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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신영 Jan 12. 2024

미니멀리즘




도날드 저드 <제목 없음> 1971


 미니멀리즘


"네가 찾는 행복의 비결은 더 많은 것을 구하는 것에서 오지 않는다. 대신 적은 것을 즐기는 힘을 개발하는 것에서 온다."

                                                                                                        -소크라테스 기원전 450년


'미니멀 라이프'는 되도록 적게 소유하면서 복잡하게 살지 않는 삶을 말합니다. 복잡한 집안의 물건들을 정리하고 단출하게 살면 오히려 마음이 정리되어 삶은 더 풍요로워진다는 것이죠.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화려한 도시가 아니라 시골을 선호하며, 복잡한 쇼핑몰을 구경하러 가기보다는 바닷바람을 쐬며 조용히 바다를 지켜보는 삶을 선호합니다. 

패션이나 디자인에도 '미니멀리즘'이 있습니다. 미니멀 디자인은 보통 화려한 장식이 없는 실용적인 디자인을 말합니다. 아이키아IKEA의 가구들이나 유니클로UNIQLO의 옷들이 기본적으로 '미니멀 디자인'을 적용한 사례입니다. 이렇게 미니멀리즘은 현대인을 대표하는 삶의 태도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미니멀리즘이 처음 등장한 곳이 사실 미술이었다는 것입니다. 미술에서 극단적으로 단순한 미니멀리즘 미술이 처음으로 등장했고, 나중에 패션이나 디자인 같은 산업미술 쪽에서 이 경향을 따라가기 시작한 것이죠. 그런데 더 재미있는 점은, 미니멀리즘은 사실 단순함을 추구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미니멀리즘은 가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단순해졌을 뿐 처음부터 무작정 단순해지기 위해 탄생한 미술은 아니었습니다. 말하자면 단순함은 '결과'였을 뿐 '목적'은 아니었다는 것이죠. 


<칼 안드레, "동등함8Equivalent VIII",   1966>

미니멀리즘 작품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위는 칼 안드레의 미니멀리즘작품입니다. 미니멀리즘의 예술가들은 어이없게도 저렇게 벽돌을 쭉 나열해 놓고는 예술이라고 주장하게 됩니다. 저렇게 정확히 정렬해 놓으니 보기 좋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바닥에 누워있는 벽돌들 따위가 정말 예술이 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저 단순해 보이는 벽돌들은 한 때 뉴욕의 미술계의 수많은 지성인들과 비평과들의 머리를 지끈지끈하게 만들었던 어려운 미술이었습니다. 저렇게 단순해 보이는 벽돌들 따위가 왜 어려운 미술이라는 것일까요? 

미니멀리즘은 눈에 보기에는 극단적으로 단순해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미술사에서 가장 어려 미술입니다. 미니멀리즘은 미술사에서 최초로 '관념의 세계'에서 창조된 미술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이 아닌 철저하게 '머리싸움'으로만 만든 미술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좋게 표현하자면 '높은 교양의 미술'이고 나쁘게 말하면 '머리 아픈 미술'입니다. 어느 쪽인지는 독자분들이 지금부터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양해의 말을 덧붙이자면 혹시 '평면성'이 무엇을 말하는지 정확히 모르시겠다면 책의 1장 '히틀러의 죽음' 마지막 부분을 다시 읽고 오시기를 권합니다. 미니멀리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평면성'에 대한 배경지식이 꼭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미술사, 모더니즘 회화

미니멀리즘의 탄생은 모더니즘 회화의 종말 즈음에서 시작됩니다. 우선 20세기 초의 뉴욕으로 한번 돌아가 보겠습니다. 뉴욕의 젊은 예술가들이 보기에 모더니즘 미술은 꿈과 같은 미술이었습니다. 모더니즘 회화는 너무도 아름답게 꽃피었기 때문이죠. 모네, 고흐, 피카소 같은 위대한 예술가들은 자신의 인생을 다 불태워 예술을 창조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의 스토리도 하나하나 드라마에 가까웠습니다. 모네는 인상주의를 그리기 위해 빛을 관찰하다가 눈이 멀어버렸고, 고흐는 아름다운 그림들을 그렸지만 결국 외로움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으며, 고갱은 원시주의 미술을 그리기 위해 태평양 오지의 타히티 섬으로 떠나 그림을 그리다가 객사해 버렸습니다. 당사자들이야 고생스러웠겠지만, 이를 지켜보는 후대의 예술가들 입장에서 선배 예술가들의 삶은 그 자체로 전설이었습니다. 

