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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HYE Apr 19. 2021

아빠가 야식을 사 오는 날에는

그날도 어김없이 6시 반이 되자마자 퇴근을 위해 저층 엘리베이터를 타러 계단으로 걸어 내려갔다. 내가 다니는 회사는 15층 꼭대기층에 있는데 퇴근길에 자칫 고층 엘리베이터에서 회장님을 마주칠 수 있다. (이런 일이 아주 잦았다. 심지어 회식 가시는 길에 마주쳐서 끌려간 적도 있다…) ‘권 과장, 요새 일은 어떻나.’라는 말부터 시작하는 어색한 대화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계단 몇 걸음 내려가는 수고를 기꺼이 하는 편. 띵동-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닫기’ 버튼을 미지근하지만 강력하게 꾹 누르려던 찰나에 한 남자가 가까스로 탔다. 가벼운 목례를 하고 다시 꾹 누르던 찰나에 다른 남자가 스윽 등장해서 재빠르게, 세이프.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슬쩍 건네더니 눈이 마주친 두 남자는 서로에게 너털웃음을 지으며 인사 대신 짝! 소리가 아름답게 나는 청춘물에서나 볼법한 깔끔한 하이파이브를 했다. 사장이 잠시 외출한 사이 좋은 타이밍에 탈출에 성공한 걸까. 엘리베이터 안이 쩌렁쩌렁 울리는 호탕한 웃음들을 들으니 괜스레 칼퇴에 성공한 나마저도 뿌듯해졌다.


“딸이 지금 몇 살 이랬죠?”

“아, 세 살이요. 요새 예뻐 죽겠어요. 집에 가면 맨날 내 다리에 매달려 있대니까요.”

“또래네- 내 딸은 네 살인데. 엄마보다 무서워. 잔소리를 그렇게 한다니까.”


퇴근과 동시에 두 아빠가 된 두 남자는 빠른 속도로 딸 자랑을 주고받기 시작했고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복도를 지나 건물을 나서는 순간까지 딸아이에 대한 대화를 그치지 않았다. 정문에서 나와 길을 건너려다 저 멀리 나란히 퇴근하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봤다. 그리고 기억 속 젊었던, 검은 머리가 풍성한 아빠를 떠올렸다.



어렸을 때 아빠는 가끔 퇴근길에 먹을걸 사 오셨었다. 현관에서부터 요란스러운 비닐봉다리 소리가 들릴 때면 부리나케 달려가 야식을, 아니 아빠를 맞이했다. 닭발이나 피자, 치킨 같은 야식다운 메뉴를 자주 사 오셨는데, 두 손 공손히 모아 비닐봉다리를 건네받고 거실 탁자에 턱-하니 내려놓으면 엄마와 남동생까지 거실로 슬금슬금 모여 깔끔히 해치웠다. 아빠는 고기 냄새를 풀풀 풍기며 러닝에 양복바지 차림으로 우리가 먹는 걸 지긋이 쳐다보시며 엄마와 함께 회사에서 있었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셨다. 꿈뻑꿈벅이던 눈, 입이 찢어져라 했던 하품, 헝클어진 머리, 한껏 풀어헤친 넥타이, 꼬깃해져버린 셔츠. 젊은 날의 아빠는 자주 녹초가 돼서 집에 돌아왔고 그만큼 부스럭대며 들어오는 야식의 날도 잦았다.


아빠가 야식을  오는 ‘특별한 이라고 여기며 마냥 즐거워했던  날들을 지금에서야 다시 떠올려보면, 소파에 앉아 우리를 보던 아빠의 시선이 눈에 선하다. 고달팠던 하루의 끝자락에 행복한 자식들의 얼굴들을 담으려던  눈빛이, 젊었던 아빠의 나이에 가까워질수록 점차 선명해진다. 어쩌면 일상에서 스쳐지나갔을지 모르는  아빠의 대화에서 나의 아빠를 떠올리게   또한, 아빠의 딸내미가 당신을 이해하는 나이가   지도 모르겠다. 이제서야 아빠가 우리를 담았던 다정했던 시선을  마음에도 켜켜이 쌓아 담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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