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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보라 Feb 26. 2023

열아홉의 내가 먹여 살린다

N잡러의 단상

나의 하루 중 반나절 정도의 포션을 차지하고 있는 영어 강사 일. 대학생 때 시작한 과외부터 지금까지 15년의 역사를 가졌다. 15년이란 시간의 힘은 대단하다. 교재의 챕터 이름만 봐도 자판기처럼 설명이 턱 나올 정도이니 말이다. 15년의 힘은 크게 머리를 쓰지 않고, 쉽게 노력 없이 돈을 벌 수 있게 한다.


시간의 힘을 느끼게 하는 이 일을, 나는 사랑하지 않는다.

한 업무에서 경력이 오래된 사람들이 그러하듯, 매너리즘에 빠져서 일이 재미가 없다거나, 새로운 것이 없다는 이유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28살 때쯤 호기롭게 시작한 학원 사업이 내게 큰 빚을 안겨 주며 끝이 나버린 비극 때문일 것이다. 아직도 가끔은 빚이 발목을 붙잡고 있어서 가슴이 답답할 때가 있다. 그 원흉이 된 사업에 뒤돌아 보지 않고 새로운 일로 이 상황을 끝내버리고 싶은 마음이 안개처럼 낮게 깔릴 때도 많다.


그래서 부단히 노력했다. 부단히 제멋대로 살아온 시간만큼. 새로운 일을 하기 위해 참 치열하게도 살았다는 말을, 나는 내게 헌사하고 싶다. 시간은 어김없이 나를 배신하지 않았고 새로운 일을 할 기회를 많이 주었다.

교육용 프로그램 기획, 원고 작업, 책 제작 등 정말이지 요즘 뜨는 키워드 N잡러의 삶 그 자체를 살아내는 중이다. 이것들을 이룬 내가 눈물겹고,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서 마음에 동그란 것들이 차오르기도 한다.


그럼에도, 다달이 나가는 대출금과 빚 때문에 일이 더 필요했고, 나는 또 학원을 선택했다.

선택이 쉽지 않았던 만큼, 매일 출근길, 퇴근길마다 마음에 엉키는 감정들도 여러 겹이다.

치열하게 새로운 일로 옮겨가기 위해 노력했던 시간에 대한 미안함,

그래도 아쉬울 때마다 다시 이 일을 할 수 있게 해 준 열아홉 나에 대한 고마움.


열아홉 살 고3이 되던 해, 3월 첫 모의고사 영어 과목에서 나는 30점을 받은 충격으로 영어 공부를 정말이지 치열할 정도로 열심히 했다. 다음날부터 9월 모의고사까지 6개월 동안 인터넷 강의부터 시작해서 인강 교재 3권을 달달 외울 정도로 파고들었다. 나 자신과 시간, 노력의 공모로, 9월 모의고사에서 영어 과목 1등급을 받았다. 그렇게 시작되었다. 드문드문, 위기의 순간에서만 나오는 내 치열한 노력의 역사가.


이후 나는 영문학과에 입학했고, 학원 사업을 열었다가 20대를 마무리하며 함께 망해버렸다.

 다시는 영어 교육 쪽은 쳐다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치열하게 다른 일을 하기 위해 노력했고 결과를 얻어냈는데, 지금은 다시 돌고 돌아 영어 강사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열심히 살았는데, 왜 다시 난 열아홉의 나에게 기대고 있는 것인가.


돈 때문에 일을 하는 재미없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너무 되고 싶지 않았던 나머지 그렇게 되어버렸다. 나는 이렇게 서글픔에 무언가 중요한 것들을 아주 잊어버린 채 살고 있다. 그리고 가끔 받는 반가운 연락에, 내가 잊은 것들이 다시 생각나곤 한다.


"쌤 잘 지내세요? 저 이번에 고등학교 원서 썼어요. 뮤지컬 배우가 되고 싶어서 예고 가고 싶다는 말, 엄마한테 하기 어려웠는데 저번에 쌤이랑 얘기하고 용기 얻어서 부모님 설득했어요. 정말 감사해요. 선생님은 제가 만난 선생님들 중 최고의 선생님이에요! 감사해요. 잘 지내세요!"


일을 사랑하지 않는 선생님에게 최고의 선생님이라니.

송구스러울 정도의 과찬에 고개를 숙였다.


"선생님~ 가끔 무척 이상하시지만, 같이 공부해서 재밌어요."


초딩에게 메시지를 받고 픽 웃음이 났다.


여전히 이 일을 사랑하지 않지만, 사랑하려고 애쓰지도 않으려고 한다. 비극으로 끝났어도 나는 학원을 직접 열 정도로 이 일에 자신이 있었고, 무엇보다 학생들이랑 친구처럼 잘 지내는 사람이다. 지금도 애들이랑 서로 농담하고, 놀리고 웃는 시간이 재밌다. 사랑 없이 일한다는 단죄가 날 더 옭아매고 서글프게 한다. 그래서 마음을 조금 더 쉽게 먹을까 한다. 일이 아니어도 슬픈 일이 많은 게 삶인데, 열아홉의 내가 먹여 살리면 뭐 어때. 그때의 내 능력치가 꽤 상타치였나 보지. 라며, 더 쉽고 가벼운 생각으로 슬픔을 내 감정의 겹에서 덜어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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