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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해방일지 1

먼 길을 떠나려는 사랑하는 부친에게

by 화양연화

나와 아들 둘은 방학 때마다 현장 학습을 핑계로 유럽 여러 나라를 다녔는데 유일하게 남편만 유럽 여행을 가지 못했다. 지난 5월 홈쇼핑에서 동유럽 투어 상품을 보던 남편이 말했다. 나도 저런 데 가보고 싶다고. 평소라면 지나쳤을 테지만, 그날따라 가늘어진 모발 때문에 그의 뒤통수가 더욱 휑해 보여 나도 모르게 말해버렸다.


“가자! 내가 쏠게”


호기로운 내 말에도 개인 사업하는 ‘간이 작은 남편’은 사업장 문을 닫고 떠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래서 결론은 긴 추석 연휴를 이용하기로 했다. 추석 연휴 뒤에 여름휴가까지 붙여서야 남편은 비로소 떠날 마음을 먹었다. 그 말인즉슨 비싼 여행비를 ‘내가’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난 남편 돈은 내 돈, 내 돈은 내 돈이라는 철학으로 인생을 살아왔다. 그런데 그의 휑한 뒤통수에 측은지심이 생겨 순식간에 ‘텅장’을 자초한 꼴이 된 것이다. 자나 깨나 입조심하자!


봄에 결제한 여행이 어느덧 다가와 우린 여행 짐을 쌌다. 여행에 앞서 놀라운 소식도 있었는데 내 소설 ‘소풍을 빌려드립니다’가 국립 중앙 도서관 추천 도서로 선정되어 인터뷰까지 다녀왔다. 추천 도서 중 국내 문학으로는 내 소설이 유일했고 난 내 작품이 인정받은 것 같아 내심 뿌듯했다.


모든 것이 무탈한 내게 한 가지 걱정이 있었는데 바로 부친이다. 자식이 많아도 특별히 의지하고 가까운 자식이 있는 법인데, 부친에겐 내가 그랬다. 내가 가장 만만하고 친밀했고, 우린 일 년에 한두 번 단둘이 여행하곤 했다.


여름 들어 부친은 건강이 부쩍 악화되었다. 9월엔 몸도 아프고, 마음도 울적해하시는 부친을 집으로 초대해 일주일을 함께 보냈다. 갈치조림, 육회비빔밥, 추어탕 등 평소 부친이 좋아하는 맛집을 모시고 다녔는데, 드시는 것도 시원찮고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양반이 드라이브도 마다하고 집에 가자고만 했다.


떠나기 전날, 부친은 미리 준비한 유서를 내밀었다. 얼마 안 되는 재산을 어떻게 나눌지와 자신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기면 연명 장치는 하지 않겠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난 왜 이런 걸 써 왔느냐고 화를 냈다. 몸이 아프면 검사를 받아야지 대체 이게 뭐냐고!


다음 날, 부친은 본가로 가기 위해 광명역에서 KTX를 탔다. 휘청이며 기차에 올라 힘없이 손을 흔드시는 부친을 보며 나도 아무렇지 않게 손을 흔들었다. 기차가 떠나고, 주차장으로 돌아온 나는 차에 앉자마자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왠지 이번이 그의 마지막 여행인 것만 같아서. 그가 영원히 내 곁을 떠날 것만 같아서.


부친의 검사 결과는 암이었다. 오래전 췌장암 수술을 받았고 십 년 넘게 건강하게 생활했는데, 현재 여기저기 전이되어 손 쓸 수 없는 상태라고 했다. 본인의 몸 상태를 감지한 부친이 유서를 들고 왔던 거다.


난 하루에도 여러 번 그에게 안부 전화를 걸었다. 식사는 하셨는지, 배는 안 아픈지, 컨디션은 어떤지 물었고 그는 말짱하다며 11월엔 언니가 원장 선생님으로 발령받은 곳에 놀러 가기로 약속도 했다. 혹시 내가 여행 가고 없는 사이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여행을 취소할지 고민하는 내게 부친은 아직은 끄떡없다고 큰소리치셨다.


추석 연휴가 시작되고 공항에 도착한 난 부친에게 전화를 걸었다. 부친은 낭랑한 목소리로 잘 놀고 오라고 했다. ‘김 서방’(=남편) 모처럼 떠나는 여행인데, 즐겁게 놀고 오라고. 14시간을 날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구겨진 몸뚱이를 이끌고 숙소로 들어와 굽은 다리를 펴고 잠자리에 들었다. 프랑크푸르트는 한국보다 추웠다.


피곤했지만 여행의 설렘 때문인지 새벽에 눈이 떠졌다. 남편은 눈 뜨자마자 독일의 역사에 관해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그냥 연설만 하면 좋은데, 꼭 질문을 한다. 내가 모르는 걸 뻔히 알면서 말이다. 난 속으로 중얼거렸다.

“연설하고 있네.”


호텔 조식을 먹고 방으로 돌아오니 남동생에게 톡이 와 있었다. 부친이 중환자실에 입원했다고 했다. 순간 난 정신이 멍해졌다. 이건 아니지. 드라마에서도 이런 건 너무 작위적이지 않은가? 하필 이런 순간에. 여기까지 왔는데.


