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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 시네토크

한국영상자료원, 3/15

by 영화평론가 이병현 Mar 16. 2025

전에 예고했던 대로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린 마이클 파웰 & 에머릭 프레스버거 x 스콜세지 특별전에 시네토크로 참여했다. 이용철 평론가와 함께 나눈 이야기 중 일부를 블로그에도 기록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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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VD 세트에 대해]

이전에 쓴 글에서 일부를 수정하자면, 파웰&프레스버거 DVD에 실린 영상은 장면이 잘리거나 하지는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영상 길이가 IMDB에 실린 길이와 5분 정도 차이가 나는 것은 DVD에 실린 영상 소스의 프레임 레이트(FPS) 탓에 발생한 차이로 보인다. 무슨 소리인가? 싶을 텐데, 다음 글을 참고하길 바란다.

'거지 같고 아리송한 fps 에 관하여'
https://vfx-and-life.com/entry/%EA%B1%B0%EC%A7%80-%EA%B0%99%EA%B3%A0-%EC%95%84%EB%A6%AC%EC%86%A1%ED%95%9C-fps-%EC%97%90-%EA%B4%80%ED%95%98%EC%97%AC-%ED%86%B5%EC%B0%B0%ED%95%B4%EB%B3%B4%EC%9E%90


그러니까 이 DVD의 영상 소스가 PAL에 맞춘 것이라 재생 속도가 (23.976→25 프레임으로) 조금 빨라진 셈이다. 즉 나는 지금까지 파웰 감독 영화를 미묘하게 배속해서 보고 있던 셈이다. (그나저나 PAL 방식으로 제작된 2차 매체를 즐기던 유럽 영화인들이 과연 넷플릭스 1.2배속을 욕할 자격이 있을까?) 조금 복잡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인터넷에서 불법 다운로드를 통해 영화를 감상하는 분들에게는 자막 속도를 영상에 맞춰 보정하느라 친숙한 얘기일 수도 있겠다.

이런저런 고민 없이 보려면 역시 극장에 가서 보는 게 최고이긴 하다.

좌우간 나는 국내에서 합법적으로, 정상적인 화면비의 파웰&프레스버거 작품을 볼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DVD] 마이크 파웰 & 에머릭 프레스버거 콜렉션 세트 :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천국으로 가는 계단+검은 수선화+분홍신 (4DVD/미개봉)'이라는 이름의 DVD 박스 세트를 통해 파웰 감독을 접했는데, 이날 이 DVD 세트를 제작한 분이 이용철 평론가라는 것을 알게 됐다. 당시 1000개 정도 제작했다고 한다. 그제서야 내가 평소 이 DVD를 볼 때마다 느꼈던 많은 의문이 풀렸다.

이 DVD 박스셋은 한국에서 그렇게 유명하다고 볼 수 없는 감독의 영화를 모아 제작된 콜렉션임에도 유난히 애정이 담겨 만들어진 듯한 훌륭한 구성과 질을 자랑하는데, 특히 DVD를 들어올리면 그 뒤에 이렇게 영화에 대한 짤막한 소개글이 써있어 처음 중고로 구해보고 상당히 놀란 적이 있다.

브런치 글 이미지 3

보통 이곳은 DVD를 꺼내서 플레이어에 넣자마자 다시 덮어버리는 공간 아닌가? 한 마디로 여기 쓰인 이 글은 실제로 독자가 있을지 없을지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쓰인 글이라는 거다. 나로서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아마 많이 팔리지도 않을 것을 출시 전부터 알았을 DVD를 위해 왜 이렇게까지…'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알고 보니 이 글을 쓴 장본인이 이용철 평론가였다고 한다.

시네토크에서 나온 이야기지만, 당시 이 DVD 세트는 세계 최초로 만들어진 파웰&프레스버거 DVD 박스 세트였다고 전해진다. 원 소스를 제공한 회사에서도 나중에야 비슷한 구성의 DVD 세트를 출시했다고 한다. 이용철 평론가가 직접 해당 회사가 제작한 DVD를 가져와 이날 시네토크가 끝나고 첫 질문을 한 관객에게 선물로 전달했다. 원래는 국내에서 제작한 DVD를 가져오려 했는데 못 찾으셨다고…….

2.
[캔디와 헌터의 만남]
개인적으로 제가 영화에서 좋아하는 부분 중 하나는 캔디가 처음 헌터와 만나 대화를 나누는 부분입니다. 이 영화를 다시 보면 바로 눈치채실 텐데, 여기서 캔디가 처음부터 헌터에 끌리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영국인이 환영받지 못하는 상황 탓에 일자리를 잃은 헌터를 캔디가 위로해주는데요. 이제 어떻게 할 거냐, 돌아갈 거냐? 는 캔디의 말에 헌터가 “안타깝지만 돌아가야죠” 하고 시무룩하게 대답하자 그 숙인 얼굴을 살짝 들여다보면서 씩 웃습니다. 그러고는 “기운 내세요, 영국도 그리 나쁘지 않아요.”라고 하죠. 그러자 헌터는 고개를 쓱 들어올리면서 “그게 바로 우리가 증명하고 싶은 거죠”라고 강하게 말합니다. 그제서야 캔디는 다시 격식을 차리며 “예, 헌터 양”이라고 대답합니다.

