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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씨 Feb 26. 2022

03. 뭐, 그런대로 의미가 있죠

발렌시아가 모터백

출처 발렌시아가


저가항공사 제주항공에서 가끔 하는 이벤트가 있어요. 그 이벤트가로 중국 칭다오 왕복 항공권을  득템 합니다. 유류 할증비까지 계산하면 과연 특가인가? 아닌가? 를 '살짝' 의심하게 했지만 뭐, 표면적으로는 그랬습니다. 그 후 유류 할증비를 쏙 제외시켜서 혹하게 보이는 프로모션을 선별해내는 기회가 되었으니, 뭐 그런대로 의미가 있다고 해석하기로 했고요. 그리고 그해는 제가 서른이 되는 해였습니다. 수고한 저에게 앞으로 더 수고하자는 격려 차원으로 선물을 하기로 마음을 먹지요.


무엇을 살까, 진지하게 고민했습니다. 그전엔 면세점 둘러보고, 거울 앞에서 몇 번 들어 보고 마음에 들면 샀거든요.  1년에 한 번 면세점 쇼핑 포함 여행에 있어서만큼은 본능에 충실해보고 싶다, 아름답고 무용한 것을 추구해보고 싶다바람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그 외엔 가성비에 충실한 소비가 주였거든요.  지하철 정기권 60회 다 쓰면 뿌듯하고,  1인 1 메뉴 지키며 점심 런치 할인받아서 밥 한 톨 남김없이 깨끗이 먹으면 만족스럽고,  커피 쿠폰 찍는 것도 소소하게 기쁘고, 1년에 한 번 패밀리세일에서 만수르처럼 사면 부자가 된 거 같고, 쓰다 안 쓰는 거 중고거래로 판매하면 또 판매의 짜릿함을 느끼고 뭐 이런 식이었습니다.   그렇게 불만족스럽진 않았지만 조금은 다른 쇼핑을 경험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고심 끝에 선택한 것이 발렌시아가 모터백이었습니다. 활용도가 높다고 판단했거든요. 캐주얼과 포멀 한 차림 그 어떤 옷에도 부담 없이 잘 어울린다고.


근데 가방을 개시하자마자 사인을 하다가 대형사고(?)를 칩니다. 모나미 볼펜으로 기억하는데, 손잡이 부분에 10CM 길이의 흔적이 남거든요. 그때의 속상함은... 조금 과장하면 그 사고 흔적을 볼 때마다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상실감을 경험합니다. 속상했어요. 감히, 내 서른 기념의 가장 비싼 가방에,.. 뭐 이런 의식의 흐름이랄까요. 물론 지향하는 바 - 물건은 물건에 불과하다, 물건이 주인이 되어선 안 된다 - 를 되새김하긴 했어요. 속상함을 잠재우려고요. 근데 아는 것과 실천 사이엔 큰 괴리가 있더라고요.



근데 그게 끝이 아니에요. 칭다오 여행 다녀오는 길에 세관에 걸립니다. 이건 지금 생각해도 너무 속상하더라고요. 변명을 하자면,  한 번도 고가의 - 관세를 추가로 낼만큼 - 물건을 산 적이 없었어요. 면세점에서 살 때 점원이 세율을 설명해줬는데, 설마 걸리겠어?라고 어리석게 생각한 거였어요. 솔직히 제발 걸리지 말아라, 라는 바람도 강했어요. 어쩔 수 없이 솔직함으로 정면 돌파하기로 해요. “제가... 서른 기념으로... 진짜 큰 마음을 먹고 산 건데요.”라고 제 사연을 어필이라도 해보자고요.  근데 말이죠. 씨알도 안 먹혀요... 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세관장이 “신혼여행 다녀오다가도 많이 걸려요.”라고 말하더라고요. 제가 감정이입을 잘해요. 신혼여행 다녀온 길에 걸리면 진심 화가 날 거 같더라고요. 거기다 제가 납득을 잘하는 편입니다. '그래, 서른이 신혼여행을 이길 수는 없다' 단념하고 가산세  추가로 지불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불쾌한 기억 때문에 다시는 관세를 낼 만큼, 쇼핑을 하지 않습니다. 정말이지, 뭐가 되었든, 다 그런대로 의미가 있는 거죠.


