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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러 Mar 14. 2019

여전히 최익현들의 사회

<범죄와의 전쟁>을 보고 난 뒤,


 ‘아이고 안녕하십니까'

 한 아저씨가 내 옆자리에 앉은 아저씨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자연스럽게 악수를 하며 자리에 앉았다. 나의 아버지와 비슷한 세대의 아저씨들 같았다. 보통 지하철에서 초면인 사람들이 담소를 나누는 건 아주머니들만 그런 줄 알았는데, 아저씨들도 똑같더라. 다만 대화 주제가 무조건 정치일 뿐이었다. 나는 이어폰을 꽂고 '범죄와의 전쟁'을 보고 있었는데, 아저씨들 목소리가 워낙 커서 그 대화를 강제로 듣게 되었다.


 ‘내가 청와대에 거 아는 사람 있다 아입니까'

 ‘거 막 안보실장 거 있슴다 갸가 내 친굽니다'


 들을 가치도 없는 대화들이 지하철 칸에 울려 퍼졌다. 다른 사람들은 신경도 안 쓰거나, 대화 소리가 너무 커서 눈을 찌푸리고 있는데, 정작 본인들은 서로를 치켜세우면서, 이렇게 대단한 사람을 몰라봤다면서 서로 악수하고 하하 웃고 또 악수하고 또 하하 웃고.. 마치 청와대에 '안보실장 친구'라는 직책이 있는 것 같았다. 진짜 그 아저씨가 안보실장 친구인지 아닌지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정작 그 아저씨가 뭐하는 사람인지는 대화를 마치고 지하철에서 내리는 그 순간까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범죄와의 전쟁'에서 주인공 최익현은 오로지 혈연, 인맥에 의지하여 부와 지위를 가진다. 본인의 실질적인 능력이라곤 사실상 없다. 주먹을 잘 쓰는 것도 아니라 최형배가 없으면 사실상 건달 세계에서 아무것도 아닌 셈이고, 최형배가 주먹이면 본인은 머리라고 말하지만, 그 머리라는 게 결국은 인맥이란 인맥을 긁어모아서 로비하는 것뿐이다. 최익현이 부장검사를 소개받을 때 받은 명목이 '형님의 할아버지의 9촌의 손자'다. 사실상 생판 남인데, 그놈의 어디 최 씨, 어디 공파가 뭐라고. 같은 가문이라는 이유로 최익현은 든든한 빽을 얻게 된다. 최익현은 최영배에게 칼침을 맞고 몸싸움을 벌이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씨바 내가 누군 줄 알고.. 내가 누군 줄 알고..'라며 중얼댄다. 정작 스스로의 능력으로 얻은 건 없음에도, 최익현은 '내가 누군지'로 남을 찍어 누른 게 중요하다. 정작 본인 스스로 '내가 누군지'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우리 아버지 세대는 참 이상하리만치 혈연을 중요시한다. 나는 어린 시절, 내 세대의 유일한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비정상적인 수준의 기대와 칭찬을 받아왔다. 지금도 기억하는 건, 어떤 할아버지가 나는 김녕 김 씨 무슨 공파의 독자라는 이유로 용돈을 주고, 내 할아버지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늘어놓더니, 옆의 친구는 별 볼 일 없는 어디 김 씨 어디 공파라며 눈길도, 용돈도 안 줬던 것이다. 나는 그런 게 자랑스럽긴커녕 부끄럽고 부담스러웠다.


 혈연 지연 학연 따위로 온갖 부조리가 판치는 사회가 곪고 곪다가 빵 하고 터진 것이, 대통령 친구라는 이유로 대통령과 맞먹는 권력을 휘두른 최순실 사태였다. 하지만 전 국민이 그 사태를 목도했음에도, 여전히 우리 사회는 바뀌지 않았다. 그 시대가 당연하게 여긴 것들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결국 그 시대처럼 살아가는 것이었다.


 다음 날도 늘 그랬듯이 학원을 가려고 지하철을 탔는데, 어제처럼 어떤 아저씨가 내 옆의 아저씨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아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작했다.


 ‘지금 문재인이가 잘하는 게 뭐가 있어. 지금 청와대 것들 죄다 깜빵 보내야 해. 박근혜도 깜빵 보냈는데 문재인은 왜 못 보내? 탄핵한 거, 그거 아주 잘못된 거야. 박근혜가 쌓아둔 돈이 어딨다고? 부정부패는 말야. 김대중이, 노무현이가 대통령 할 때 제일 심했어. 그런 거 보면, 참 박정희가 대통령 하길 잘했어. 그때 김대중이가 대통령 됐어봐! 우리나라가 이만큼 먹고살 수 있었겠어?'


 우리 사회는 생각보다 많이 바뀌지 않았다. 여전히 이 사회의 아버지 세대는 수많은 최익현들로 넘쳐난다. 그 세대가 번 돈으로 자랐지만, 그 세대의 비뚤어진 기대와 사상에 동화되지는 않아야 할 텐데.


 우리 세대도 비슷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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