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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illness Nov 26. 2020

물러 터진 단감

서슬 퍼렇게 날이 선 바람이 불던 오늘 아침, 아파트 단지 앞에서 음식물 쓰레기통을 뒤적이는 남자를 봤다. 왜인지 허리가 구부러진 초로의 남자는 구정물이 '뚝 뚝' 떨어지는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열고, 물러 터진 단감 두 개를 꺼내 자신의 자전거 바구니에 집어넣었다. 그 장면을 보고 나는 얼굴이 후끈 달아오른 채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어제저녁 냉장고 한편에 숨어 있던 단감 하나를 깎아 먹은 탓이다. 먹다 남은 두어 조각을 가차 없이 쓰레기통에 쑤셔 넣은 탓이다.


누가 볼까 싶어, 붉어진 얼굴을 마스크로 감추며 후다닥 집으로 도망쳐 왔다. 어깨를 짓누르던 코트와 가방을 문 앞에 던져놓고, 푹 진 소파에 앉아 눈을 감았다. 오늘따라 시간이 정말 더디게 흐른다는 생각을 했다. 시간의 사이사이가 텅 빈 채로 더디게 흘렀다면, 그것은 명상이나 수행의 한 갈래라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우겼을 것이다. 하지만 찰나의 사이마다 묵직한 생각과 마음이 가득 들어찬 일종의 사색을 위한 번제물은 단순히 독이며 낭비다.


내가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까지 노트 한 장을 펼쳐놓고 이렇게 궁상을 떠는 까닭은 원망이나 죄책감 혹은 유독 물질의 중독성 때문은 아니다. 그래서 더 답답한 것이다. 덮어놓고 네가 잘못했거나, 내가 잘못한 것이라며 탓할 수 없어서.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아무리 애를 써도 알 수가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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