근데 발렌시아가의 수난사는 이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모터백을 들고 외출한 어느 날, 가방의 부품이 ‘뚝’ 떨어졌거든요. 징이라고 불리는 손톱 만한 크기의 장식구였죠.  '명품' 하면 평생 고장 없이 쓸 수 있는 영구한 것인 줄로 만 알았는데 말이죠. 고장도 나고, 탈도 나더라고요. 일생을 살면서 한 번도 싸우지 않아서(?) 한 번도 안 싸울 순 없을 거 같으니 싸워도 가죽 표면에 상처가 남지 않을 만큼만 싸운 한마디로 상처 흔적이 없는 악어가죽을... 숙련된 장인이 한 땀 한 땀... 명품이 명품인 이유, 제가 추구하는 명품의 가치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면서 ‘속았다’라는 기분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조금은 억울한 마음으로 후속 조치를 취했습니다.  AS를 처음으로 맡기게 되었습니다.  (제가 소유하고 있는 것 가운데) 가장 비싼 데다 서른 기념이라는 의미부여까지 그 아이를 결함이 있는 상태로 놓아선 안 된다고 판단했거든요. 근데요. 저는 수리비 견적을 받고, 화들짝 놀랍니다. 이십만 원에 가까웠거든요. 중저가의 새 가방을 사고도 남을 금액이었습니다. 그것도 고작 손톱 만한 크기의 부품 교체 비용이었기에 충격이 꽤 컸습니다. 저는 그 가방 수선비를 지불합니다.



유난히 사건 사고가 많았던 제 발렌시아가 모터백 수난기입니다.



근데요. 여행은 여행을 하다 사건, 사고를 만나도 추억으로 왜곡되기도 되고, 미화도 되는데, 쇼핑은 그렇지 않더라고요. 충격적인 수리비 포함 일련의 일들이 계기가 돼 '과연 이 고가의 가방이 필요할까?'라는 질문을 최초로 스스로에게 던지게 되었습니다. 회의감을 느끼게 된 거죠.  그래서 제가 잠시 노선을 변경합니다.  당시 트렌디한 중저가 가방을 사 보기로요. 근데요. 인조 가죽으로 만들어진 그 가방을 더스트백에 넣어 놓고 한 6개월을 방치했더니... 가죽이 찢기고, 헤지고, 손상이 페스티벌이더라고요. 충격을 받았어요. 그보다 더 오래된 명품 가방은 사용감만 묻어나지 나머지 부분은 샀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견고함을 자랑하고 있었거든요. 가방에 있어서만큼은 최상의 경험을 쌓고 있었는데, 인식할 기회가 없었구나, 를 그 중저가 가방 덕분에 알게 됩니다. 그리고 높아진 기준이 쉽게 낮아지진 않겠구나, 라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어요.  여기에 십 년이 지난 가방 - 에트로 토트백 등 몇 가지를 중고 거래로 팔았을 때, 다시 놀랍니다. 십 년된 물건을 사고팔 수 있는 건 사실 희소 템이잖요.  가전제품, 의류, 신발과 같은 소모품은 당연히 대상이 아니고요. 근데  명품 가방은 거래가 되는구나, 살짝 감탄을 합니다. 뭐, 명품이 명품인 건 그리고 긴 시간 사랑받는 이유는 그렇게 다 이유가 있는 거였습니다.  물론 이건 제 의견이고, 비가 심하게 내리는 날엔 쓰지 말라고 권고하는 샤넬 우산 얘기를 들으면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하고 있음을  희미하게 느낍니다만... 뭐 그런 소비 역시 다 그런대로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렇게 여지를 두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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