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외국인이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 외벽을 맨몸으로 오르다 경찰에 붙잡혀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다. 영국 출신 어반 클라이버(Urban Climber·건물 외벽 등반가) 조지 킹 톰슨(George King Thompson)은 낙하산이 담긴 배낭을 멘 채로, 빌딩을 오르기 시작한지 3시간 만에 72층 언저리에서 붙잡혔다. 평범한 한 주의 시작을 앞두고 벌어진 갑작스러운 해프닝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됐다.
반응은 엇갈렸다. 공공의 질서를 해치는 일이므로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는 반응과 함께, 도전하는 모습이 멋있고 앞으로도 안전했으면 좋겠다는 입장도 일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처벌보다도 동기를 궁금해했다. 대체 왜 이런 무모한 짓을 하는 걸까? 공통적으로 뇌의 특정 부위가 손상된 사람들이라는 루머도 돌았다.
이미지 출처: Alexis Landot 페이스북
한국에서 어반 클라이밍이 논란이 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6년과 2018년 우크라이나 출신 고공 사진작가 비탈리 라스카로프(Vitaliy Raskalov)와 프랑스의 전설적인 어반 클라이머 알랭 로베르(Alain Robert)가 롯데월드타워를 등반해 논란이 됐다. 그러나 무대를 전 세계로 넓히면, 어반 클라이밍은 일종의 문화로 인정 받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초고층 빌딩을 오르는 경우는 드물지만 말이다.
목숨을 걸고 맨몸으로 빌딩을 오르는 사람들, 감옥에 갇혀도 다음에 어떤 빌딩을 오를지 상상하며 즐거워하는 사람들. 현실판 ‘스파이더맨’들의 이야기를 담아봤다.
캠퍼스 건물을 오르다가…어반 클라이밍의 역사
어반 클라이밍의 역사는 19세기 말 유명 산악인 제프리 윈트로프 영(Geoffrey Wintrop Young)이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건물을 오르던 것에서 시작한다. 물론 이전에도 많은 학생들이 교정 내 다양한 건물을 올랐으나, 가장 먼저 이를 기록한 게 영이었다. 영이 1900년에 출간한 ‘트리니티를 오르는 클라이머를 위한 가이드북(The Roof Climebers Guide to Trinity)’에는 교정 내 높은 건물들을 오르는 루트와 설명이 상세하게 담겨 있다고 한다.
케임브릿지 교정 내 건물을 오르는 학생, 이미지 출처: Cambridge Alumini Magazine
1900년대 해리 가디너(Harry Gardiner) 등을 비롯한 등반가들의 활약으로 어반 클라이밍은 유명세를 얻어 갔다. 아직 제대로 된 루트와 기술이 확립되지 않은 시기였던 만큼, 실패도 많았다. 대표적으로 1924년 헨리 롤란드(Henry Roland)는 미국 아이오와주의 한 법원 빌딩을 오르다가 10미터 높이에서 떨어져 큰 부상을 당했다. 8년 뒤 다시 도전해 12분 만에 이 빌딩을 주파하는 등 화려하게 컴백하긴 헀지만, 당시 사람들에겐 큰 충격을 안겨줬던 사건으로 현재까지도 어반 클라이밍을 이야기할 때 회자되고 있다.
1900년대 후반에 들어, 어반 클라이머들은 점점 더 높은 빌딩들로 무대를 넓혀갔다. 높은 빌딩이 지어지면 곧 맨몸으로 정상에 오르는 이들이 나타났다. 지금은 전설이 된 알랭 로베르는 1990년대 중반, 클라이머들도 혀를 내두를 높은 빌딩을 잇따라 완등했고, 많은 청년들에게 어반 클라이밍에 대한 꿈을 불어넣었다. 현재까지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은 두바이 부르즈 할리파인데, 이 빌딩도 2011년 로베르에 의해 정복됐다. 2000년대 이후 등장한 어반 클라이머들은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도전하고, 정복하며 어반 클라이밍을 더 높은 경지로 이끌어가고 있다.
이미지 출처: Alexis Landot 유튜브 채널
떨어지면 즉사…맨몸으로 빌딩을 오르는 이유는?