모더니즘 회화는 이 바탕 위에 계속 발전합니다. 이후 피카소, 칸딘스키, 몬드리안 같은 화가들을 거쳐 마지막에 잭슨폴록까지 오게 됩니다. 잭슨 폴록에 도달했을 즈음에, 예술가들의 노력은 마침내 결실을 맺습니다. 모더니즘 회화가 궁극의 깨달음, '평면성의 깨달음'을 얻은 것입니다. 이 깨달음은 수많은 예술가들의 노력과 고민, 그리고 토론의 결과물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잭슨폴록을 주축으로 한 미국의 젊은 화가들은 입체가 없는 '평면적 그림'을 그리게 됩니다. 

하지만 앞서 설명한 것처럼, '완벽한 평면적 그림', 즉 '궁극의 그림'을 완성하는 것은 결국 실패합니다. 평면에 가까운 그림은 그릴 수 있지만 '완벽한 평면적 그럼'은 그릴 수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죠. '궁극의 그림'은 천국이나 지옥처럼 관념적 세계에서만 가능할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근대의 꿈은 끝나게 됩니다. 


최후의 저항

모더니즘 회화의 발전 과정은 그 자체로 아름다웠습니다. 예술가들은 꿈을 꾸었고 꿈을 찾았지만 마지막에는 결국 이루지 못합니다. 이 모습은 마치 꿈 많은 젊은이가 꿈의 근처까지 갔다가 한계에 부딪혀 좌절하는 한 편의 비극적인 드라마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지난 책 '미술사 도슨트:모더니즘 회화 편'에서 이 내용을 책 한 권에 걸쳐 상세히 다룬 이유도 모더니즘 회화는 인류 미술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모더니즘 회화가 인기가 많은 것은 바로 그런 서사 때문이 아닐까요. 

미니멀리즘 미술은 바로 그 실패에서 시작됩니다. 어쩌면 그 아름다움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몇몇 예술가들은 끝까지 이 문제를 손에서 놓지 못했습니다. 궁극을 바라는 예술가들의 꿈이 이렇게 허무하게 실패로 끝나버릴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최후의 저항이라고 해야 할까요. 

근대의 꿈을 마지막까지 놓지 않았던 그 예술가들이 바로 미니멀리스트들이었습니다. 미니멀리즘의 예술가들은 그런 궁극의 예술이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면, 머릿속으로라도 한번 끝장을 보자고 생각합니다. '관념'의 세계에서라도 승부를 보자는 것이죠.


<레오나르도 다 빈치 "모나 리자Mona Lisa">


환영Illusion의 제거

미니멀리즘 예술가들의 생각을 한번 따라가 보겠습니다. 이들은 평면성의 문제를 논리적으로 정교하게 분석해 보았습니다. 궁극의 평면성을 달성하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그림이 '완벽한 평면'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그림이 평면이 아닌 이유는 '입체적'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위 고전의 명작 <모나리자Mona Lisa>에서 우리는 입체감을 느낍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리사라는 여인을 사실적으로 잘 그렸기 때문에 마치 튀어나올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죠. 미니멀리즘의 예술가들은 일단 이를 '환영Illusion'이라고 규정해 보았습니다. '환영'하면 무슨 귀신같은 걸 말하는 걸까 싶지만 이들이 말하는 '환영'은 기술적인 개념이었습니다. 위 그림에서 리사Lisa라는 여인은 이미 옛날에 죽었지만 우리는 리사를 사실적으로 잘 묘사한 이 그림을 통해 이미 세상에 없는 그녀를 '가상'으로 인식하니까 '환영'이라는 것이죠. 

즉 그림이라는 것은, 예술가들이 창조해 낸 '환영'을 우리가 인식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보다 이 환영을 완전하게 제거해야만 완벽한 평면성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하얀 그림의 역설

