 얻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성공한 이후에도 여전히 반항아같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여전히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것이죠. 뒤샹은 <샘>으로 미술계에 파란을 불러일으켰지만 1923년 이후로 갑자기 작품 활동을 아예 중단해 버립니다. 미술사에서 그렇게 유명하지만 계산해 보면 고작 6년 밖에는 활동을 하지 않은 셈입니다. 그렇게 뒤샹은 갑자기 미술계를 떠나버립니다. 마치 속세를 등지고 모래사막으로 유유히 사라지는 도인처럼 말입니다. 

그러더니 뒤샹은 얼마 뒤 다시 모래사막을 헤치고 나타납니다. 단 황당하게도 예술가가 아닌 체스기사가 되어 나타났습니다. 농담이 아니라 뒤샹은 진짜 프로 체스기사로 정식 등록했고 대국도 벌이며 '프로 체스기사'로 활동했습니다. 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아내 리디에는 화가 나서 체스 말을 접착제로 판에 붙여버렸다는 이야기도 있으니까요. 유명한 예술가여서 결혼했는데 청승맞게 체스나 두고 앉아 있으니 꼴 보기 싫었던 것이죠. 

그런데 사실 그렇게 호기롭게 체스기사로 전향한 것 치고 체스 실력은 그렇게 뛰어나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자유롭게 인생을 살았던 것이야 말로 괴짜 뒤샹답다고 해야 할 듯합니다. 이후에도 뒤샹은 한량처럼 세상을 둥둥 떠다니며 살았을 뿐입니다. 위대한 거장의 일화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역사상 최고의 괴짜 예술가에 맞는 삶의 태도였다고 해야 할까요.


길을 예비하는 자

역사를 살펴보면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기 전에 항상 그 시대를 예비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고는 했습니다. 카이사르가 등장하여 유럽을 창조하기 전에는 그라쿠스 형제가 등장했었고, 르네상스가 시작되기 전에는 프리드리히 2세가 먼저 등장하여 새로운 시대를 예비했습니다. 이렇게 인간사에 반복되어 나타나는 '예비하는 자' 현상은 어쩐지 창작물에서도 가끔 차용되어 나타납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가 등장하기 전에 그의 길을 예비하는 자의 역할을 맡았던 '모피어스'가 등장했던 것 처럼요. 이 책의 주인공인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에서 '길을 예비하는 자'의 역할을 맡았던 예술가가 바로 괴짜 예술가 마르셀 뒤샹입니다. 

뒤샹은 <샘>을 통해 예술가를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사람'에서 '아이디어를 고민하는 사람'으로 바꾸어놓았습니다. 다빈치의 <모나리자>나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도 그렇지만 과거의 예술가들은 보통 손과 붓으로 직접 예술을 창조했습니다. 그런데 뒤샹은 소변기를 직접 손으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냥 사왔지요. 뒤샹이 중요시한 것은 자신의 '손재주'가 아닌 자신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현대미술로 넘어오면 더이상 예술가의 손재주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 예술가의 '아이디어'가 무엇인지를 중시하게 됩니다. 이렇게 뒤샹은 '생각을 중시하는 미술'을 처음으로 시도했는데, 본격적인 현대미술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가 되어서니까 계산해 보면 뒤샹은 적어도 40년이나 앞서있었던 셈입니다. 물론 뒤샹의 미술은 그 시대에는 온전히 이해되지 못했고 하나의 '기행'처럼 인식되었습니다. 아무도 40년 뒤 그의 예술이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죠. '길을 예비하는 자'의 운명은 외로운 것이라고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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