어반 클라이머들은 왜 목숨을 걸면서 빌딩을 오를까. 해외 커뮤니티와 어반 클라이머들이 밝힌 이유를 종합하면 크게 세 가지로 추릴 수 있다. 첫째는 개인적인 만족을 위해서다. 등산을 하는 이유와 비슷하다. 정상을 찍은 뒤, 도시를 내려다보며 얻는 만족감. 클라이머들 중 이걸 한 번만 경험해 본 사람은 없다고 할 정도다. 해외 유명 커뮤니티 '레딧'에서 만난 어반 클라이밍 3년 차 페르디난드 모에글리커(Ferdinand Moegleiker)는 “빌딩에 올라 도시를 내려다보면 도시 전체가 놀이터처럼 보이는 순간이 온다”고 말했다. 본인의 약점을 이겨내기 위해 어반 클라이밍을 한다는 이들도 만날 수 있었다. 뉴욕 롱아일랜드에서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잭 아자리아(Jack Azaria)는 높은 곳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빌딩을 오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두려움을 딛고 정상에 올랐을 때 얻는 심리적인 보상은 말로 표현할 수 없어요.” 아자리아가 말했다.
이미지 출처: Alexis Landot 유튜브 채널
둘째는 유명세를 얻기 위해서다. 열에 아홉은 경찰에 붙잡히고, 잘못되면 목숨을 잃는 빌딩 등반은 일반인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SNS와 언론을 통해 등반 사실이 알려지면 곧바로 유명세가 따라온다. 팔로워 수가 폭증하고, 인터뷰를 위해 언론사들이 줄을 선다. 어떤 빌딩을 먼저 오르고, 관심을 받는다는 건 그 자체로 훈장이 되기도 한다. 얼마 전 롯데월드타워를 오른 조지 킹 주니어의 오랜 친구라는 아담 록우드(Adam Lockwood)는 “조지가 빌딩을 올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인상적이기도 했지만 질투심이 들었다”고 했다. 록우드 역시 롯데월드타워를 버킷리스트에 넣고 오랫동안 준비해왔기 때문이다. 참고로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현존하는 어반 클라이머들 중 가장 유명한 클라이머는 ‘프랑스 스파이더맨’으로 알려진 알랭 로베르다. 50년 동안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루트로 많은 암벽과 빌딩을 올라온 로베르는 어반 클라이머들 사이에서도 ‘개척자(Pioneer)’로 불린다. 환갑이 넘은 그는 지금도 매년 많은 빌딩을 오르며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다.
마지막은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다. 빌딩을 오르는 행위 자체가 많은 주목을 받는 만큼 현수막이나 인터뷰를 통해 손쉽게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조지 킹 톰슨은 2년 전 런던의 한 빌딩을 맨손으로 오른 뒤 “기후 위기에 대한 경각심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알랭 로베르 역시 지구온난화와 국제분쟁에 대한 목소리를 꾸준히 내왔고, 대지진 희생자를 추모하며 빌딩을 오르기도 했다. 현재 그의 관심사는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 있다. 전쟁의 책임이 미국에 있다고 생각하는 로베르는 “정부와 언론의 관심이 뜸해지면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미국 내 빌딩에 오를 것”이라고 귀띔했다.
일반인들의 착각…무조건 높다고 어려운 건 아냐
알레시스 랜도트(Alexis Landot)는 100만 명이 넘는 인스타그램 팔로워를 보유한, 현 씬에서 가장 핫한 어반 클라이머다. 알랭 로베르 뒤를 이은 세계 2위로 그를 인정하는 클라이머들이 많다. 랜도트는 에디터와의 통화에서 “일반인들이 가장 많이 착각하는 건 높을수록 오르기 어려울 거라 생각한다는 점이다”라고 했다.
이미지 출처: Getty Images
랜도트의 설명에 따르면 어반 클라이머들 사이에서는 합의된 난이도 등급이 존재한다. 총 3단계로 나눌 수 있는데, 기준은 ‘손발을 끼워넣을 수 있는 홈의 깊이가 충분히 깊고, 간격이 일정한가’ ‘빌딩 구조상 다양한 자세로 휴식을 취할 수 있는가’ ‘위급한 상황이 생겼을 때 중간에 탈출할 수 있는 경로가 있는가’ 등이다. 이런 기준으로 판단했을 때 난이도 ‘하’에 해당하는 빌딩들로는 서울 롯데월드타워, 런던 더 샤드, 바르셀로나 호텔 글로리에스 등이 있다. 롯데월드타워는 555m로 전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높은 빌딩이지만, 건물 구조상 돌출된 철골 기둥이 잡기 편리하고, 등반 루트가 단순해 낮은 난이도로 분류된 걸 볼 수 있다.
