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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신영 Jan 17. 2024

개념미술

영혼이 된 사람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니 그가 삼백 육십 오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세기 5장 중에서-


성경에는 흥미로운 얘기가 하나 나옵니다. 산채로 영혼이 된 '에녹'이라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5장은 아담의 족보를 다룬 내용이라 주로 누가 언제 죽었는지, 몇 세에 죽었는지를 기록하고 있는데, 특이하게도 에녹이라는 인물은 '죽었다'는 표현 대신 '신과 동행하다가 사라져 버렸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겪지 않고 그대로 영혼이 되어버렸다는 것이죠. 사실 어이없는 점은 성경은 에녹에 대해 그 외에 이렇다 할 다른 설명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겪지 않은 사람이라면 분명 보통 인물은 아닐 듯싶은데 말이죠. 어쩌면 신의 친구가 된다는 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일까요? 절대신이라도 심심하시기는 할 테니 '동행'할 친구가 필요했다는 것이죠. 

물론 에녹 사건의 진위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죽음을 겪지 않고 영혼이 된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지 궁금하기는 합니다. 육체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중력 같은 모든 물리법칙으로부터 해방된다는 말인데, 물리법칙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면 시간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다는 말도 됩니다. '인과율'로부터 해방되는 것이죠. 시간을 겪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요? 물론 그런 상태는 아마도 우리의 관념 속에서나 가능할 뿐이기는 합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미술사에서 비슷한 경험을 한 미술이 있었습니다. 바로 물리 세계를 탈출한 관념 속의 미술, 개념미술입니다.



<솔 르윗 '제목없음(큐브)'1979>

1차 해방

개념미술은 미니멀리즘의 자식으로 태어났습니다. 미니멀리즘은 앞서 설명했던 것처럼 미술이 '환영'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다 보니 어쩌다 탄생해 버렸습니다. 그러다가 스스로 '의미 없는 사물'이 되어버렸습니다. 완벽을 추구하다 보니 세상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고 스스로 고립되어 버린 것이죠. 마치 우주에 홀로 떠다니는 운석처럼, 미니멀리즘 미술은 모든 관계를 끊고 '스스로 존재하는 사물'이 됩니다.

그런데 미니멀리즘은 스스로의 의도와 상관없이 결과적으로 '조각과 회화'라는 전통 미술형식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됩니다. 솔 르윗의 정육면체는 그냥 보면 '도형으로 만든 조각'처럼 보이지만 미니멀리즘을 정확히 이해한 사람은 이 정육면체의 의미를 알고 있습니다. 이 도형은 어떤 대상을 묘사한 조각이 아니라 그저 '철저하게 의미 없는 사물'일뿐입니다. 환영이 제거된, 다르게 말하면 관객의 그 어떤 상상력도 자극하지 않는 차가운 사물인 것이죠. 

생각해 보면 예술은 지난 수천 년간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습니다. 잘 그린 풍경 그림을 보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상상하고, 미녀를 그린 그림을 보고는 그녀의 아름다움을 상상하는 것이죠. 그런데 미니멀리즘은 그 무엇도 상상하지 못하도록 장치했습니다. 오래된 미술의 역할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이것이 미술의 1차 해방입니다. 


2차 해방

그런데 미니멀리즘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한번 더 해방되는 2차 해방을 맞이합니다. 이 두 번째 해방이 바로 개념미술입니다. 두 번째 해방이라니, 이게 무슨 뜻일까요?

다시 미니멀리즘 예술가들의 생각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솔 르윗이나 도날드 저드같은 미니멀리즘의 예술가들이 육면체 같은 단순한 도형들을 만들 때 환영으로부터 최대한 벗어나기 위해서 가능하면 흠이 없는 완벽한 형태를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직접 작품을 만드는 것보다는 공장에 의뢰하는 방법이 좋은 방법입니다. 예를 들어 위와 같은 정육면체를 나무로 만든다고 하면 직접 만드는 것보다는 뛰어난 목수 아저씨에게 돈을 드리고 부탁하는 방법이 더 확실한 방법이죠. 

이 과정에서 예술가들은 제작 의뢰를 위한 '작품 제작 설명서'를 만들게 됩니다. 목수 아저씨에게 제작을 의뢰하려면 당연히 '어떻게 만들어주세요.' 하는 설명서를 만들어야 하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작품 제작 설명서'를 만들던 예술가들은 문득 자신의 작품이 정보로 전환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신이 만들려고 했던 거대한 정육면체가 작은 종이 한 장에 문자 정보로 저장되어 있는 것이죠. 

그런데 그렇게 문자 정보로 저장된 정육면체에 대해 생각해 보니, 현실의 정육면체보다 더 완벽합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생각했습니다.