캔디는 내심 헌터와 함께 영국으로 가고 싶은 듯하고, 헌터는 영국의 명예를 회복해 독일에 남고 싶어하는 듯합니다. 영국도 그리 나쁘지 않다는 걸 말하려는, 얼핏 같은 목적을 가졌지만 진짜 목표가 다른, 동상이몽이죠. 이 장면을 다시 보실 때 캔디의 시선과 눈빛에 집중해 보길 바랍니다. 헌터에 완전히 끌려 들어갔다가 비로소 자기가 왜 왔는지 깨닫고 카우니츠 얘기로 돌아가는 그 모습이 꽤 알기 쉽게 연기되고 있습니다. 이런 복잡미묘한 디테일이 영화에 많아서 반복해서 볼수록 재미가 있는 영화가 아닌가 싶습니다. 나중에 캔디가 다치고 나서 헌터가 고국에 대신 편지를 써줄까, 하고 물어볼 때 누구한테 편지를 써줄지 묻는 장면이 있는데요. 여기서 부모, 형제 얘기를 하다가 "피앙세?" 하고 샐쭉하니 묻는 대목이 있죠. 분명 이때는 헌터도 뭔가 마음이 있어보입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모두들 두 사람이 이어질 거라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독일을 떠나기 직전 헌터는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죠. 캔디는 이를 반기지만 작별 키스를 할 때에야 비로소 자신도 헌터를 사랑했음을 깨닫습니다. 이것도 캔디의 눈빛에 집중해 보면 대사가 나오기 전부터 분명히 이때 이미 보이는 감정이죠. 이 영화는 이렇게 무언가가 늦게 찾아오는 순간을 탁월하게 묘사합니다.

그런데 정말 이것은 뒤늦은 깨달음이었을까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저는 캔디가 이미 처음부터 헌터에게 끌렸고, 그것을 스스로 억눌렀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캔디는 스스로 인정하다시피 상당한 허풍쟁이이고, 이 사람의 말은 곧이 곧대로 믿어서는 안 되는 측면이 있거든요. 오히려 작은 몸짓과 눈빛이 더 정직하게 속마음을 드러낼 때가 많죠. 영화는 실은 주인공 뿐만 아니라 다른 인물들에 대해서도 말보다는 시선과 제스처가 더 정직하다는 듯한 태도를 내내 고수하고 있기도 합니다.


브런치 글 이미지 4


그리고 별건 아니지만, 이 첫만남 장면에서 헌터가 쓰고 있는 모자가 정말 이상해요. 이건 영어로 블림프 대령 영화를 검색하면 위키피디아에 실린 포스터에도 대놓고 실린 모자이기 때문에 그냥 대놓고 보라고 만든, 지나치기 힘들 정도로 이상한 모자인데요. 전 처음 봤을 때 저게 대체 뭐냐고 무심코 중얼거리면서 봤습니다. 보면 웬 박제된 새가 한 마리 엎드려 있거든요? 일단 한 번도 이 새를 바라보지 않고 헌터와 눈을 마주치고 얘기한다는 것 자체가 캔디라는 사람의 신사적 면모와 캔디가 헌터와 사람에 빠졌음을 드러내는 장치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저였으면 말하는 내내 새만 빤히 바라보다가 불쑥 “근데 이건 요즘 베를린 유행 패션인가요?” 하고 물어봤을 텐데요.

참고로 원래 각본에는 “그녀가 깔끔하고 화려하지 않게 옷을 입었다”고 묘사돼 있습니다. 각본과 완전히 반대로, 이 장면에서 헌터는 이보다 더 화려할 수 없게 묘사되고 있죠. 명백한 연출가의 의도가 들어간 복장인 셈인데요. 헌터가 사냥꾼이자 먹잇감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용철 평론가에 따르면 이번 특별전에 상영된 '메이드 인 잉글랜드'에서 파웰 감독의 이러한 작법에 대한 설명이 언급된다고 한다. 중간 중간 시선을 끌게 만드는 이상한 장면을 불쑥불쑥 넣곤 했는데, 감독 본인도 자신이 왜 이런 샷을 넣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고)

아마 제가 프로이트에 조금 더 정통했다면 이 새 모자가 어떻게 후에 캔디의 사냥과 방에 박제된 동물 머리들로 연결되는지 상세히 설명했겠지만 안타깝게도 저는 정신분석학에 그리 밝지가 못합니다. 하지만 어쩌면 이 순간 캔디라는 사람에게 헌터는 무의식 속에 동물 이미지와 함께 각인된 것은 아니었을까요? 게다가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 힘든 것이 이 여성의 이름은 에디스 헌터입니다. 아시다시피 헌터는 사냥꾼이잖아요? 관련해서 글을 쓴다면 상당히 흥미로운 착상이 될 것 같습니다. 이미 누가 썼는지도 모르겠지만요.

한 가지 힌트만 더 던져보자면, 영화에서 1차 세계 대전이 끝나는 장면에서 총성이 멎고, 새소리가 들려오죠. 이때 클라이브 캔디는 총성이 멎은 것을 듣고 휴전이라 생각하며 웃다가 새소리를 듣고 다소 표정을 굳힌 다음 하늘을 돌아보며 웃습니다. 이건 마치 독일인 친구 크레츠마 슐도르프(테오)가 헌터를 사랑한단 말을 듣고 충격에 빠졌다가 웃음을 짓는 모습과 비슷하죠. 어쩌면 캔디(로저 리브시)의 굉장히 독특하고 인상 깊은, 치아를 드러내는 듯한 이 웃음은 진실을 앞에 둔 채 회피할 때 나타나는 그만의 방어기제 같은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그렇다면 여기서 그는 무엇 때문에 웃는 걸까요? 아마도 그 다음 장면에 나오는 그의 말, “(전쟁이 끝났지만) 육무성에 가서 나를 사용할 다른 전쟁이 없나 물었어”라는 대사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캔디는 사냥과 폴로와 골프를 사랑하는 낭만적인 신사이지만, 동시에 사냥이라는 이 부르주아적 문화에는 모종의 폭력성이 숨어있다는 것을 우리는 동물의 머리가 훈족(독일인)의 군모로 향하는 장면에서 알아챌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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