환영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가장 첫 번째로 떠올린 방법은 그림에서 대상을 아예 지워버리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그리지 않고 단색만 칠한다면 그림에는 사람이든 풍경이든 그린 것이 없으니 환영이 사실상 사라질 테니까요. <모나리자>의 경우 주인공 리사뿐 아니라 배경의 나무, 강, 산 모두 지워버리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얀색만 칠하는 것이죠. 실제로 초기 미니멀리즘의 예술가들은 그런 시도를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히 끝날 리가 없습니다. 이들은 한참을 논리적으로 따져보다가 결국 극단적으로 단순한 하얀 그림에서도 여전히 환영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완전히 아무것도 그리지 않았는데도 환영이 나타 났다? 이렇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만약 하얀색으로만 칠해진 그 그림이 전시장에 걸려있는데, 어떤 관객이 지나가면서 이 그림을 보다가 '어 저 그림은 혹시 눈밭을 그린 건가?'라고 생각한다면 어떨까요? 예술가가 의도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하얀 그림에서 눈밭을 인식할 수도 있다는 것이죠. 평평해 보여도 눈밭도 분명 입체는 입체니까 다시 '환영'이 등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아예 검게 화면을 칠해보겠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환영'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누군가는 검은 화면을 보고 '화가가 밤하늘을 그린 걸까?'라고 상상할 수도 있기 때문이죠. 밤하늘은 끝없이 깊으므로 다시 깊이가 등장하고 환영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관객이 '밤하늘'을 인식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검은 화면은 그냥 보기에도 끊임없이 깊이 들어가는 느낌을 줍니다. 그리고 깊이는 다시 환영을 암시합니다. 즉 아무리 단색으로 칠한 극단적으로 단순한 회화도 환영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다시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녹색 물감>

생각의 전환, 보는 사람이 문제다?

하지만 '하얀 그림의 역설'을 고민하던 미니멀리즘의 예술가들은 한 가지 번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바로 '인지'의 문제입니다. 환영이 발생하는 이유를 지금까지는 예술가의 '그림 그리는 기술'때문에 발생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다빈치가 리사라는 여인을 기가 막히게 그리니까 환영이 발생한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하지만 예술가의 기술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그림, 즉 온통 하얗게 칠한 그림에서도 우리는 '눈밭'이라는 환영을 봅니다. 즉 환영은 어쩌면 '그리는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보는 사람'이 문제일 수도 있다는 것이죠. 

따지고 보면 우리가 환영을 보는 것은 우리의 뇌에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화가가 그린 그림을 보고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이 현상 자체는 우리 뇌에서 일어나니까요. 

미니멀리즘의 예술가들은 한줄기의 빛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인지 과정'을 다시 분석하면 답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이들은 고민 끝에 '환영'은 '잘못된 인지과정'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게 무슨 소릴까요?

미니멀리즘의 예술가들의 분석에 따르면 환영은 '물감'을 '다른 물질'로 착각해서 인지하는 과정에서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위와 같은 녹색 물감이 퍼진 모양을 보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누군가는 그냥 물감이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는 녹색 나뭇잎 모양을 떠올릴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 이는 우리가 '녹색 물감'이라는 물질을 '나뭇잎'이라는 다른 물질로 인지한 것이 됩니다. 


"답은 '인지과정'에 있구나! "


그림이라는 게 원래 그런 것입니다. 풍경화든 인물화든 '물감'을 화면에 잘 펴 발라서 '어떤 다른 대상'으로 인지시키는 과정인 것이죠. 아까 예를 든 다빈치의 <모나리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리적으로 보면 결국 '잘 펴 바른 물감'이라는 물질을 '리사'라는 여인으로 인지시키는 과정인 것이죠. 즉 환영은 


"원래 물질을 다른 물질로 인지시키는 과정"


라고 결론 지을 수 있습니다. 이는 회화뿐 아니라 고전의 모든 예술에서 발견되는 현상입니다. 조각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예를 들어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은 '하얀 대리석'을 '다비드라는 인물'로 인지시키는 과정입니다. 수십 년간 예술가들을 괴롭혀왔던 '환영'의 비밀이 드디어 밝혀진 것입니다.


해결책 - 벽돌은 벽돌이다

그렇다면 환영을 완전히 제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미니멀리즘의 예술가들은 환영이란 '원래 물질'을 '다른 물질'로 인지하면서 발생하므로, 환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원래 물질'을 '원래 물질 그대로' 인지하는 것입니다. 조금 어렵게 느껴지겠지만 여기서 처음에 예로든 칼 안드레의 '벽돌 예술'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왜 미니멀리즘의 예술가들은 벽돌을 바닥에 깔아 놓았을까요? 벽돌들이 쌓여있는 것은 풍경이나 인물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그저 '쌓여있는 벽돌들'그 자체일 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벽돌을 보면서 그냥 벽돌을 인지합니다. 과거의 예술이 '물감'을 '사람이나 풍경'으로 인식하는 과정이었다면 벽돌 전시는 '벽돌'을 '벽돌'로 인지하는 과정이므로 환영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는 논리가 가능해집니다. 

