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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HYE Sep 01. 2020

토란잎 위 동그란 물방울들은

여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번 여름은 비가 참 요란하게 왔다. 하늘에 떠 있는 먹구름은 해를 위해 자리를 내어줄 생각을 눈곱만치도 안 하는 듯 미동도 없었다. 아침에 눈을 떠도 어두웠고 눈을 감는 밤도 어두웠다. 날씨를 닮아가는 기분 탓에 마음은 오래도록 저자세를 취했다. 그날도 어김없이 문 앞에 놓인 우산을 집어 들고 빗속을 함께 걸어줄 샌들을 골라 신었다. 1, 2, 3… 엘리베이터가 올라오는 동안 눈 둘 곳이 없어 하염없이 변하는 숫자만 보다 비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옆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먼지와 얼룩이 가득한 창문에 부딪힌 빗방울은 맺히다 흐르고 맺히다 흐르고를 반복했고 밖에는 비를 맞는 나무들이 들썩이며 잎을 떨궜다. 밖은 떨어지는 것들 투성이었다. 뒤통수에 요란함이 느껴져 돌아보니 오피스텔 복도의 전등이 명을 다했는지 리듬감 있게 깜빡였다.


땡! 퍼붓는 빗속으로 달겨들어야 할 시간을 알리듯 엘리베이터 도착 알람이 복도를 울렸다. 여름에 내리는 비를 좋아했던 어린 시절이 그날따라 더 가마득해졌다.



앞장서서 걷는 엄마와 아빠를 따라 삑삑 소리가 나는 구두를 신은 채 열심히 뒤따라 걸었다. 양쪽에는 담장이 높게 (지금 그 담장은 내 키 만하겠지.) 세워져 있었고 넝쿨들이 담장에 찰싹 달라붙어 푸릇한 잎사귀들을 자랑했다. 친할머니네로 가는 길은 미로처럼 꾸불꾸불했다. 전날 비가 왔는지 분홍색 구두는 황토색이 되었고 종아리까지 한껏 올려 신었던 흰색 레이스 양말은 땡땡이 양말이 되어버렸다. 물웅덩이에 진흙이 잔뜩 묻어버린 신발을 휘적이다 결국 양말까지 적시고 만다. 한참 멀어져 버린 엄마와 아빠는 물웅덩이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보고 눈을 한껏 째리고 빨리 오라며 손을 흔들었다. 멋쩍은 웃음을 지어보고는 다시 진흙이 묻을까 얕게 뛰었다. 물을 머금은 구두는 삑삑 소리를 더 신명하게 냈다.


할머니는 소박한 마당을 가진 소박한 기와집에 살았다. 마당 한 켠에는 수돗가가 있었고 그 옆에는 넓은 잎의 토란이 심어져 있었다. 엄마와 아빠가 할머니와 근황 토크를 하는 동안 나는 할머니께 재빠르게 인사를 하고 수돗가에 앉아 토란잎 위에 맺힌 물방울을 이리저리 흔들며 궁글였다. 비가 온 탓에 토란잎에는 알알이 물방울들이 앉아있었다. 그 투명하고 동그란 물방울을 잎맥을 따라 궁글이다 보면 하나의 뚱뚱한 물방울이 쪼개져 여러 개의 동그란 물방울을 만들었다. 빛을 머금고 반짝이는 여러 개의 물방울은 나에게 마치 보석 같았다. 만질 수 있을 것 같은 정교한 모양의 물방울을 손으로 톡 하고 건드리면 슥-하고 잎을 따라 바닥에 떨어지며 퍽 하고 터져버렸다. 손을 모아 수돗가의 물을 담아 토란잎 위로 떨구면 언제 사라졌냐는 듯 또 여러 개의 물방울이 맺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비가 오기 시작했다. 마루에 앉아 조금씩 거세지는 빗방울에 후들후들 흔들리는 토란잎에 시선을 두었다. 물방울들이 맺히지 못하고 떨어지는 모양새를 보니 마치 토란잎이 비를 털어내려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꽤나 그 토란잎을 오래도록 애정 했다. 더 이상 할머니네 집으로 가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 토란잎은 잘 있을까’ 걱정을 하기도 했더랬다.




발을 적시는 비가 제법 익숙해진 장마였다. 푹푹 패인 콘크리트 땅에 생겨버린 물웅덩이에는 지나다니는 차들이 만든 거품이 동동 떠 있었다. 으-. 까치발을 들고 용케 피했다. 비가 맺히기에는 이 도시는 장애물이 너무 많다. 땅에 닿기도 전에 건물에 부딪혀버리는 비들은 중력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흐르며 자욱을 만들고 딱딱한 땅에 닿아버린 비들은 머물 곳을 찾지 못하고 오래도록 고여있다. 보석처럼 영롱히 빛났던 동그란 물방울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그때의 나처럼 물방울들을 궁글이며 행복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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