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블러 Jul 22. 2019

쏜애플 3집 [계몽] 리뷰

'왜 팬들은 윤성현을 미워할 수 없는가?'의 적당한 해답


쏜애플 3집 [계몽]

2019


★★★★


[이상기후]라는 멋진 작품으로 상승세를 타 쭉쭉 올라갈 것만 같았던 그들은, 보컬 윤성현이 사석에서 부적절한 표현법으로 타인의 음악을 비유하면서 제동이 걸렸다. 그 논란에 대한 해명은 오히려 화재에 기름통을 던져버린 셈이 되었다. '자궁 냄새'라는 표현은 모성에 대한 공포를 의미한다나 뭐라나. 난해하고 자의식 가득한 표현과 해석을 아이덴티티로 삼아 강점을 확보하던 그였다. 하지만 해석이고 뭐고 제 3자에게 불쾌감만을 안겨줄 뉘앙스의 단어 사용은 그의 강점이 곧 치명적 단점으로 바뀔 수 있음을 드러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사건 이후 발매된 EP [서울병]은 그의 작법이 여전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위축되고 소극적인 것도 아니었고, 1차원적인 불쾌감이 느껴질 가사도 없었다. 필자는 예술에서의 자의식 과잉에 관대하고, 사석에서의 자의식 과잉은 경계하는 스타일이라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논란에 관한 이야기는 여전히 찝찝하지만, 어쨌든 쏜애플의 음악은 죽지 않고 생명을 이어갔다. 윤성현이란 작자는 원래 그런 사람이거니, 하고 넘기면 편하더라.


이런 생각을 하는 필자였기에, 정규 3집 [계몽]은 조금 놀라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전작들과 비교해보면, 상대적으로 작법이 친절해졌다. 상징적 표현과 은유들은 여전하고, 본질적으로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지는 골똘한 해석이 필요하긴 하지만, 적어도 ‘시팔 이게 뭔 소리야’ 하면서 이해를 포기하고 자의식 가득 찬 음악으로 치부할 수준까지는 가지 않는다. 그의 작법이 대중친화적으로 변했다기보단, 조금 더 정갈해졌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이상기후]는 아무리 횡설수설이어도, 그러한 작법의 카리스마와 락킹한 사운드, 대중적 멜로디 라인으로 완벽하게 커버했다. [계몽]은 여기서 좀 더 업그레이드되어, 사운드뿐만 아니라 작법 또한, 적어도 청자가 무슨 감정을 느끼고, 무슨 메시지를 받아야 할지 확실한 이정표 정도는 세워놓았다.


‘내게 봄은 없겠지. 시들어만 가겠지. 마음이 모두 닳아 없어질 것만 같아.’

‘목을 꺾어 뒤를 봐요. 잊고 싶은 일들이 한가득 있어. 몸을 돌려 앞을 봐요. 하고 싶은 일들이 한가득 있어.’

(3번 트랙 ‘2월’ 中)


‘이제 한 걸음만 더 가면 잡을 수 있을 거야.’

‘어느새 난 집에서 멀어지고 이지러져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네.’

‘어쩌면 너는 그냥 처음부터 없었나.’

‘함부로 나오지 말 걸 그랬나. 잠이나 잘걸.’

(6번 트랙 ‘기린’ 中)


이렇듯 화자의 감정과 현재 처한 상황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작법, 그리고 이야기의 흐름에 따른 화자의 생각과 상태의 변화를 보여주는 작법 따위는, [이상기후]의 대표곡인 ‘시퍼런 봄’이나 ‘낯선 열대’에서 사용된 난해한 비유적 표현들과 비교해보면 상대적으로 훨씬 깔끔하게 느껴진다. 깔끔하다고 해서 매력이 사라진 것도 아니고, 여전히 쏜애플, 그리고 윤성현만의 가사라는 느낌이다. 대중적인 관점에서 매우 긍정적인 발전이다.


각 트랙의 구성이나 멜로디 면에서도 [계몽]은 상당한 탁월함을 지닌다. 몽환적인 사운드를 내기 위해 이완되는 듯 아름다운 기타 리프를 강화하고 신시사이저를 적극 사용한 것이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이고, [이상기후]에서 보여준 대중적인 감각의 멜로디 메이킹은 이 앨범에서도 여전하다. 그런데 대중성과는 조금 맞지 않게, 앨범을 쭉 듣다보면 러닝타임이 5분 안팎인 곡들이 많다. 왜 이렇게 길게 만들었나, 하고 곱씹어보면 그 안에 독특한 불규칙적 구성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쏜애플은 그 불규칙을 은근히 자연스레 엮어낸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곡이 ‘수성의 하루’다. 끊임없이 몽환적인 사운드를 끝까지 때려 박은 ‘마술’ 다음으로 이어진 이 트랙은 ‘마술’과 마찬가지로 몽환적인 인트로를 들려준다. ‘대충 이렇게 난해하게 가겠네.’ 싶던 찰나, 갑자기 대중적인 멜로디 라인을 가진 훅을 확 때려 박는다. 그러더니 속도감 있는 브릿지로 느낌을 달리했다가, 다시 귀에 착착 감기는 훅으로 돌아온다. 이 앨범 대부분이 이런 식이다. 균열과 접합의 음악이다. 전체적으로 전형성에서 벗어나 있지만, 부분적으로는 청자가 오랫동안 되새길 핵심적인 한방이 있다.


맹렬히 질주하는 느낌이 강한 ‘시퍼런 봄’이나 ‘물가의 라이온’처럼 신나게 뛰놀만한 락킹함은 덜하고, 흐느적거리고 일렁이는 느낌이 강조된 앨범이라, 누군가는 [이상기후]보다 좀 미적지근하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계몽]은 적어도 쏜애플이 가진 음악적 욕심과 열망이 확실하게 드러나는 앨범이다. 누군가의 눈치를 살피며 만든 앨범이 아니다. 그들만의 생각과 집념으로, 쏜애플만의 음악성을 더욱 확고하게 강화한 앨범이다. 훌륭한 성장의 결과다.




매거진의 이전글 전기뱀장어 2집 [Fluke] 리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