그렇다면 하고 많은 물건 중에 왜 '벽돌'이었을까요? 미니멀리즘의 예술가들은 주로 공산품들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는 논리적으로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습니다. 벽돌 같은 단순한 형태의 공산품들은 사용 목적이 명확한 물건이니까 다른 물건으로 착각할 여지, 즉 '환영'이 개입할 여지가 적었던 것이죠. 복잡한 형태의 물건, 예를 들어 길바닥에서 주운 둥근돌 같은 걸 전시하면 누군가는 '둥근 사람의 얼굴인가?' 아니면 '계란모양의 조각인가?'라고 착각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환영'이 개입할 여지가 남아있는 것이죠.

 


<댄 플래빈 '구석의 핑크' 1963, '제목 없음' 1966-68>



또 다른 예로 댄 플레빈 같은 예술가는 전시장에 형광등만 덩그러니 달아 놓기도 했습니다. 이 역시 마찬가지인데,  형광등 같은 공산품을 보면서 사람들은 다른 무언가를 떠올리기보다는 그저 '형광등이 있다'라고 인식합니다. '형광등'을 '형광등'으로 인지하기 때문에 '환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공산품 중에 더 화려하고 멋있는 것도 많은데 그깟 벽돌이나 형광등 따위를 전시한다고? 차라리 멋진 장난감을 전시하면 어떨까? 사람들은 '장난감'을 보고 '장난감'으로 인지하니까 문제가 없지 않을까?' 


미니멀리즘의 예술가들의 목적이 '환영의 제거'였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비행기 장난감은 '플라스틱'을 '비행기'로 인지하도록 만듭니다. '환영'이 나타나는 것이죠. 그렇다면 더 극단적으로, 아예 진짜 비행기를 직접 전시하면 어떨까요? 이 역시 최선의 선택은 아닙니다. 복잡한 공산품은 환영이 나타날 개연성이 있기 때문이죠. 비행기는 '새의 환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즉 최선은 아니라는 것이죠. 

이렇게 미니멀리즘에서 선택하는 물건들은 그 물건을 보고 최대한 다른 대상을 상상할 수 없는 최대한 '단순한 물건'이어야 했습니다. '환영'이 최대한 제거된 물건들이죠. 그래서 벽돌이나 형광등 같은 단순한 물건들이 선택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벽돌을 그렇게 최대한 정렬해 놓았던 것일까요? 예를 들어 벽돌을 산더미처럼 쌓아놓을 수도 있는 것 아닐까요? 미니멀리스트들은 환영을 제거하려면 최대한 단순하게 전시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 벽돌을 산더미처럼 쌓아놓을 경우, 사람들은 '벽돌로 산을 만들었나?'라고 상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벽돌'을 '산'으로 인지하게 되므로 그 지긋지긋한 '환영'이 다시 등장하는 것이죠. 그래서 미니멀리즘의 예술가들은 벽돌이나 형광등들을 최대한 단순하게 전시했던 것이죠. 



<솔 르윗  '열린 직육면체/한쪽 구석' 1965>


공산품을 전시하는 방법 말고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이들이 떠올린 다른 '환영이 제거된 미술'은 도형이었습니다. 솔 르윗이나 도널드 저드같은 또 다른 미니멀리즘의 예술가들은 정육면체 같은 도형을 연속적으로 쌓아 놓기도 했습니다. 이들도 본질은 같습니다. 도형의 경우 형태가 극단적으로 단순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를 볼 때 도형 자체만 인식하지 다른 그 무엇, 즉 '환영'을 떠올리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정육면체'는 그냥 '정육면체'로 인식하니까 미니멀리즘에서 도형은 아주 좋은 소재였습니다.

여기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미니멀리즘의 미술들은 극단적으로 단순합니다. 왜 단순해졌던 것일까요? 미니멀리즘 미술이 단순하게 발달한 것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였습니다. 미술의 형태가 복잡해지면 자꾸 '환영'이 개입할 여지가 생기므로 최대한 단순하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패션이나 디자인 쪽에서는 미니멀리즘의 단순함만을 가져와서 사용하는 점은 재미있지만, 정작 원조격인 미니멀리즘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셈입니다.


집착

미니멀리즘은 이렇게 극단적으로 논리적인 미술로 발달합니다. '환영의 제거'라는 근대의 꿈을 끝까지 놓지 않고 붙잡았던 것이죠. 그런데 이 간절함은 점점 집착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미니멀리즘의 예술가들이 점점 '환영'에 집착하기 시작한 것이죠. 모든 물건의 줄을 맞추어야 직성이 풀리는 편집증 환자들처럼, 미니멀리즘은 '환영의 완전한 제거'라는 강령을 달성하기 위해 점점 사소한 것에까지 집착하기 시작합니다. 