'나는 가장 흠이 없고 완벽한 정육면체를 만들기 위해 공장에 의뢰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세상에 가장 완벽한 정육면체는 이미 우리 머릿속에 있는 것 아닌가?'


목수 아저씨가 현실에서 정육면체를 만들기 시작하면 아무리 세밀하게 작업해도 작은 오차라도 생기기 마련이지만, 제작하기 전에 상상 속에 존재하는 정육면체는 오차 없이 완벽하다는 것이죠. 



<붓꽃과 삼각형>



삼각형의 탄생

사실 도형이라는 게 원래 그러합니다. 원래 도형은 인간의 상상력을 통해 탄생한 것이기 때문에 머릿속에서만 온전한 것이죠. 예를 들어 삼각형은 언제 처음 세상에 등장했을까요? 인류 최초의 삼각형은 신석기시대의 동굴 벽화에서 처음으로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아마 신석기시대의 어느 원시인은 숲에서 먹을 것을 찾다가 우연히 붓꽃에서 삼각형의 형태를 떠올렸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기억을 가지고 동굴로 돌아와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숯으로 벽에 삼각형을 그렸을 것입니다. 그렇게 원시인의 동굴에서 세상 최초의 삼각형이 탄생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탄생한 삼각형을 현실에서 구현할 때는 완벽할 수가 없습니다. 인류 최고의 목수가 혼신의 힘을 다해 나무 삼각형을 만든다고 해도 밀리미터 단위에서는 오차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공학자들이 컴퓨터와 레이저 기계를 이용해서 훨씬 더 정교하게 정삼각형을 만든다면 어떨까요? 마찬가지로 그래도 완벽한 삼각형은 구현할 수가 없습니다. 세계 최고의 공학자가 마이크로 밀리미터단위까지, 인간의 인지를 초월한 단위까지 세 변의 길이를 맞춘다고 해도, 원칙적으로 따져보면 원자단위에서는 오차가 발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완벽한 형태의 삼각형은 우리의 상상 속의 세계, '관념'의 세계에서만 가능합니다.

결국 솔 르윗은 자신이 가장 만들고 싶어 했던 완벽한 형태의 육면체는 상상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즉, 가장 완벽한 형태의 예술은 현실이 아닌 예술가의 머릿속에 존재한다는 것이죠. 여기서 개념미술이 탄생합니다.



개념미술의 탄생

솔 르윗은 그래서 실존하는 작품을 만들기보다, 그냥 작품 계획서 같은 것을 만들게 됩니다. 말하자면 현실의 작품이 아닌 '문자정보로만 구성된' 예술을 만든 것이죠. 위는 솔 르윗의 벽화 드로잉 시리즈입니다. 저런 수학공식 따위가 무슨 벽화냐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위는 분명 솔 르윗의 유명한 벽화 작품입니다. 실제로 저작권도 있으니까요. 이 작품은 '벽화 제작의 설계도'쯤 될 텐데 솔 르윗은 실제 그려진 벽화보다 저렇게 정보로 저장되어 있는 '설계도'야 말로 가장 완벽한 상태의 작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만약 벽화를 현실에서 그려야 한다면 저 설계도에 따라 아르바이트생들을 고용해서 벽화를 그리면 되면 그만인 것이죠. 이렇게 탄생한 벽화는 '설계도'상태의 벽화보다 순수성은 떨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래가 바로 아르바이트생들이 설계도를 보고 제작한 실제 벽화 입니다. 


<솔 르윗 '벽화 드로잉 #1211: 드로잉 시리즈-합성물, 파트 I—IV, #1—24, A+B' 1968>


혹시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결국 저렇게 벽화를 그렸잖아? 똑같은 거 아냐?"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솔 르윗은 실제로 그려진 그림은 그저 결과물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진짜 작품은 저 벽화가 아닌 종이 한 장짜리 '벽화 설계도'라는 것이죠. 솔 르윗은 현실세계에 직접 구현한 벽화와 원래 설계도 둘 중 무엇이 예술의 본질인지 고민해 보면, 자신이 상상했던 관념으로 존재하는 벽화야말로 가장 완벽한 형태의 예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벽화가 실제로 제작되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벽화가 실제로 그려지지 않았다고 하더라고 그의 벽화는 관념 속에 실제 합니다. 솔르윗은 아래와 같이 말했습니다.


"생각은 예술을 제작하는 기계다."


쉽게 말해, 예술의 진정한 본질은 '생각'이고 그렇게 탄생한 예술은 기계적으로 탄생한 결과물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이렇게 관념으로 존재하는 예술이 '개념미술'입니다. 솔 르윗의 개념미술은 미술이 마지막으로 2차 해방을 맞이한 것을 의미합니다. 미니멀리즘까지는 그래도 눈에 보이는 물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면서 미술은 완전히 '관념'속으로 날아가 버렸습니다. 완벽한 해방의 과정입니다.


