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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구사 Dec 14. 2020

오란씨와 총자 1

2. 형광팬 캠프

우유가 아무리 싸도 가방이 뜯어질 만큼 담아 오면

가방도 터지고 우유도 터지고 내 속도 터진다는 것.



하늘에서 별을 따다

하늘에서 달을 따다

두 손에 담아드려요


오란씨를 품에 안고 과자를 담은 봉지를 달랑달랑 흔들며 집으

로 간다. 봉지에 같이 담으면 오란씨가 흔들려서 도착하자마자

바로 마실 수가 없다. 귀한 탄산음료가 부글부글 넘치게 되니까.

회사에 다닐 때는 코카콜라를 마셨지만, 요즘은 오란씨를 마신

다. 덩달아 CM송도 자주 부른다. 부를 때마다 별을 보기 힘든 서

울 하늘 아래서 부르니 더 각별한 맛이 나는 가사라고 생각했다.

달콤한 목소리로 별을 따다 두 손에 담아준다고 노래하지만, 실

상은 별을 따기는커녕 보기도 어렵다는 점에서.


사실 요즘 오란씨를 자주 마시는 건 돈 때문이다. 동네 마트에

서 코카콜라는 거의 3천 원인데 오란씨는 할인받으면 천 원이면

살 수 있었다. 아르바이트해서 버는 돈은 족족 시험공부에 들어

갔다. 통장의 잔고를 파먹고 살기 시작한 다음부터 탄산음료가

마시고 싶을 때는 오란씨로 타협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인지라

오란씨도 썩 맛있었고 특유의 탄산에도 적응되었다. 오란씨는 김

이 빨리 빠져서 다음날만 되어도 톡 쏘기는커녕 슬쩍 툭 치는 듯

한 탄산만 남았지만, 초등학교 때 먹던 슬러시 맛이 나서 좋았다.

사실 내 수입은 너무 짜서 가계부에 물을 타야 할 지경인데. 적응

을 못 하면 어쩔 거냐.


이런 상황이라 <무한도전> 형광팬캠프에 합격하고 나서도 새

옷을 살 생각은 못 했다. 주변에는 합격하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쫙 빼입겠다고 이야기했지만, 진짜 옷을 사야겠다고 생각하진 않

았다. 그냥 집에 있는 옷이면 되겠다 싶었다. 그러나 내 주변 사람

들이 나를 들들 볶았다.


‘내가 너 그럴 줄 알았다. 이 독한 놈. 구두쇠. 짠돌이.’


주변 성화에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일단 신발을 사러 명동

에 갔다. 사실 신발은 안쪽 뒤꿈치 부분이 다 찢어져서 스펀지 정

도가 아니라 플라스틱이 보였다. 그전부터 짠돌이긴 했지만 나도

신발 뒤꿈치에 플라스틱이 들어있는지는 그때 처음 알았다. 전보

다 허리띠를 졸라매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에 알게 된 사실 중의

하나다.


덕분에 알게 된 다른 것들도 많았는데 예를 들면 중고 창문형

에어컨으로 7평을 시원하게 하는데 한 달 3만 원이면 된다는 것.

창문형 에어컨 설치비와 앵글 값은 합쳐서 25만 원이지만 내가

동네의 버려진 합판과 가구를 잘라서도 앵글을 만들고 설치할 수

있다는 것. 그걸 마치고 나면 하루치 공부를 날렸다는 자괴감과

근육통에 몸서리치게 된다는 것. 그래도 시원한 곳에서 몸서리치

는 게 낫다고 위안하며 다시 책을 펴기는커녕 <무한도전>을 보게

된다는 것. 코스트코에서 우유 가격을 후려치는 날은 대체로 수

요일이라는 것. 우유가 아무리 싸도 가방이 뜯어질 만큼 담아서

오면 가방도 터지고 우유도 터지고 내 속도 터진다는 것. 절약하

며 사는 것은 오란씨의 탄산뿐만 아니라 이렇게 많은 것들을 새

로 알려주었다.


고시원에서 살면서 아등바등 모은 돈은 오피스텔을 구하면서

상당 부분 사용했다. 시험 자격 요건을 채우기 위해 대학에 편입

하면서 등록금도 내야 했다. 결정적으로 수험생활이 얼마나 길어

질지 몰랐기 때문에 최대한 돈을 아껴야 했다. 공기 빼고는 뭐든

지 아낄 방법을 궁리하며 지냈다. 그런 나도 신발은 새로 사야겠

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신발 상태는 참혹했다. 동생은 현관에서

내 신발을 볼 때마다 ‘이제 이 아이를 그만 놓아줘야 한다.’고 했

다.


명동은 신발 할인 매장이 많았다. 다년간의 경험으로 같은 프랜

차이즈도 명동에 있는 매장이 제일 저렴하고 물건도 다양하다는

것을 파악했기 때문에 10만 원을 가지고 명동에 갔다. 이 돈은 아

끼지 않고 꼭 다 쓰고 와야지 하고 다짐했다. 매장 여러 곳을 기

웃거렸지만, 가격이 어마어마했다. 마음에 드는 모델들은 예산을

초과하기 일쑤였다. 그중에 마음에 꼭 드는 나이키 신발이 있었

으나 12만 원이었다. 고민 끝에 아디다스 코너로 발을 돌렸다. 내

신발은 아디다스가 많았는데 이상하게 가는 곳마다 나이키보다

조금 싼 신발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역시 이번에도 조금 저렴하고

괜찮은 신발을 찾았다. 짙은 회색에 디자인도 예뻤고 발도 편했고

무엇보다 가격이 10만 원이었다. 거의 마음을 정하기 직전. 같은

모델을 6만 원에 팔고 있었다.


이럴 수가. 6만 원? 짠돌이가 그냥 지나칠 수 없지! 비록 빨간색

이지만. 사실 빨간색이라기보다는 잘못 말린 고추 끝처럼 약간

다홍색에 가까운 미묘한 색이지만. 거의 반값 아닌가! 4만 원을

아끼고 빨간 신발을 신느냐 아니면 처음 다짐대로 10만 원짜리

맘에 드는 신발을 사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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