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게으른 여행자 Jun 01. 2021

나의 열두 개의 우정들에 대하여

내게는 2년쯤 된, 인간관계 치고는 아직 덜 여문 우정이 하나 있다. 대개의 우정이 그렇듯 언제 무엇으로부터 만들어졌는지 명확히 설명하기 어려운 관계다. 우리 셋은 공통점이 많지 않다. 나이는 각각 20대, 30대, 40대이며 일하는 곳에서 만났지만 지금은 흩어졌 직업도 다르다. 한 명은 결혼했고 한 명은 애인이 있으며 한 명은 이도 저도 없다. 두 명은 술을 좋아하고 한 명은 맞춰주기 위해 마신 후 적당히 토 해낸다. 공통점이 있다면 셋 다 산책을 즐긴다는 것인데 셋이서 산책은 딱 한 번 했다. 사람을 자주 만나는 편이 아닌 나 빼고 둘은 자주 봤는지도 모르겠다.


코로나 시대다운 사교로써 단체 카톡방에서라도 틈틈이 일상을 공유하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우리의 단톡방은 만남을 앞두고나 일정을 조율하기 위해 잠시 북적일 뿐 만남 후 각자가 찍은 사진을 공유하는 걸 끝으로 또다시 긴 침묵에 빠진다.       


이렇게 느슨한 관계를 감히 우정이라 말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우정을 구성하는 요소는 무엇인가? 순수한 의도, 비슷한 취향, 너무 대립하지 않는 정치적 성향, 기꺼이 시간을 공유하겠다는 허용, 무엇보다도 서로를 알아보고 다가가기로 하는 결단...... 열거하자면 많고도 많다. 차라리 우정 성립을 방해하는 요소를 따져보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첫째, 서로 미워하면 친구가 되어도 괴롭다. 매일 만나서 노닥대면서도 은근히 서로 미워하는 사이를 나는 너무나 많이 직간접으로 경험했다. 우정 또한 인간 사이에서 피어나는 정념이기에 사소한 질투나 배아픔은 자연스럽지만 이것이 시기심이나 미움으로까지 이어진다면, 서로를 친구라 호명할수록 로에 대한,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환멸을 견뎌야 한다.


들째, 서로 미워하지 않는데 만나서 할 얘기가 없거나 재미가 너무 없는 경우다. 이런 경우는 악연조차 될 연이 아닌 것으로 서로 친구가 되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셋째, 이전까지 별로 거슬리지 않던 친구의 화법이나 행동 패턴이 신경 쓰이다 못해 거북 해지는 경우다. 각자의 상황이 크게 변했거나 어느 한 편이 참다 지친 경우다.       


우리는 앞에 열거한 우정의 성립 요소를 다 갖추었으며 불가능 요소에는 해당사항이 없으므로 우정을 나눌 수 있었다. 무엇보다 우리 사이의 공통점 없음, 그러니까 서로 질투하거나 배 아파하기엔 각자가 위치한 삶의 미션 스테이지가 너무 다름 덕에 느슨하게, 그러나 안전하게 우정이 작용하는 것일지 모른다는 추측을 어느 정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변수, 상황이 급변한다거나 누군가 변한다거나, 사소한 오해로 미움이 싹튼다거나...... 하다못해 만나면 재미가 없어진다거나 등 우정을 파괴하는 요소가 우리 사이에 드리운다면 우리의 우정도 도리가 없을 것이다. 이것은 우정의 성립에도 파탄에도 참여자들의 의지가 생각보다 크게 작용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니 깨져버린 관계로 인해 자책하는 이여. 내가 특별히 좋은 사람이어서 그와 친구가 된 것이 아니듯 내가 부족해서 친구가 떠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사귈 때도 헤어질 때도 내 의지는 생각보다 크게 작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를 당부드린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설렘 속에 시작되어 절정으로 치닫고는 서서히 명멸하다 결국 소멸해버린, 과거 열 두 개쯤의 우정을 기억하고 있다. 깨진 우정은 반드시 크고 작은 자국을 남겼다. 어떤 건 웃겼고 어떤 건 아팠고 어떤 건 분노를 남겼다. 과거의 어떤 우정도 평생 머릿속에서 지워지지는 않을 것이다. 우정을 누렸다면 그 찌꺼기 또한 각자 처리해야 한다.


우정은 역시 위험하다. 언젠가 끝나버리기 때문이 아니라 끊임없이 다가을 피하기 어렵기에 위험하다. 찌꺼기가 무서워 다가오는 우정을 포기하기엔 나는 아직 건강해서 상처가 금새 아물며, 여전히 잘 웃고 잘 웃긴다. 우정의 가능성은 언제나 드리워있고 그것이 나를 덮치면 속수무책 끌려들어 가리라는 걸 알고 있다.      


우리의 우정이 언제까지 지켜질 수 있을까? 이번 우정의 유통기한을 따지기보다 유용한 일은 나의 귀여운 친구들과 영원하지 않을지 모를 우정을, 가능할 때 마음껏 나누는 일이란 걸 안다면서도 나는 자꾸 노력하려 든다. 가능한 오래 지킬 수 있기를, 상황이 변해도 우리가 달라지지 않기를, 달라져야만 한다면 서서히 달라져서 서로가 알아챌 수 없기를, 상대를 인내하는 걸 넘어 그냥 포용해버릴 수 있기를, 더 알맞은 사랑을 배우게 되기를...  매우 어려운 꿈을 또다시 가져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지금만 가능한 사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