<요셉 코수스 '하나 그리고 세 개의 의자' 1965>


세 개의 의자

개념미술에서 가장 상징적인 작품은 아마 요셉 코수스의 <세 개의 의자>라는 작품일 것입니다. 이 작품에서 요셉 코수스는 세 개의 의자를 전시했습니다. 하나는 의자 사진, 다른 하나는 실제 의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는 벽에 붙여놓은 의자의 사전 정의입니다. 요셉 코수스는 이렇게 의자 세 개를 나열해서 무슨 얘기가 하고 싶었던 걸까요? 

가장 유명한 개념미술이기도 한 이 작품을 해석하기 위해, 우선 잠시 2000년 전 과거의 그리스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고대 그리스에 요셉 코수스와 비슷한 얘기를 했던 사람이 있었거든요. 바로 이데아의 철학자 플라톤입니다. 아, 마침 플라톤이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와 대화를 나누고 있네요. 둘이 나누는 대화를 잠시 엿들어보겠습니다.


플라톤 : 어이 아리, 여기 의자 보이지? 근데 사실 여기 있는 의자는 진짜가 아니라 가짜야. 허상이며 그림자일 뿐이지.


아리스토텔레스 : 엥? 스승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눈앞에 있는데 가짜라니, 그러면 진짜는 어디에 있는 건데요?


플라톤 : 진짜는 우리가 볼 수 없는 세계에 있다. 바로 '이데아'라는 세계라네.


아리스토텔레스 : 에이~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세요. 의자는 그냥 의자죠.


플라톤 : 허허 멍청한 놈. 내가 위대한 가르침으로 친히 너를 깨우쳐주마. 자 그럼 이렇게 말해보자. 지금 너 앞에 있는 의자 말고, 저기 저쪽에 예쁜 아가씨가 앉아있는 의자를 봐라. 저 의자도 의자가 맞냐?


아리스토텔레스 : (예쁘다...) 의자가 맞긴 하죠.


플라톤 : 그래? 그런데 두 의자는 서로 전혀 다르게 생겼는데? 너는 왜 서로 다른 두 의자를 모두 의자라고 생각하지?


아리스토텔레스 : 그건... 의자는 원래 의자니까...


플라톤 : 세상에는 수천만 개의 다른 종류의 의자가 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 모두를 똑같이 '의자'라고 인식할 수 있느냐 이거지.


아리스토텔레스 : 흠... 글쎄요. 그렇게는 생각 안 해봤네요.


플라톤 : 그러니까 네가 뭘 모른다는 거야. 내가 설명해 주마. 자, 우리는 태어나기 전 이데아의 세계에 있는 '가장 완벽한 의자'를 본 적이 있다.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사람이 태어나려면 망각의 강 레테를 건너서 와야 하지 않니? 사람들은 망각의 강을 건너다 대부분 까먹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어렴풋이 이데아의 세계에서 봤던 그 '가장 완벽한 의자'를 기억해 낼 수 있는 거야. 그리고 그 '완벽한 의자'의 기억을 겨우 겨우 살려서 현실에서 다시 의자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 (말이 되는 거 같긴 한데 왠지 지기가 싫다...) '이데아'라고요? 에이~ 스승님은 이데아가 있다는 걸 증명할 수 있으세요?


플라톤 : 어허! 어디 못 배운 놈처럼 스승의 말에 또 토를 달어? 천상의 세계를 부정하는 게냐? 세상은 분명 현실세계와 이데아의 세계로 이원화되어있다. 흠흠... 다만 증명할 수 없기는 하다. 그래서 내가 말하잖냐. 철인(哲人)은 그 높은 세계의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그리고 그런 통찰력을 가진 철인이 세상을 다스려야 우리 세상이 살기 좋아지는 거야.


아리스토텔레스 : (할 말은 많지만 더 이상 개겼다가는 꿀밤 한 대 맞을 거 같다) 하하.. 그렇네요. 항상 느끼지만 스승님의 세계관은 역시 이상주의적인 느낌이에요.


아마 둘 사이에는 실제로 이런 비슷한 대화가 오고 갔을 것입니다. 플라톤은 대표적인 이상주의 철학자였고 그의 수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에 반기를 들고 실용주의적 철학을 내세웠던 사람이니까요. 플라톤은 저 먼 천상계에 완벽한 세계, 즉 '이데아'의 세계가 있고 우리의 세계는 그 이데아의 '복제'에 불과하다고 보았습니다. 우리 눈앞에 있는 의자는 '이데아'의 세계에 있는 가장 완벽한 의자의 복제품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의자 말고 다른 예를 들어볼까요? 인간은 어떻게 선한 행동을 할 수 있을까요? 플라톤은 우리가 탄생하기 이전, 저 먼 이데아의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선(善)을 보고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억을 되살려서 선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거죠. 플라톤이 보기에 우리 세상의 모든 것은 그저 이데아의 복제에 불과한 셈입니다. 