난이도 ‘중’에 해당하는 빌딩들로는 프랑스 파리에 위치한 빌딩들이 주로 언급됐는데, 토탈 타워, 몽파르나스 타워, 메르쿠리아스 타워가 그들이다. 아래 네 명의 유명 어반 클라이머들이 함께 토탈 타워를 오르는 영상을 준비했다. 루트는 비교적 단순하지만, 빌딩 외벽이 문짝만 한 유리로 돼 있어 중간에 팔다리를 쉬게 하는 자세를 취하기 쉽지 않다. 쉴 때도 한쪽 팔로 무게를 지탱하면서 남는 팔을 터는 방식으로 짧게 쉴 수밖에 없다. 도중에 힘이 다 떨어져도 포기할 수 없다. 일단 시작했으면 무조건 끝을 봐야 한다. 마지막으로 난이도 ‘상’에 해당하는 빌딩은 요하네스버그의 IBM 타워, 시카고 시어스 타워, 슬로바키아 은행 등이 있다. “아직 이런 빌딩들은 시도할 생각도 안 해봤고, 앞으로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랜도트가 말했다.
분명 어반 클라이밍은 화려한 스포츠(?)다. 하지만 그런 화려한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국가들에서 이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제재하고 있는데, 빌딩 내외부에서 이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큰 불안감을 안기기 때문이다. 훈련된 어반 클라이머가 사고를 당하는 일은 극히 드물지만, 혹시라도 그런 일이 발생했을 때 주변 사람들에게 큰 트라우마를 안길 수 있다. 어반 클라이머들은 본인 목숨만 거는 게 아니라, 자신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평온한 일상을 누릴 권리도 함께 짊어지고 빌딩을 오르게 되는 것이다.
일찍이 어반 클라이머들 때문에 홍역을 치러야 했던 해외 국가들에선 법 규정을 확대 적용하는 방식으로 이들을 제재해왔다. 영국에선 공공 근린 방해(Public Nuisance)라는 명목으로 처벌했고, 폴란드에선 공공질서 문란(Public Disorder)이라는 혐의가 적용됐다. 미국에선 빌딩을 오르는 행위를 무단 침입(Tresspassing)으로 보고 벌금형을 내렸다.
롯데월드타워를 오르다 체포된 조지 킹 톰슨, 이미지 출처: SNS 캡처
반면 국내에선 아직 이렇다 할 처벌 전적이 없다. 2018년 롯데월드타워를 오르다가 붙잡힌 알랭 로베르에겐 업무방해 혐의가 적용됐지만 당시 롯데물산이 처벌을 원하지 않아 조사 과정 중 석방된 바 있다. 이번에 붙잡힌 조지 킹 톰슨에겐 건조물 침입 혐의가 적용됐는데, 피해 범위와 피해 사실 입증을 두고 전문가들의 시각이 엇갈리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경범죄 처벌법을 적용하는 방법도 있지만, 최대 10만 원 이하의 벌금형 정도만 받게 돼 사실상 제재 효과가 크지 않다고 한다.
문제는 애매모호한 처벌 규정으로 인해 ‘솜방망이’ 처벌이 반복된다면 한국이 ‘맛집’으로 소문나 더 많은 어반 클라이머들을 불러모으는 꼴이 될 수 있단 점이다. 물론 단조로운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신선한 충격과 즐거움을 주는 구경거리임에 틀림 없으나, 이건 어디까지나 어반 클라이머들이 떨어져 죽는 일 없이 안전하게 등반에 성공했을 때의 이야기다. 조금이라도 실패할 가능성이 존재하는 이상, 이들이 평온한 일상을 해치지 않도록 제재할 명분은 충분하다.
이미지 출처: Alexis Landot 유튜브 채널
“꼭 빌딩을 올라야 하나요?”
독일의 어반 클라이머 모에글리커에게 물었다. “반드시 빌딩일 필요는 없어요. 길가의 나무가 될 수도 있고, 동네 작은 도서관이 될 수도 있죠. 중요한 건 자신의 한계와 어려움을 딛고 무언가의 정상에 올랐다는 사실이라 생각해요. 높은 곳 자체를 무서워하는 사람이라면 계단이든 엘리베이터든 꼭대기에 갔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가 답했다. 노력으로 한계를 딛고 원하는 목표를 이룬다. 어반 클라이밍은 우리 인생에서도 종종 마주하게 되는 서사를 갖고 있다. 그래서 즐거움이 있고, 감동이 있다. 어반 클라이밍에 대한 이야기를 준비하면서, 행복과 열정이 잔뜩 녹아있는 목소리로 이를 설명해 주는 클라이머들을 만나고 나니, 자연스레 이들을 응원하는 마음이 생겼다. 불법이라고 설명도 했지만 속으로는 이들이 앞으로도 많은 빌딩을 정복해나가길 바랐다. 물론 안전하게 오를 수만 있다면 말이다.
문제는 고도(Altitude)가 아니라 태도(Attitude)에 있다. 산행의 본질은 정상을 오르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고난과 싸우고 그것을 극복하는 데 있다. -엘버트 머메리(Albert Mummery)
[참고문헌]
· What is Buildering? (Urban Climbing) And Is it Legal?, Zack Haze, Rockclimbinglif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