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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로밋 Dec 28. 2018

모두에게 같지만 다른 길. 카미노 데 산티아고


 현실에서 도망쳐갔던 길이었다. 이 일에 치이고 저 일에 치이는 생활에 지쳐 현실에서 벗어나 내 꿈이었던 길로 도피했다. 오롯이 나 혼자였던 길 위에서 각각 다른 시작을 품은 사람들을 만났다. 사랑에 도망쳐서, 아버지의 죽음으로 텅 빈 마음을 채우기 위해, 성 야고보를 기리기 위해 같은 이유를 품은 그들과 함께 길을 걷고 하나의 마을에 도달했지만 우리는 모두 다른 끝에 도착했다. 그 길은 카미노 데 산티아고. 산티아고로 나아가는 순례길이였다.

산티아고 순례길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발자국과 역사가 스며들어 있다. 최초로 스페인에 파견된 사도였던 예수의 제자 야고보(산티아고)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길을 걸어갔다. 그 후 9세기에 그의 시신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근처에서 발견되었고 그곳은 성지가 되어 산티아고 순례길이 탄생하였다. 지금도 천년이 넘는 시간위로 수많은 순례자들이 걸어나가고 있다.

길은 하나로 정해져 있지 않다. 가장 오래 사랑받은 프랑스 남부의 생장피드포르에서 시작되는 프랑스 길을 비롯해 포르투갈길과 은의 길 같은 많은 길이 존재한다. 그 모든 길들은 스페인의 북서쪽의 도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하게 된다. 어떤 길과 방법을 선택하냐는 온전히 순례자의 몫이며 길은 당신에게 각각 다른 앎으로 향하게 할 것이다.

길은 따스함으로 가득 차있다. 나는 낯선 길 위에서 마음의 도닥임을 얻었다. 산길에 지쳐 주저앉은 나에게 동료 순례자들은 등을 두드리며 응원해주었고, 물집으로 엉망이 된 발을 봐주고 약을 내밀었다. 나는 곧 누군가 나에게 말을 걸까 두려워했던 마음은 곧 떨쳐버리고 웃으며 “Buen camino(즐거운 길 되세요)!”를 외치게 되고, 걸으며 지나쳤던 이들을 산티아고에서 만나 환하게 웃으며 안아주게 되었다. 웃음이 모여 길은 더욱 특별해갔다.

순례길은 하나의 풍경만을 보여주지 않고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나폴레옹이 넘어간 피레네 산맥과 양질의 포도주를 만들어내는 포도밭이 가득한 라 리오하지방. 어린왕자의 머리칼이 떠오르는 밀밭이 가득한 뜨거운 메세타지방과 짙은 안개와 보슬비가 매일같이 내리는 갈라시아지방을 걸어나가면 길의 목적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달하게 된다. 하나의 도시는 모두에게 다른 감정으로 존재한다. 800km라는 길을 매일매일 조금씩 걸어 나갔던 지난 기억의 종착지인 이곳에서 나는 감사함의 충만을 느꼈다. 다른 누군가는 눈물을 흘리며 기쁨을, 누군가는 기도하며 숭고한 시작을, 누군가는 아쉬움을 품고 떠나갔다. 길에 매료되어 다시 길을 찾게 될 수도 있고 일상으로 돌아온 뒤 천천히 깨달음을 얻어 갈 수도 있다. 길은 아무런 말 없이 존재하지만 그 위의 순례자들은 서로 다른 감정을 품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혼자의 시간이 필요해 도망치듯 떠난 길이었기에 입을 동여맨 채로 나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외로움과 평화로움과 반성을 알았다. 사람이 그리워졌을 때 내 옆을 함께 걸어준 이들에게 배려와 다른 시각과 따듯함을 배웠다. 혼자 걸어도 함께 걸어도 행복했던 산티아고 순례길. 그길 위에 당신의 발자국을 남겨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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