다시 요셉 코수스의 <세 개의 의자>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아무래도 요셉 코수스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그대로 오마주한 것으로 보입니다. 의자라는 소재를 사용한 것도 그러한데, 보통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설명할 때 가장 예시로 많이 사용하는 사물이 의자이기 때문입니다.

요셉 코수스는 의자를 통해 개념미술의 의미를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의자를 예술로 빗대어 '예술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한번 파악해 보자는 것이죠. 요셉 코수스가 전시한 세 개의 의자를 보겠습니다.


1. 의자의 사전적 정의 - 개념(이데아) 속의 의자

2. 진짜 의자 - 이데아를 복제한 의자

3. 의자 사진 - 이데아를 복제한 의자를 다시 복제한 사진


무엇이 가장 '의자의 본질'에 가까운 것일까요? 의자의 개념? 아니면 그 개념에 따라 현실에 직접 만들어낸 의자? 아니면 그 현실 의자를 다시 사진이나 그림으로 복제한 의자? 

만약 복제의 순서를 따진다면 1>2>3이 됩니다. 이데아의 세계에 가장 먼저 의자가 있었고, 현실 의자는 그 이데아를 복제한 것이며, 의자 그림은 현실의자를 다시 그림으로 복제한 것이니까 진실에서 가장 멀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개념 예술가들은 개념 속의 의자가 가장 본질에 가깝다고 보았습니다. 예술의 본질은 바로 우리의 머릿속에 있다! 바로 개념미술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근대미술의 최후

개념미술이 등장하면서 모더니즘 미술은 최후를 맞이합니다. 잭슨 폴록의 등장 이후에도 20년을 더 버텼지만 결국 최후를 맞이한 것이죠. 모더니즘 미술은 한마디로 정의하면 '형식 주의'였습니다. 비평가 그린버그에 따르면 모더니즘 미술은 


"각 매체의 본질적이고 형식적인 성격을 정의하려는 목표를 향해 점진적인 축소와 개선의 과정"


입니다. 말이 어렵지만, 쉽게 말하면 모네, 고흐, 피카소, 잭슨폴록 같은 수많은 예술가들이 그림이란 무엇인지 고민하고 해답을 찾아내서 정의하는 과정이었다는 것입니다. 모더니즘 회화는 그 수많은 예술가들을 거치고 나서 최종적으로 그림의 본질을 '2차원 평면'으로 정의했고 평면을 완성하기 위해 '환영'을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회화라는 '형식'을 끝까지 파서 궁극의 완성을 이루려고 했던 것이죠. 

그런데 궁극의 완성으로 가는 과정에서 결과적으로 회화 자체가 사라져 버립니다. '환영'을 제거하다 보니 미니멀리즘 미술이 등장했고, 그다음의 개념미술까지 오면서 미술이 우리 머릿속의 개념으로 숨어버린 것이죠. 그토록 형식을 완성하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오히려 형식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된 것은 아이러니 그 자체입니다. 그렇게 예술은 육체의 옷을 벗고 개념으로 승천해 버렸습니다. 신과 함께 동행했던 에녹처럼 말이죠.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의 시작

모더니즘 미술은 그렇게 끝이 나고 여기서부터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이 시작됩니다.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은 기본적으로 '탈형식'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 이상 과거의 '회화와 조각'이라는 형식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퍼포먼스, 영상, 설치 등등 수많은 가능한 모든 형식을 실험하는 것이죠. 결과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은 무한한 실험의 장으로 진화합니다. 현대미술이 어려운 이유가 이것인데, 현대의 예술가들은 모든 가능한 형식을 시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용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차피 제약이 없으니 각자 하고 싶은 얘기를 미술을 통해 마음대로 떠들기 시작하는 것이죠. 예술가들은 자신의 관심사, 예를 들어 철학이면 철학, 사회문제면 사회문제, 이념이면 이념 말 그대로 무한한 주제를 가지고 예술을 창작하기 시작합니다. 예술가들 입장에서무한한 자유가, 반대로 관객의 입장에서는 무한한 어지러움이 느껴지는 시대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데 반대로 오히려 이해하기 더 쉬운 게 현대미술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정신없어 보여도 결국 예술가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고 우리가 친구에게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예술가들도 관객에게 작품을 통해 무언가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이니까요. 어려운 것은 모더니즘 미술의 마지막, 개념미술까지 입니다. 현대미술은 그저 예술가들이 던지는 메시지를 그대로 들으면 될 뿐이니까요. 앞으로 13명의 예술가들이 우리에게 무슨말을 하고싶어하는지 한명씩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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