그 집착 중 하나는 '관계 끊기'입니다. 이들이 분석한 환영의 발생 이유 중 하나는 '관계'였습니다. 예를 들어 <모나리자>라는 그림은 '리사'라는 여인에게 의존적입니다. 기본적으로 '리사'가 없었다면 존재할 수 없는 미술이기 때문입니다. 벽돌들도 산더미처럼 쌓아놓으면 '산'이 연상되는데 이 역시 '벽돌'이 '산'이라는 대상에 의존적이 됩니다.

환영이 개입할 여지를 최대한 없애려면, 미술이 아예 세상 모든 것들과의 관계를 끊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미니멀리즘의 예술가들은 작품의 제목도 되도록 짓지 않았습니다. 제목을 정하는 것 자체가 관계성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작품의 제작도 예술가가 손을 아예 떼버리고 공장의 사장님들에게 맡기게 됩니다. 심지어 제작자인 작가와의 관계까지 끊으려고 했던 것이죠. 마치 우주의 빈 공간에 철저히 고립되어 떠 있는 물건처럼, 미니멀리즘의 예술가들은 세상과 단절되어 아무런 관계성이 없는 극단적인 물건들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그 집착은 작품을 더 이상 '조각이나 회화'라고 부르지 않는 지경까지 가게 됩니다. 위와 같은 도널드 저드의 정육면체는 무엇으로 분류해야 할까요? 어쨌든 그림이 아니라 입체니까 조각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아마 사람들은 위와 같은 도널드 저드의 육면체를 보고 '단순한 형태의 조각이구나'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도날드 저드는 자신의 정육면체들을 도저히 '조각'이라고 부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조각과 회화는 역사적으로 '환영'을 기반으로 하는 예술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저 육면체들을 '조각'이라고 정의해 놓으면, 사람들은 '저 육면체들은 무슨 계단을 상징하는 조각인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조각'이라는 단어 자체가 자꾸 '환영'이 개입할 여지를 주는 것이죠. 그래서 조각이라는 분류를 버리고 다른 분류를 찾게 됩니다. 그래서 도널드 저드는 자신의 작품을 조각Sculpture이 아니라 특별한 물체SpecificObject라고 불렀습니다. 조각은 분명 아니지만 그렇다고 평범한 물체는 아니니까 '특수한 물체' 쯤으로 말하는 것이죠. 

여기서부터 미니멀리즘의 예술은 조각도 아니고 회화도 아닌, 그저 '특수한 물체'로 정의되기 시작합니다. 환영에 집착하기 시작한 미니멀리즘은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주변과 아무런 관계성도 없이 홀로 존재하는 차가운 '물체'로 변하기 시작합니다. 마치 세상과 단절된 채 홀로 떠다니는 운석 같은 차가운 미술, 그 미술이 바로 미니멀리즘 미술입니다.


1차 해방

미니멀리즘 미술은 근대의 꿈이었던 '평면성'을 완성하기 위해 시작되었지만 전혀 예기지 못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환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다가 '특별한 사물Specific Object'로 스스로 바뀌어버린 것이죠. 

뉴욕의 비평가들이 미니멀리즘 미술을 두고 머리가 지끈지끈했던 이유를 아시겠나요? 사실 당시의 예술가들과 비평가들은 이 '특별한 사물'들에 대해 더 골치 아픈 토론을 해야 했습니다. 환영의 제거를 더 정교하게 하려고 했던 것이죠. 그래서 1960년대의 뉴욕에는 미니멀리즘에 관한 비평가들의 글들로 넘쳐났습니다. 서두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좋게 표현하면 '고급 교양'이 넘치는 시대였고 나쁘게 말하면 '쓸데 없는 골치 아픈 미술'이 판을 치는 시대라고 해야 할까요.

그렇지만 미니멀리즘은 미술사에서는 중요한 미술입니다. 모더니즘 미술이 포스트모더니즘 미술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미니멀리즘은 우선 미술을 '회화와 조각'이라는 전통 형식에서 완전히 해방시키게 됩니다. 지금까지 미니멀리즘이 등장하기 전에는 미술이 '회화와 조각'이라는 분야를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미니멀리즘은 그 회화와 조각을 극단적으로 완성시키려고 하다가 오히려 역설적으로 탈출하게 됩니다. 회화도 조각도 아닌 '특별한 사물'이 되어버렸으니까요. 그리고 여기서부터 소위 '설치 미술Installation'이라는 개념도 생기기 시작합니다. 회화도, 조각도 아니고, 그냥 '설치한 미술이다'라는 것이죠. 이것이 1차 해방입니다. 그리고 미술의 두 번째 해방은, 다음장에서 설명드릴 미술인 개념미술Conceptuall Art에서 최종적으로 완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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