다시 돌아가야 하나. 여행할 생각에 신나서 양치하고 있는 ‘김 서방’에겐 뭐라고 말해야 할까. 난 조용히 밖으로 나와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는 그리 응급한 상황은 아니니까 여행하고 오라고 했다. 부친이 의식도 있고, 지금은 중환자실에 있으니 당장 와도 특별히 할 것도 없다고 했다. 난 일단 전화를 끊고 아무것도 모르는 김 서방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착한 김 서방, 괜히 마음만 불편할 테니까.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하루를 보내고 호텔로 돌아온 나는 혹시나 해 돌아갈 비행기 표를 검색했다. 추석 연휴라 돌아갈 표는 없었다. 그런데 다음 날 새벽, 언니가 울면서 전화했다. 담당 의사가 임종 면회하라고 했단다. 난 바로 인솔자에게 연락해 돌아갈 표를 구해달라고 요청했다. 현지 가이드, 여행사, 대사관까지 난리법석을 피워 간신히 돌아가는 표를 구했다. 그때 우리는 빈에 있었는데, 돌아가는 비행기는 이스탄불을 거쳐 인천으로 들어가는 비행기였다. 편도로 둘이 합쳐 천만 원, 여행 경비와 맞먹는 금액이었다.


투어버스가 남편과 나를 빈의 어느 도로에 내려놓고 떠났다. 수능 영어는 백 점 맞았어도 말할 줄 모르는 남편과 시험 점수는 낮았어도 대충 의사 표현이 가능한 나는 물어물어 공항버스를 타고 빈 공항에 도착, 이스탄불행 비행기를 타는 데 성공했다. 다시 이스탄불에서 서너 시간 대기했다가 인천공항에 도착했고, 난 바로 광명역으로 가서 기차를 탔다. 내가 도착할 때까지 부친이 살아 있길 기도하면서 부친께 긴 편지를 썼다. 눈물 콧물이 흘러 하마터면 내릴 기차역을 놓칠 뻔했다.


부친이 입원한 중환자실에 도착했을 땐 밤 한 시가 넘고 있었다. 난 벨을 눌렀다. 잠시 후 간호사가 나왔고, 난 커다란 케리어를 끌고 서서 내 처지를 설명하는 대신 눈물을 줄줄 흘렸다. 면회 시간은 아니지만, 간호사는 내 꼴을 보고 특별히 면회를 허락해 줬다.


다행히 부친은 살아계셨다. 주렁주렁 달린 여러 개의 링거, 소변줄, 심전도 기계, 배에 뚫린 관을 통해 복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난 부친의 귀에 대고 긴 편지를 읽었다. 목이 메어 소리가 나오지 않았지만, 최대한 또박또박 내 마음을 전달했다. 읽기를 끝낸 내가 “아빠, 다 들었지?” 하고 묻자, 부친은 눈을 감은 채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 난 담당 의사를 만나 아버지 상태를 들을 수 있었다. 어차피 가망이 없는데, 중환자실에 부친을 혼자 두고 싶지 않았다. 연명은 부친이 원치 않는 일이기도 했다. 호스피스 병원을 예약하고 기다리는 동안 부친을 1인실로 옮겼다. 그동안 가족들과 함께 있어야 그가 덜 외로울 테니까. 남편이 아이들을 데리고 내려와 부친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올라갔다. 난 혼자 남아 그의 간호를 시작했다.


사람이 죽기 전에 뱃속에 모든 것을 다 쏟고 간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하루에도 여러 차례 그는 속엣것을 쏟아냈고, 난 늘어진 그의 몸을 좌우로 돌려가며 뒤처리를 감당했다. 일이 반복될수록 힘에 부쳐 허리가 휘청거렸다. 입맛이 없어 음료수로 당 충전하고 며칠을 버텼더니 손발에 쥐가 나고 현기증이 일었다. 변을 치운 공간에서 햇반에 김을 싸서 밥을 먹었다. 죽어가는 부친 옆에서 밥을 먹는 죄책감은 또 다른 고통이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부친과 나는 위태롭게 서로를 의지했다.


복수로 인해 배가 부풀고 전신 부종은 점점 심해졌다. 대부분 시간 그는 수면 상태였고 가끔 깨어나면 여행을 가고 싶다고 했다. 그런 그를 위해 면도를 해주고 얼굴에 팩도 붙여줬다. 염라대왕이든 하느님이든 우리 부친, 잘 좀 봐달라고 기도하면서.


부친은 호스피스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이곳은 도와주는 분들이 있어 혼자 간호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언니가 학교 휴가를 내고, 나와 교대해 줬다. 난 밀린 잠을 자느라 한동안 기절했다가 이제 깨어났다. 잠에서 깨어나니 몇 주간 있었던 일들이 꿈인 것만 같다. 부친은 문자를 보낼 때마다 습관적으로 “회신 요망”을 붙였는데, 이제 나는 그의 회신을 받을 수 없어 슬프다. 그에게 유서를 써왔다고 화를 냈던 일이 슬프고 내게 좋은 일이 생겼을 때 가장 먼저 전화해서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사라진다는 사실이 슬프다. 어떤 질투도 없이 온전히 기뻐해 줄 세상 단 한 사람, 나의 사랑하는 부친 문영섭 씨, 나는 아직 그를 보낼 준비가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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